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어?”
백작이 눈을 껌뻑였다. 순간 이게 현실인지, 상황파악이 잘 안 된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갑자기 왜 레이카가 무릎을 꿇는다는 말인가.
처음 카르안에게 암살을 들켰을 때, 백작은 죽은 자신의 아들을 팔아먹을 생각까지 했었다. 봐라, 카르안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번일은 없었던 걸로.......
실로 추잡하기 이를 때 없었지만, 심지어 그것도 억지였다. 타브가 불구가 된 것은 카르안이 아닌 사이프카르와 싸우다가 그런 것. 그리고 카르안이 한 것은, 타브를 죽인 게 아니라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 타브의 껍데기를 처치한 것이다.
이미 악투루스에게 몸을 빼앗긴 순간부터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사실 백작은 아들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멀쩡하던 아들이 불구가 된 것은 그렇다 쳐도, 갑자기 거대한 괴물이 되어 카르안과 싸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전부 목격자들이 한 말에 불과했다. 마침 본 사람도 얼마 없었는데, 몇 안 되는 목격자들은 타브가 갑자기 괴물로 변한 다음, 카르안과 카라나리. 둘과 혈투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럴 리가.’
백작은 그저 아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아들이 백작의 자리까지 던져가며 사라질 이유가 없었지만. 어차피 마약에 찌든 백작은 정상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힘겨워했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게.”
백작이 헐레벌떡 레이카에게 달려갔다. 그는 레이카의 작은 어깨를 들어 올려 주려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소녀가 백작님께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감히 백작님을 노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어떤 겉치레도 없다. 순수한 소녀가 예상치 못한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 레이카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분명 제게 큰 실망을 느끼셔서, 기사들에게 저를 죽이라고 명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소녀, 부끄럽게도 살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백작이 허둥거렸지만, 레이카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한없이 흐르던 눈물을 닦더니,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거짓말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백작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천한 목숨뿐입니다.”
“잠깐, 멈춰!”
레이카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만큼은, 미소로도 억누르지 못했다.......
“비록 좋지 못한 자리에서 만났지만,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모룬 백작님.”
모룬 백작. 백작의 본명이었다. 레이카는 항상 백작을 백작이라고만 부르고, 이름은 불러주지 않았다. 레이카에게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본명. 가슴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레이카가 단검으로 배를 찌르려했다. 저대로라면 죽는다! 백작은 늙은 몸을 날려 레이카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다! 지금 이건 아니야!”
“으읏!”
잠깐의 힘겨루기 끝에, 레이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단검을 놓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쇠붙이는 바닥을 굴렀다.
“한심하군요. 백작님.”
그 모습을 카르안이 경멸스럽다는 듯 내려 보았다. 백작은 레이카를 품에 안은 채, 카르안을 올려보았다.
“백작님. 당신의 기사들이 레이카를 암살하려 달려들 때, 그리고 암살이 끝났을 때. 저 서큐버스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뭐, 뭐라고?”
카르안의 무례한 태도. 백작은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카르안이 침을 한번 삼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들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향할 때, 저 여자는 백작님이 얼마나 노하셨을 지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기사들의 전부 처리했을 때도, 그녀는 살아남은 것을 죄스러워 했지요!”
“허어억!”
백작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사이비 교주에게 호통을 들은 신도가 이런 표정을 지을까. 카르안은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목구멍위로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죄스러워하기는 얼어 죽을.’
암살자들이 습격할 때 레이카는 카르안 뒤에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암살자들의 정체가 기사라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어떻게 하면 백작을 턱수염을 전부 뽑아버릴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르안이 방금 한 말은 처음부터 오류가 있었다. 처음부터 기사들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데, 레이카가 어떻게 그들이 백작이 보낸 기사라는 것을 눈치 채겠는가.
하지만 원래 말이라는 것은, 냉정한 판단보다는 그때그때의 감성이 중요했다. 실제로 이 난장판에서, 백작이 카르안의 말에 이상한 점을 눈치 챌 리가 없었다.
오히려 레이카의 헌신적인 사랑에 푹 빠진 표정이었다. 백작은 조심스럽게 레이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하지만 백작의 눈에는, 그 어떤 미녀보다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카르안은, 분노를 거두고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님. 대체 이 아이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모룬 백작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결국 백작도 레이카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었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다.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버린 백작의 침실.
레이카도 백작의 품에 안겨 꾹꾹 울음을 참아대었다. 하지만 카르안은, 그게 울음이 아닌 웃음을 참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감동적일지 몰라도, 카르안의 눈에는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귀신같이 속아주는 백작이 신기할 뿐이었다.
‘저게 말이 되냐?’
어떤 미친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껴, 야밤에 쳐들어와 자살 쇼를 벌이겠는가. 설령 온다고 해도, 단검으로 자신의 배가 아니라 상대의 모가지를 노리겠지.
‘아니, 속아줄 만도 한가.’
말도 안 되는 각본과 별개로, 일단 레이카의 연기는 백점짜리 명품 연기였다. 카르안의 즉석 대본의 완벽하게 소화해낸 천재적인 실력. 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은 가련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면,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요?”
“용서할게 뭐가 있겠어. 죄는 내가 지었는데!”
“다행이다.”
레이카가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전처럼 처연한 웃음이 아닌, 정말로 행복한 것 같은 웃음. 백작은 크게 감동했지만, 카르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 이상 저 가식적인 꼴을 봐 줄 수가 없었으니까.
“흐흠. 뭐 본인이 괜찮은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카르안은 대충 그렇게 말하고 나가려했다.
“그리고 기사들이 저까지 습격한 것은, 그냥 묻어갈 테니 신경 쓰지 마시길.”
“그게 정말인가!”
백작이 깜짝 놀랐다. 분명 흑룡회와 마찰이 있을 줄 알았는데, 카르안이 직접 없던 일로 해준다고 한 것이다. 레이카는 그렇다 쳐도, 카르안까지 자신에게 지나칠 만큼 친절하다.
“고맙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
“하아. 알겠습니다.”
카르안은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한밤중에 일어난 난리 통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
그들의 얼굴에는, ‘궁금해 죽겠는데 무서워서 물어보지는 못하겠다.’ 라고 적혀있었다. 카르안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예에?”
시녀가 화들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는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고 있더니, 막장 말을 걸어주니까 당황부터 한다.
“기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예? 기사님들은, 지금 숙소에........”
당연히 기사들은 백작가의 비상전력.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24시간 내내 가문 안에게 상주한다.
하지만 불침번을 서는 몇 명을 제외하면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아니, 아마 카르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전부 기상해 있을 수도 있다. 카르안은 잠시 고민한 뒤, 시녀로부터 기사들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그럼. 한번 가 볼까.”
카르안은 인파들을 해치고 나와 저택 밖으로 나왔다. 여름의 하늘은 더없이 깨끗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밤이었다.
2.
“흐아아암.”
화창한 점심시간. 사이프카르가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아침부터 앉아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카르안과 레이카의 ‘백작가 대소동’이 있고 난지 일주일. 그녀는 책상위에 쌓여있는 서류의 탑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처리해야 할 종이의 양이 늘어가고 있다.
“가끔 내가 여기 지부장인지 회계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
사이프카르가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일하던 회계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지금의 사이프카르는, 다른 지부장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범죄 조직의 지도자라기보다는, 마치 유능한 엘리트 여성 같다.
흑룡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려면, 회계작업이 필수적이기는 하다. 단순이 사람을 협박하거나 싸구려 약 몇 개를 파는 게 흑룡회의 일은 아니니까.
지금 그들이 관리하는 가계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거기에 백작령 최고의 권력자와 연줄이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부자들을 손님으로 관리하고 있다. 게다가 조직에서 직접 운영하는 가계들까지 수십 개.
이쯤 되면 거대한 기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부장들은, 회계사들을 고용해 관리를 맡긴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전쟁에서 지휘관이 직접 싸우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여기서도 지부장의 역할은 굵직한 결정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프카르는 다르다. 그녀는 전투에서도, 회계에서도 항상 전방에서 직접 처리한다. 장교가 직접 검을 뽑고, 전투 한복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그녀는 항상 앞에 서 있었고, 부하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아 내 눈.”
사이프카르가 짜증스럽게 눈을 비볐다. 하루 종일 서류를 봤더니 눈이 살살 아파온다. 당연히 육체적인 피로일리는 없다.
지치지 않는 그녀의 육체는, 잠도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길게 자봐야 하루에 1시간 정도. 평소에는 10분정도 눈을 붙이는 게 전부였다.
오죽했으면 ‘지부장님은 침대에서 자는 시간보다, 남자랑 즐기는 시간이 더 많을 거다.’라는 농담까지 들려오겠는가. 더 놀라운 것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육체와 별개로, 정신이 지친 것이리라.
아무리 단단한 철옹성이라도, 안이 녹슬기 시작하면 흔들거리는 법이다. 지금의 사이프카르는, 그렇게 녹슨 마음을 갈아치울 작업이 필요했다.
“나 나갔다 온다.”
“예?”
사이프카르가 서류덩이를 휙 집어던졌다. 두터운 서류뭉치가 회계사에게 날아갔다. 얼떨결에 그 덩어리를 받은 회계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잠깐!”
그가 황급하게 말했다. 사이프카르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만큼. 그녀는 회계사도 한두 명 정도밖에 고용하지 않았다. 물론 사이프카르의 능력이 출중하기에 그럭저럭 견딜 만 한 업무량이 나오는 것이지만. 만약 그녀가 사라진다면?
거대한 신전을 받치는 기둥하나가 쑥 뽑히는 셈이다. 당연히 기둥이 뽑히면 무지막지한 서류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고, 회계사는 그 밑에 깔려 죽겠지.
“아, 안 돼!”
“돼!”
사이프카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밖을 향했다. 스트레스가 잔득 쌓였으니, 이제는 터지기 전에 그 나쁜 기운을 빼 내야 했다. 그러니까 술집에서 신나게 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야심찬 계획은, 헐레벌떡 달려온 부하들에 의해 막혀버렸다. 한명도 아닌, 여러 명의 부하들이 동시에 사이프카르에게 달려왔다.
“지부장님, 큰일입니다. 알페라츠 백작가의 모룬 백작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사인은?”
“마약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그래. 생각보다 빨리 가셨군.”
잠깐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백작령의 백작이 죽었다. 그나마 암살이 아니라 다행이기는 하지만, 한동안 바빠질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백작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타브밖에 없었는데, 그런 외아들은 진작에 죽었다.
“알고 있는 거 다 말해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이프카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백작이 자연스럽게 죽은 것도 아니다. 미리 유언장을 적어놓지 않았다면 재산 분배나 후계자 등의 문제로 상당히 복잡해지리라. 당연히 부하들도 아는 게 없겠지.
“그 늙은이 성격에 유언장도 안 남겼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죽기 전날 저녁, 마법사 협회의 도움을 받아 유언장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사이프카르의 표정이 굳었다. 죽기 전날 유언장을 완성한다. 뭔가 안 좋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유언장의 내용은? 알고 있어?”
“예. 재산 분배에 관련된 것하고, 후계자까지 전부 지목했습니다.”
“큰일이군. 그나저나 카르안은 지금 뭐하고있어? 빨리 불러와.”
사이프카르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백작가를 카르안이 맡은 만큼, 내부 사정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희들.......”
“누님.”
제이크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무언가, 싸늘한 것이 사이프카르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한참을 침묵하던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백작가의 후계자가 카르안 형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