<-- 길들일 수 없는 짐승 -->
“저희가 서로 싸워봐야 얻을게 없을 텐데요.”
“협력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야 낫지.”
사이프카르가 왜 백작가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충성스러운 부하조차 믿지 못해서였다. 꼭두각시를 세워둔다 하더라도, 문제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권력과 마약은 현실감각을 잊게 만든다.
그런데 꼭두각시 부하도 아닌 카르안을 백작의 자리에 앉혀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분명 카르안은 제어가 가능한 맹수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를 묶고 있던 목줄을 끊더니, 주인과 동등한 자리에 앉으려한다. 이대로 가면, 그런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셈.
사이프카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속 편하게 말하자고.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솔직히 내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너한테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대해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가 하려는 일은 조금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흑룡회의 부 지부장으로 살아도, 평생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 넘쳐나는 돈과 호화스러운 생활. 하지만 그런 안정된 삶을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흑룡회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르안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이프카르는 그를 ‘이해’했다. 대체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저 남자는, 길들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아무리 쇠사슬을 채우려 해도, 그것을 끊고 한없이 올라갈 신수.
카르안이 양 손으로 깍지를 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협력할지, 아니면 백작가와 등을 돌릴지.”
“너는 항상 결정된 질문을 하는구나.”
사이프카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카르안을 치기에는, 너무 큰 위험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카르안이 아직 이빨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배신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수준. 결국 알페라츠 백작령을 흑룡회가 집어삼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함께 하지. 대신 계약서를 적어줘야겠어.”
“그야 당연하지요.”
“타라카르의 계약서. 거기에 맹세해.”
약속과 계약의 신. 그의 이름을 건 계약. 계약은 신성력 앞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다. 사이프카르와 카르안. 두 사람도 이 계약만큼은 어길 수 없다.
어떠한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 방법. 이 계약은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건 원래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적대적인 세력끼리 주로 하는 계약이다. 그러니까, 카르안과 사이프카르의 신뢰관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저는 배신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지요.”
“계약은 오늘 바로 한다.”
“마법사 길드에서 만나죠.”
대화는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었다. 계약의 내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상호 불가침 조약. 길게 갈 것도 없이, 카르안과 사이프카르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카르안은 금세 방을 나섰다. 그녀와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었기 때문. 문 밖에는 카라나리와 조직원들이 어색한 침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르안에 카라나리에게 손짓했다.
“이만 가지.”
“저......”
누군가 카르안에게 다가왔다. 러슬라이와 제이크. 다른 부하들과 다르게, 그들은 카르안을 직접 모시고 다녔다.
무척 혼란스럽겠지. 카르안은 그 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약간의 오해,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눈에 약간의 희망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보자.”
카르안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흑룡회 사무실을 나서려했다. 카라나리는 그런 카르안을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다. 문을 열기 직전, 카르안이 마지막으로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어. 너희는 나를 위해 일하고, 나는 너희를 위해 일한다.”
카르안은 여전히 흑룡회의 부 지부장이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2.
“정말 잘해줬어.”
건물 밖. 카르안은 카라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여름인데도 서늘한 기분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가끔 이 여자는 얼음덩어리로 만들어진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지?”
분명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실력은 기사단장이던 타브와 비슷하거나 조금 밑. 하지만 방금 전 사이프카르와의 결투에서는, 전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운이 좋았던 것입니다.”
카라나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은 순수한 겸손이 아니었다. 만약 사이프카르가 급하게 공격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조여 왔다면. 그런 상처를 입히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이프카르는 육체적 능력만 믿는 타입이 아니었다. 인간의 가질 수 없는 긴 경험으로 단련된 숙련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변칙적인 공격을 주로 하는 검술사.
경험이 많다는 것은, 어지간한 공격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을 것이고, 사이프카르의 체력을 감당하지 못한 카라나리는 결국 검을 놓쳤으리라.
“운도 실력이지.”
카르안은 이기나 지나 무표정인 소녀를 내려 보았다. 예상 이상의 재능. 지금까지 생활고에 찌들어 검술 수련시간이 없었지만, 제대로 시간을 두고 수련하니 그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지금까지 실전만 겪느라 바빴는데, 그 경험과 스승에게 배운 화룡검법(火龍劍法)을 정리하고 나자, 실력이 한 단계 늘어난 것이다.
카르안이 연금술의 재능을 얻었다면, 카라나리는 검술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렇다면 카르안이 할 일은 무엇일까.
‘잘 키워봐야겠어.’
카라나리는 이제 카르안이 검이 된다. 스승도 없이 혼자 수련해서 이 정도 경지에 오른 것이면, 전력을 다해 지원했을 때는 얼마나 자라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카르안님.”
“응?”
“백작은 왜....... 카르안님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입니까?”
카라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인가 싶어서 눈치를 본 것이다. 하지만 카르안은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백작가에 서큐버스를 보낼 생각이었다. 마침 적당한 이유도 생겼고.”
서큐버스는 항상 흑룡회에 큰돈을 지불하는 백작에게, 선물 형식으로 전해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선물을 준다고 제안하면, 눈치 빠른 사이프카르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침 좋은 장애물 하나가 나타나 주었다. 루베아이라. 혜성같이 나타난 유흥가의 다크호스가, 백작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흑룡회의 거래에 훼방을 놓기 시작한다.
그 덕에, 카르안이 백작에게 서큐버스를 보낼 명분이 하나 더 생겼다. 저 방해하는 여자도 좀 떼어놓고, 백작에게 환심도 살 수 있다. 게다가 저 서큐버스가 백작을 유혹해서 유산의 일부를 받으면, 우리에게 용돈이라도 좀 생기지 않겠는가.
잃을 것도 없는 제안. 사이프카르는 별 의심 없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서큐버스를 보낸다 해도 끝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서큐버스는 사람의 의지까지 바꿀 수 없어요.”
카라나리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분명 서큐버스는 이성을 매혹시키는 매혹술이 있지만, 그것도 분명한 제한이 있다.
서큐버스 퀸(Succubus queen)쯤 되면 매혹술로 사람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레이카는 평범한 서큐버스. 매혹술을 극한으로 발휘시켜봐야, 잠자리에서 몽롱한 느낌을 주거나 이성의 환심을 사는 정도에 불과하다.
‘정신 지배라도 배우지 않는 이상........’
서큐버스 중에서는 가끔 정신 지배를 배운 자들도 존재한다. 원래 정신지배라는 마법 자체가 실용성이 바닥을 기지만, 서큐버스랑은 제법 궁합이 좋은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 레이카는 정신지배(Mind Control)를 익힌 서큐버스다.”
카르안이 마족의 제국, 오펜바흐에 뮬리펜을 보낼 때 미리 부탁해 두었다. 러슬라이가 뽑아올 서큐버스는, 반드시 정신지배 마법을 배운 서큐버스로 보내달라고.
러슬라이가 눈치 챌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마족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뮬리펜 밖에 없었으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마족어로 서큐버스를 구했다. 지원의 필수 조건은 일정 수준 이상의 정신지배 숙련자.
러슬라이는 그것도 모르고 ‘지원하는 서큐버스가 이상하게 적다’면서 투덜거렸을 것이다.
“정신지배가 워낙 시원찮은 마법이긴 하지만, 약에 찌든 노인 한명 보내기는 쉽거든.”
정신지배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능력일 것 같지만, 들이는 노력에 비해 그 효과가 없다시피 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정신지배를 10년 넘게 익힌 마법사가 전력을 다해도, 정신만 바싹 차리면 잠깐 어질하고 끝이었다.
강력한 기사는커녕 동네 양아치 하나 못 길들인다. 누가 그런 마법을 배우겠나. 다만 정신이 반쯤 무너진 사람에게는 유용했다.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알페라츠의 백작.
서큐버스의 매혹술과, 정신지배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레이카는 서두르지 않았고, 얼마 안 가서 백작의 레이카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 뒤는 간단했지. 그 양반. 나중에는 내가 죽은 아들인지 알더라고. 하하하........”
카르안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뭔지 모를 쓴맛이 묻어있었다.
“카르안님.”
“진짜 멍청한 놈이야. 지 아들을 죽인 건 나인데. 나보고 돌아와 줬구나.......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 정말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였어.”
“카르안님.”
뚜욱-
카르안의 발이, 거리에 멈춰 섰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의 오후. 사람들은 무엇인가 떠들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기분이다. 갑작스런 우울감. 카르안은 반사적으로 품 안을 뒤졌다.
“젠장.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평소에 담배를 보관하는 가죽 주머니에는, 떨어져나간 담배 부스러기밖에 없었다. 카르안은 입맛만 다졌다.
“하.........”
카르안은 자리에 서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백작을 그냥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남아있는 정신 밑바닥까지 유린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백작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보여주는 순박한 웃음.
‘그놈은 쓰레기였어.’
카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백작으로도, 아버지로도 실패한 사람이다. 그런 놈이 아들을 향해 웃어봐야, 전부 하찮은 위선에 불과.
불과해야 했는데.
카르안이 눈을 감았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착하게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허용치 이상의 일을 저지르고 나면 뒷맛이 씁쓸했다.
퇴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마음 한 조각이, 아프게 저려왔다.
좋지 않았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듯한 기분. 이런 감정을 빨리 잘라내지 않는다면, 천천히 카르안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카르안님.”
그때,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은, 작은 무언가가 손을 감싸 안았다. 카라나리였다. 그녀가 양 손으로 카르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카르안이 카라나리의 손을 먼저 잡아주었지, 지금처럼 반대의 경우는 별로 없었다.
거친 손. 검을 잡으면서 찢어졌다가 다시 회복된, 자잘한 상처가 잔득 박힌 손. 그것은 카라나리에게 하나의 콤플렉스였으니까. 의외로 그녀는 다른 부위보다 손을 가장 부끄러워했다.
소녀가 말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백작은 농민들에게 세금으로 농작물을 거두어갔고, 그 양은 부조리할 만큼 많았습니다.”
“그런가.”
카르안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당연히 농사는 풍작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 특히 가뭄이 심한 해에는 일 년치 농사를 전부 망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카라나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농민들은 세금을 낼 수 없었고, 분노한 백작은 기사단과 함께 농민들을 찾아갔지요. 너희들은 왜 세금을 내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는 만큼, 너희도 얻는 곡식을 내 놓아야 한다.”
“그래서?”
“농민은 대답했습니다. 내지 않은 게 아닙니다. 내지 못한 겁니다. 세금으로 낼 곡식은커녕, 내일 먹을 밥도 없습니다........”
카라나리의 눈가에, 슬픈 빛이 서렸다.
“그 말을 듣자, 백작은 농민들의 아내와 딸들을 죽였습니다. 단, 매력적인 여자들은 제외하고. 농민들은 기사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여자들은 죽거나, 백작의 노리개가 되었지요. 그 중에는 제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도 있었습니다.”
“.........”
“카르안님이 한 일은, 결코 죄책감을 가질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칭찬받아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카라나리의 독특한 위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하는 것치고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카르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 카라나리가 자신을 위로해 주다니. 그것 자체가 신기했다.
카르안은 카라나리의 손을 당겼다.
“잘 알겠다.”
카르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발걸음에 약간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게, 조금은 위로가 된 것 같았다. 당신이 죽인 것은 선량한 사람이 아닌, 인간의 밑바닥을 기는 쓰레기. 카라나리는 카르안의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줄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백작은 세금을 내지 못하는 농민에게 오히려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적어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백작은 무능했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귀족이었다.
‘이걸로 괜찮아.’
카라나리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거짓된 달콤함이라도, 사랑하는 연인을 웃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어느덧 백작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라나리는 카르안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