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시간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카르안은 흑룡회 사무실에 출근하고, 포션과 마약을 만든 다음 빠르게 퇴근한다. 그 뒤로 잠자리에 들 때 까지 개인적인 용무를 본다. 굴곡 없는 시간. 하지만 그 고요한 시간이, 과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카르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평온한 안정기는, 그를 발전시킬 훌륭한 기회임이 분명하다.
오늘도 그는 평소처럼 카라나리의 집에 들렀다가, 일을 마친 서큐버스, 레이카를 바래다주고 있었다. 밤이 어둑하게 내려앉은 시간. 달과 마법석이 혼합된 푸르스름한 빛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카르안과 레이카, 그리고 레이아라였다.
“야하하하! 카르안님! 이것 좀 봐요!”
서큐버스 소녀 레이카는 번쩍거리는 목걸이를 들고 자랑하듯 내밀었다. 가느다란 은으로 된 목걸이. 중간에는 투명한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황금 장식이 달려있다. 그러니까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
“그건 어디서?”
“백작님이 주셨지요~”
레이카가 자랑하듯 말했다. 검고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꼬리가 살랑 흔들린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양. 그녀는 번쩍거리는 목걸이의 중간에 쪼옥 키스했다.
“그렇게 좋냐?”
“이거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레이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말했다. 백작이 선물로 준 것이니 설마 가짜일리는 없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엄청 비싼 물건 아닌가. 그녀는 목걸이가 사랑스럽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보석이라니. 여기까지 오길 잘했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재능이 있는 분야에서 일한다면, 그것 또한 반 정도는 성공한 삶. 그런 의미에서 서큐버스 레이카는 완전히 성공한 마생(魔生)이였다.
‘돈도 섹스도 너무 좋아!’
타고난 미모와 색기.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게 침대에서 하는 운동이었다. 그렇게 실컷 즐기고 나면 금화가 차곡차곡 쌓인다. 오히려 밤일을 즐기는 것은 레이카인데, 돈도 상대방이 내 주지 않는가.
모두에게 사랑받고, 큰돈까지 만질 수 있다. 비록 이곳 백작의 밤 기술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있던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돈을 주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따로 불편한건 없나보군.”
“예. 경쟁자도 없어서 너무 좋아요. 아~ 그냥 여기 눌러 붙어 버릴까.”
물론 레이카는 그녀가 원래 살던 도시에서도 잘 나가는 서큐버스였다. 러슬라이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왔겠는가. 다만 독보적일 정도로 인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카 말고도 서큐버스가 많았다. 대부분의 서큐버스들은 유흥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이 붙어있던 것.
죄다 남자 다루기를 귀신같이 하는 여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레이카는 눈에 띄는 존재였지만, 사실 최상위권이라기에는 조금 위태위태한 상태.
그런데 여기는 어떤가. 서큐버스는커녕 마족도 한명 없다! 그녀 외에 타 종족이라면, 지금 옆에서 뚱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엘프가 한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었다. 즉 경쟁상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알페라츠 백작령은 그녀의 세상. 레이카의 존재는 이 백작령의 밤문화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리! 그녀가 흑룡회의 유곽에서 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최고의 몸값을 찍는 일에 성공했다.
‘진작에 인간들 쪽으로 올걸 그랬나?’
잠깐 레이카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 무턱대고 오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레이카가 남자를 기막히게 유혹한다 하더라도, 전투적인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그녀를 보호해줄 든든한 방패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흑룡회. 알펜 왕국에서 가장 큰 조직과 손을 잡는다면, 적어도 길거리에서 칼을 맞고 죽는 일은 없다.
게다가 백작을 유혹하고 유산을 뜯어내라니, 돈도 돈이지만 어쩐지 재미있어 보였고, 실제로 쉬운 일이기도 했다. 백작이라고 해봐야 고작 인간. 레이카는 별 고민 없이 그 도전을 수락했다.
“근데 카르안님.”
“응?”
“이번 일 끝나면, 여기서 조금 더 일해도 되요?”
레이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봤다. 이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냥 떠날 수 있나. 이참에 흑룡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금 더 지내볼 생각이 떠올랐다.
“상관없겠지.”
카르안도 거절하지 않았다. 레이카는 (이쪽 방면에서) 유능하고 본인의 의욕도 넘쳐흐른다. 굳이 마족이라고 집에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다른 유곽들은 울상을 짓겠지만, 그건 카르안이 알 바 아니었다.
카르안은 그렇게 말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레이카의 일은 잘 풀리고 있다. 그리고 대장간에 맡겼던 골렘 5기. 그것도 대부분 완성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일이 다 완벽하게 풀리기만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일이 엉켜버렸으니까.
카라나리의 검술을 복제하는 일. 우선순위로 치면 1순위로도 부족하다. 카르안은 치프의 연금술을 이용해, 그녀의 검술을 복사해서 회로에 삽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의 개인 전투력을 급격히 상승시킬 수 있다.
지금은 골렘 10기를 더 찍어내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을 기르는 것. 그게 더 중요하다. 일단 자기 몸 하나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의 기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원인을 모르겠어.’
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까. 원한다면 치프의 집에 가서 장비를 뜯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알페라츠 백작령을 벗어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혹시나 알샤인의 잔당들이 습격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기는 카르안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알페라츠 백작령이라서 안전할 뿐. 무엇보다 이미 알샤인 교단에서 치프의 집을 탈탈 털어갔을수도 있다.
“하아.”
카르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일이라는 게, 항상 마음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레이아라가 카르안을 식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 함께 어울려 줬더니.’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보나마나 또 복잡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겠지만. 자기를 옆에 두고 신경도 써주지 않으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든다.
“레이아라 씨야 말로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요?”
레이카가 중얼거렸다. 원래 카르안은 오늘 일을 마친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방금 전 백작가 앞에서 만나 숙소로 가고 있는데, 뜬금없이 웬 엘프가 끼어들었다. 그래놓고 이러쿵저러쿵 불평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서큐버스는 난입한 엘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능하면 둘이 있을 때 카르안에게서 점수를 따기 편하다. 카르안은 이곳 흑룡회의 실력자. 그와 친하게 지내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진다.
서큐버르의 말에, 레이아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에요?”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서큐버스다. 창관에서 일하는 예명도 레이카라니.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지 않나. 거기에 항상 이상한 향이나 풍겨대는 게, 아주 음란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정신 사나우니까 싸우지 좀 마.”
카르안이 둘을 중재했다. 둘 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도저히 생각에 잠길 수가 없었다.
“레이카. 백작은 확실히 끌어들인 거겠지?”
“물론이죠.”
카르안의 질문에 레이카가 방긋 웃었다. 흑룡회의 기대대로, 그녀는 백작의 혼을 반쯤 빼 놓았다. 카르안이 신기한 듯 말했다.
“하, 그나저나 신기한데. 그 할아버지 척수도 안서던데,”
다른 곳은 설까? 엉뚱한 망상이 떠올랐다.
카르안이 백작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항상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아직 허리가 굽을 나이까지는 아니지만,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막 굴리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과연 그런 사람이 밤일은 가능할까.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카르안의 속을 파악한 레이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 저희만의 비결이 있죠.”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기에 서큐버스인 것이다. 그녀의 마법은 대부분 성관계에 관련된 쪽으로 치중되어 있었고, 기력 없는 사람을 위해서 반 강제로 쾌락을 짜내버리는 법도 있었다.
“저는 시체 빼고는 다 세울 수 있어요.
그녀가 작은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레이아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박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휴. 말을 말아야지.”
“뭐에요, 어차피 레이아라씨도 술집에서 일하잖아?”
“저는 당신처럼.......”
“둘 다 그만 좀 해.”
카르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둘은 잠깐 으르렁거리다가, 고개를 픽 돌렸다. 카르안이 레이카에게 물었다.
“그러면 루베아이라는 반응이 어떻지?”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죠.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좋아. 그래도 적당히 자극하라고. 너무 심하지는 않게.”
루베아이라의 신경을 돌려놓는 건 좋지만, 그게 너무 심하면 문제가 된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꼭지가 돌아서 암살자라도 보내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어차피 뒤처리는 다 흑룡회에서 해 주잖아요.”
“괜히 힘 뺄 필요 없다는 뜻이야.”
어차피 루베아이라는 백작이 죽으면 떠날 여자다. 조금 짜증나긴 해도 서로 멱살 잡고 싸운 사이도 아닌데, 큰 마찰은 피하고 싶다.
툭.
그때였다. 레이아라가 제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또 뭐가 불만인 것일까. 카르안이 레이아라를 돌아봤다.
“........”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긴장된 표정이로 한 곳을 보고 있다. 하늘?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건물의 옥상방향.
“카르안씨.”
“응?”
“혹시, 부하들이랑 이곳에서 만난다고...... 약속이라도 했었나요?”
“아니. 왜?”
휘릭-
레이아라의 손끝에서 빛이 번쩍였다. 엘프의 푸른 마나가 순식간에 새의 형상을 완성했다. 엘프의 마법. 수년간 용병생활을 한 레이아라는, 어지간한 공격마법을 순식간에 만들 수 있었다.
마나의 새는 레이아라의 손을 벗어나, 하늘로 날쌔게 날아올랐다. 한 마리도 아닌 수십 마리! 아름다운 공격이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펼쳐진다. 어둡던 도시에 푸른빛의 직선 몇 개가 주욱 그어졌다.
챠아아앙!
그리고 불꽃놀이처럼 새들이 터져나간다. 건물 옥상을 향해 날아간 레이아라의 공격은, 무언가 번쩍이는 것에 막혔다.
“뭐야!”
카르안은 혀와 손을 동시에 움직였다. 마법진이 벽에서 피어나며 골렘 2기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뭔지는 몰라도 레이아라가 지금 공격을 했고, 건물 위의 누군가는 그 공격을 방어했다. 카르안이 할 일을 하나뿐.
“으, 으앗?!”
레이카도 이런 일은 예상 못했는지 당황한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옥상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6명이 땅으로 착지했다.
툭.
가벼운 발걸음.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다치기는커녕 소리도 잘 안 난다. 한눈에 봐도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라고 해도 말 안하겠지.”
남자들은 전부 입에 검은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신을 검은 천옷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이건 암살자의 복장이다.
그런 암살자들이 순순히 정체를 밝혀 주겠는가. 그들이 등에서 각자 장검과 단창 등의 무기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들의 무기에서는, 오러가 서리기 시작했다.가
“읏.”
레이아라가 신음을 삼켰다. 그녀가 4급 용병이라지만, 지금은 그녀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활이 없다. 게다가 그녀 옆에 있는 서큐버스도 전투능력은 시원찮다.
그런데 저 암살자들은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일단은 오러 사용자. 거기에 숙련된 암살자라면, 설령 그녀에게 활이 있다고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다.
레이아라가 카르안쪽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마침 인적 드문 공터. 거기에 사방으로 포위당했다. 일단은 뭉쳐야 한다.
“야밤에 저 시커먼 사람들은 뭐에요?”
“그건.”
카르안이 상대를 예측해보려 했다. 하지만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원한을 만든게 한둘인가. 당장 알샤인인지, 아니면 악투루스의 자식들인지 새끼들인지 하는 놈들. 혹은 그냥 흑룡회에 원한이 있는 놈일수도 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카르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를 신호탄삼아,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있는돈 다 박은 이더리움값이 반토막 나서........ 한강 앞까지 갔었는데....... 뛰기 전에 마지막으로 폰을 켰더니, 혹시나 하고 쟁여둔 코인들이 반등해서.......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정말 코인장난은 안해야겠네요. 물론 원금회수까지만 하고 말이죠.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