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100)화 (100/124)
  • <-- 폭풍전야 -->

    “반갑습니다. 백작님.”

    카르안이 예를 표했다.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섭섭하지도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이미 그가 흑룡회 사람임을 알아본 백작은, 반갑게 카르안을 맞이했다.

    “으응?”

    그런데 옆의 어벙한 서큐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카르안이 다급한 마음에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그제야 눈치 챈 듯 허리를 푹 숙인다.

    “앗, 안녕하세요!”

    “하하. 아름다운 아가씨로군.”

    레이카가 귀엽기는 했는지,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꽃핀다.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다. 카르안이 슬쩍 확인하자, 백작의 눈동자가(음침한 방향으로) 탁해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게. 루베아이라.”

    “예.”

    “미안하지만, 이 사람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

    백작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부탁을 하고도 민망한지 곁눈질로 힐끔거리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백작이라는 자가 처도 아닌 첩에게 쩔쩔매다니. 원래 정 반대가 되어야 할 텐데.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정말 백작은 저 미모의 첩에게 꽉 잡혀 사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루베아이라는 의외로 군말 없이 백작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고. 처음 봤을 때의 은은한 미소를 띄운 그대로다.

    “크흠. 자, 안으로 들어오게.”

    백작이 접견실의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카르안과 레이카가 안에 들어가자,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백작이 카르안이 들고 있는 검은 가방을 힐끔거린다. 그가 손뼉을 짝 치고 말을 이었다.

    “내 주문을 잘 들었겠지? 조만간 귀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한다고. 실수가 없어야하네.”

    “물론입니다.”

    혼자 이 많은 약을 소비할리는 없으니, 예의 그 친구들을 부르려는 것이겠지.

    카르안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딴 건 몰라도 약 하나는 실수 없이 만들 자신 있다. 그는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

    순간, 멀쩡해 보이던 백작의 눈이 변했다. 또한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금단 증상의 시작이다.

    고급 마약일수록,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티가 안 난다.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마약 중독자인지 건전한 모범시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 하지만 중독성이 심한 만큼 주기적으로 약을 맞지 않으면, 그 미묘한 차이는 순식간에 커지게 된다.

    백작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얼굴의 식은땀을 닦는데, 그게 영 위태로워 보인다.

    이미 백작은 중년을 넘은 노년의 영감님이다. 그런데 마약에 이렇게 찌들어서 살다니, 언제 심장에 무리가 가도 이상하지 않다.

    ‘혹시 지금 죽기라도 하면, 나만 의심받는 거 아니야?’

    이미 백작의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카르안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큐버스까지 투입한 것 아닌가. 근데 그 숨이 끊어지는 것도 적당한 여유가 있어야지, 당장 죽으면 곤란하다. 혹시라도 백작을 암살했다며 누명을 쓸 수도 있으니까.

    “후우. 미안하네.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백작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카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상품 설명을 시작했다.

    “그, 설명은 이만하면 되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이 열심히 이야기하던 카르안의 말을 끊었다. 그는 이미 카르안의 설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백작은 약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전문가다. 아무렴. 직접 몸으로 시험해 보지 않았는가. 카르안의 설명도 계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VIP에게는 친절하게 모든 물건을 설명하는 게 흑룡회의 방식이었으니까. 여기서 이 특급 손님들은, 숨어서 약거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최상위 계층을 뜻한다. 공권력 위의 존재들. 그러니 느긋하게 설명을 들으며 약을 즐기는 게 관례다.

    “알겠습니다.”

    카르안은 싱긋 웃어주며 가방을 닫았다. 이미 알거 다 아는 사이다. 귀찮은 허례허식은 무의미. 지금은 무조건 백작의 말을 들어주는 게 정답이다.

    카르안이 순순히 말을 멈추자 백작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의 흑룡회 조직원들은, 원칙상 설명을 다 들어야 한다면서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하지만 카르안은 유도리있게 쓸모없는 설명은 넘겨 버렸다.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급할 때 시간을 끄는 것만큼 짜증나는 게 어디 있는가. 게다가 마침 손이 살살 떨려온다. 빨리, 빠르게 새로 구입한 물건들을 즐기고 싶었다.

    “아, 이건 샘플입니다.”

    “응?”

    서둘러 가방을 잡으려던 백작에게, 카르안이 작은 봉투를 건넸다. 새하얀 종이 안에는 손톱만한 고체가 들어있다.

    샘플은 거짓말. 카르안이 미리 준비한 것이다. 백작이 중증 마약 중독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백작은 서둘러 그 봉지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안의 내용물을 물도 없이 삼켰다. 씁쓸한 맛. 떫은맛이 동시에 올라온다. 불쾌한 맛. 하지만 다음 순간부터 맛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

    천국에 가면 이런 기분일까. 멍 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고, 시야가 또렷하게 돌아온다. 덜덜 떨리던 손도 평소처럼 진정된다.

    또한 마음속에서 올라오던 조급함. 고민 등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 이거였다. 바로 이 기분이다.

    해탈의 경지에 오른 동방의 수도승이 이런 기분일까. 모든 마음이 한없이 확장되는 기분이다. 삼라만상의 고민거리를 모두 던지면, 사람은 이렇게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좋군.”

    백작은 한마디로 지금 기분을 표현했다. 좋다.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것 외에 지금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방법이 찾지 못하겠다.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몸에 힘이 넘친다.

    “후후. 그런데, 옆의 귀여운 아가씨는 무슨 일로 오신건가.”

    “저희의 작은 선물입니다.”

    카르안의 대답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처음 카르안의 옆에 레이카가 서있을 때, 백작은 저 서큐버스가 흑룡회에서 보내는 선물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카르안을 보좌해주는 것도 아니다. 비서가 아니라는 뜻. 무엇보다 저 소녀 등 뒤에서 파닥거리는 작은 날개, 또 엉덩이에서 유혹하듯 살랑거리는 악마의 꼬리만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큐버스!’

    모든 남자에게 극락을 느끼게 해준다는 종족. 그것까지 확인하자 확실해졌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백작은 눈치를 봐 가면서도 루베아이라를 이번 거래에 오지 못하게 했다. 만약 지금 옆에 루베아이라가 있었다면, 카르안이 지금과 같은 말을 하기도 상당히 어색했을 것이다.

    백작의 예상은 적중. 그는 헤실 거리고 있는 서큐버스를 내려 봤다.

    ‘귀여운 얼굴이군.’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고 키도 작다. 귀여운 인상.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더 없이 매력적이다.

    마약 덕에 불안, 조급함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른 감정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잔하던 마음이 맥박치기 시작한다.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한 젊은 열기. 백작은 어두운 눈으로 레이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아, 수고했네. 돈은 밑에 층에 내려가면 집사가 전해줄것이야.”

    백작이 행복한 표정으로 카르안에게 말했다. 눈치도 빠르고, 이런 미녀까지 선물해주다니, 싫어할 수가 없는 남자였다.

    “참. 자네 이름이 뭔가?”

    “카르안입니다.”

    “그래. 카르안........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카르안을 직접 본 것은 처음. 백작은 그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카르안도 백작의 인사를 받고 난 다음, 문 밖으로 향했다. 나가기 직전, 카르안은 서큐버스에게 눈짓했다.

    “.......”

    잠깐이지만, 순진하게 빛나던 서큐버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0.1초 정도의 짧은 순간.

    카르안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얼굴을 찌푸렸다.

    “어이구.”

    문 밖에 나가자마자, 카르안은 가장 보기 싫은 얼굴 1순위를 봤기 때문이다. 루베아이라가 그를 찌릿하고 노려보았다.

    “방금 그 서큐버스는 뭐죠?”

    “굳이 아는 것은 물어보지 마세요. 입 아프니까.”

    카르안이 까칠하게 말했다. 이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줘야 할 필요가 없다. 루베아이라는 카르안의 말에 얼굴을 확 찌푸렸다.

    백작 앞에서 보여주던 현모양처 같은 모습과는 정 반대. 그녀가 그늘진 얼굴로 카르안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지금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 같은데, 쉽게 생각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루베아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서큐버스라는 종족이 위협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예의범절도 모르는 멍청한 어린애 아닌가. 루베아이라는 베테랑답게, 레이카가 인사하는 모습만 보고 그녀에 대한 모든 판단을 끝냈다.

    ‘분명 나와 백작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거겠지. 하지만 저런 멍청한 여자애가 나보다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압도적인 힘을 타고난 라이칸스로프 등이, 기술 훈련을 게을리 하다가 싸움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지금 백작과 함께 들어간 레이카도 비슷하다고, 루베아이라는 생각했다.

    서큐버스의 타고난 유혹술과 미모. 그 둘만 믿고 설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룻밤 상대로는 즐거울지 몰라도, 금방 물려버린다. 반면 자신은........

    루베아이라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잠깐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괜찮아졌다. 다만, 마음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서큐버스라도, 제가 저런 꼬마 애한테........”

    “맞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카르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다. 뭔가 무능한 부하에게 중책을 맡긴 기분. 좀 불안불안 한게, 이제는 저 서큐버스가 사고나 안치기를 바랄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일까. 유산은 서큐버스가 대부분. 흑룡회는 조금을 가져가게 되어있다. 팁도 모두 서큐버스의 것.

    그 대신 선금을 주거나 한 것도 없다. 이미 절대 거스를 수 없는, 타라카르의 계약을 맺었기에 저 서큐버스가 돈을 가지고 붕 뜬다던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안녕히 계시길.”

    카르안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손을 한번 휘젓고 계단을 내려간다. 힘이 없다. 지금 카르안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백작의 유산 몇 푼이 아니었다........

    루베아이라는 힘없이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그림자가 힘없이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2.

    카르안이 다음으로 들린 곳은 대장간. 악마의 진주를 눈으로 확인한 이상, 골렘을 조금 더 찍어내도 좋은 상황이다. 카르안은 금고에 남은 잔고를 대부분 털어가며 골렘 제작을 의뢰했다.

    ‘비싸기는 하군.’

    카르안이 사용한 금액을 보며 혀를 찼다. 버는 게 많은데, 골렘을 만드느라 금화가 한여름의 얼음조각마냥 스륵 녹아버린다.

    밑 빠진 독에 물 붇는 콩쥐가 된 기분. 하지만 돈 몇 푼 아낀다고 골렘을 적게 생산할 수는 없다. 아직 그를 위협하는 세력이 많이 있으니까.

    카르안은 대장간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알샤인 교단에서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고, 악투루르의 자식들이라는 뭔지 모를 놈들도 그를 노린다. 목이 달아나면 많은 금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직접 만들 수도 없단 말이야.”

    한번은 카르안이 스스로 골렘의 외골격까지 만들어보려 했지만, 당연히 애꿎은 망치만 몇 개 부러뜨렸다. 섬세하고 작은 관절 부위는커녕 팔뚝 하나 만들 수가 없었다. 골렘 제작은 수십 년간 단련한 장인이나 가능한 솜씨. 카르안 같은 초보자가 섣불리 건드릴게 아니다.

    그냥 재능을 살려 포션이나 만드는 편이 좋았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야지, 물고기를 잡으려 하면 쓰겠는가.

    꽝! 꽝! 꽝! 꽝!

    요란한 망치질 소리, 검을 기름에 담금질하는 끓는 소리 등이 사방에서 귀를 때린다. 팔 근육이 발달한 대장장이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쇠를 두드리고, 깎는다.

    여름의 열기에 화롯불까지 더해져, 주변은 온통 후덥지근. 하지만 불길에 맞서는 용사들은, 지칠 줄 모르고 망치질을 해대고 있다.

    단 한명. 이 대장간의 주인을 빼면 말이다. 그는 유독 수척해진 얼굴로, 힘없이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평소의 정력 넘치는 모습과 다르다.

    그는 다가오는 카르안을 보자 힘겹게 웃어보였다.

    “오셨군요.”

    “조금 늦었습니다. 그나저나 얼굴이 말이 아니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카르안의 걱정스러운 말에, 장인은 민망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옆에 있는 물통을 들고 벌컥벌컥 내용물을 비우더니, 그간 사정을 이야기했다.

    짧은 이야기. 그 말을 듣던 카르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레이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