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98)화 (98/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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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카르안은 돌아온 뮬리펜에게 인사했다. 뮬리펜도 그런 카르안을 잠시 쳐다보더니, 허리를 푹 숙였다. 카르안은 마족이 된 성녀를 내려 보았다.

몸은 이제 괜찮아진 것일까.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다. 창백한 피부에는 여전히 생명력이 없어보였고, 태양빛으로 빛나던 금발은 달빛과 은빛으로 희게 물들었다.

과거에 빛의 신을 섬기던 성녀가, 이제는 밤의 귀족이 되어버렸다. 만약 운명의 신이 있다면 참 지독하다고 해야 할까. 뮬리펜도 마족이 된 자신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카르안은 찰랑거리는 뮬리펜의 은발을 훑어봤다. 전에 완전히 백발로 탈색되었던 머리가, 마력이 흐르며 기묘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뮬리펜이 정말 마법의 종족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몸은 괜찮으신지.”

“예. 덕분에.”

뮬리펜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떠나간 시간까지 생각하면, 이제 뱀파이어가 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뱀파이어로써는 어린애 수준. 제대로 마족의 능력을 드러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카르안의 지원 덕분에, 그럭저럭 뛰어난 흡혈귀와, 고위 뱀파이어의 혈액까지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태양을 견딜 수준은 아니다. 아마 낮에는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겠지. 뮬리펜은 조금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저도 왔습니다.”

뮬리펜 뒤에서 러슬라이가 슬프게 소리쳤다. 세상물정 모르는 뮬리펜을 돌보랴, 믿을만한 뱀파이어를 찾고, 거기에 값싸고 쓸 만한 서큐버스 찾기까지.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그의 환상적인 밤문화 체험은 물 건너간지 오래. 처음 가보는 마족의 땅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했다. 그런데 형님은 뒤에서 잔소리만 하던 여자부터 찾는 게 아닌가. 억울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그래. 고생했어.”

카르안이 웃으며 러슬라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는 짓이 허술해 보여도, 항상 보면 자기 할 일은 잘하지 않는가.

“그러면, 해외에서 초빙해온 서큐버스는 어디 계시지?”

“저 여기 있어요~”

러슬라이의 커다란 몸 뒤에서, 작은 소녀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카르안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큐버스는 러슬라이의 뒤에서 쏙 튀어나왔다.

작은 키. 긴 머리는 곱슬곱슬하게 말려있다. 한눈에 봐도 귀여운 소녀 같은 분위기의 서큐버스. 확실히 러슬라이가 골라온 만큼, 색기 넘치는 미녀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른데.’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이 영 더부룩하다. 그는 백작의 첩 루베아이라를 떠올렸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다. 호불호가 전혀 갈리지 않는 외모. 나쁘게 말하면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없는 것이지만, 특징이 없기 때문에 그녀를 싫어할만한 요소도 없다.

반면 지금 눈앞의 서큐버스는, 약간 키가 작고 어려보이는 게 단점이다. 물론 밤의 여인들답게 나올 곳은 다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매혹적인 몸이기는 했다. 다만 취향은 조금 타는 외모 아닌가.

만약 백작이 루베아이라처럼 성숙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이건 큰 마이너스가 된다.

아쉽게도 서큐버스와 루베아이라는 스타트라인이 다르다. 그만큼 외모부터 행동까지 모두 루베아이라를 압도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삐그덕거리면 곤란하다.

심란한 카르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작은 손을 카르안에게 빼꼼 내밀었다. 거기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카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받았다.

“저기, 카르안님 맞으시죠?”

“나를 알고 있나?”

“당연하죠! 저희 도시에서 카르안님은 영웅이시니까!”

카르안은 눈을 찌푸렸다. 일단 소녀는 인간의 언어, 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 부분은 합격. 백작을 유혹하려는데 말도 안 통해서야, 코미디가 따로 없을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좋았다. 근데 대체 지금 뭔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카르안이 영웅? 마족의 도시를 구하기는커녕, 거기 가본적도 없다. 대체 소녀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영웅이라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마냥 기분 좋은 모양. 카르안은 일단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종이 위에 사인을 해 주었다.

서큐버스 소녀는 그 종이를 품에 꼭 안았다. 카르안은 궁금하던 것을 소녀에게 물었다.

“근데 너는 대체 어떻게 나를 아는 거지? 난 마족의 도시에 가본적도 없어.”

“그건 상관없어요.”

사인지를 접고 품에 넣은 소녀. 서큐버스 소녀가 카르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카르안님은 뮤프리드 교단의 교주와 함께, 알샤인 교단을 박살내고 왔잖아요!”

카르안의 알샤인 교단 습격. 그것은 이미 마족들 사이에도 쫘악 퍼진 소문이다.

마족들은 흑룡회보다 더욱 정밀한 정보통을 가지고 있다. 정보통 몇 명이 숨어있는 흑룡회와 다르게, 사역마나 마법을 이용한다. 덕분에 카르안이 혼자 적들을 쓸어 담았다! 같은 허황된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그들이 얻은 보다 정확한 정보. 예드프리어가 교단을 습격했다. 그런데 거기에 흑룡회의 옷을 입은 사내가 끼어있었다. 라는 소식이 마족들 사회를 강타했다.

옷을 보면 흑룡회의 간부 중 하나라는 것은 알겠다. 다만 그게 누군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는데, 러슬라이가 형님 자랑을 하며 전부 말해버렸다.

그 덕에 마족들 사이에서, 카르안의 평판은 쭉쭉 올라갔다. 알샤인 교단은 모든 마족들의 천적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이유로 공격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빛의 신의 세력이 약해지면 좋은 것이다.

‘복잡하게 되었네.’

카르안이 숨을 내쉬었다.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없지만 쓸데없이 이름이 알려졌다. 그만큼 장점도 생기겠지만, 분명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마족이란 놈들이 워낙 독특하기 때문에 감을 잡기도 힘들었고. 복잡한 변수가 된 것은 확실하다.

카르안의 생각대로 고위 마족들은 카르안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예드프리어와 함께 검을 휘두를만한 거물. 순식간에 흑룡회의 부 지부장에 오른 천재. 그중에서 호전적인 라이칸스로프들은 카르안과 직접 겨루기를 원하기도 했다.

카르안이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고위 라이칸스로프는, 아직 그가 감당할만한 적이 아니었다. 그 먹이사슬 최상위권의 짐승들은 전성기 때의 예드프리어 정도가 되어야 싸워볼만하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싸웠어요?”

“뭘 어떻게 싸워.”

카르안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 서큐버스와 카르안은, 그가 친절하게 설명해줄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다.

카르안이 차갑게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카르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소문이 자자한 카르안을 만나고 간 것 차체가, 나중에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

“그것보다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카르안이 운을 땠다. 자신이 거물이건 대물이건 그건 나중 이야기. 눈앞에 거래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알고 있어요. 그 백작이란 노인을 꼬시면 되는 거죠?”

“완전히 빠져들게 해야 한다. 너에게 재산 일부를 넘길 만큼.”

“그건 일도 아니죠. 중요한건 보수.”

“비율은 생각해 봐야겠군. 우리가 많이 받지는 않겠어. 고생은 네가 다 하는 거니까.”

그녀는 이미 러슬라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로 흑룡회에서 그녀에게 돈을 주지는 않고, 나중에 노인에게서 받을 유산의 일부를 받는다.

대신 흑룡회는 서큐버스를 백작에게 소개하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돕는다. 그리고 유산 외에도 백작에게 돈이나 선물을 받을 경우, 그것은 전부 서큐버스의 물건이 된다. 어느 쪽도 손해 볼 일은 없는 거래.

흑룡회가 얻는 양은 매우 빈약했지만, 어차피 돈이 목적이 아니다. 백작의 유산도 유산이지만, 귀찮은 루베아이라를 떼어내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그게 주 목적. 흑룡회에서 보내준 서큐버스가 나타나면, 그녀도 제법 골치 아플 것이다.

백작의 유산은 그 과정에서 얻는 보너스에 불과하다.

이야기를 들은 서큐버스가 카르안에게 몸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보는 뮬리펜의 표정이 이상할 만큼 싸늘했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저 탈모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니까, 고작 인간 여자 하나에게 빠졌다면서요? 그럼 저한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게 만들 자신 있어요.”

“누가 탈모야! 이건 내 손을 밀어버린 거다!”

“알게 뭐에요? 그리고 그게 더 이상하거든요? 문어도 아니고 멀쩡한 머리를 왜 밀어.”

서큐버스가 한심한 듯 말하자 러슬라이는 부들부들 떨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기는 한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이게 얼마나 남자답고 편한 줄 알아?”

“별로 알고 싶지도 않거든요.”

서큐버스 소녀는 코웃음을 한번 치고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카르안도 러슬라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아무튼, 잘 부탁한다.”

러슬라이가 열심히 고르고 고른 서큐버스니까, 그쪽에서는 나름대로 유명인일 것이다. 색기를 반감시키는 동안이 조금 문제였지만, 그래도 괜히 서큐버스겠는가.

소녀는 카르안의 목소리 안에 있는 못미더운 감정을 눈치 챘다. 자신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바보.’

서큐버스가 입을 쭉 내밀었다. 아무래도 외모가 어려보이다 보니 그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겠지.

하지만 저 남자는 모른다. 귀여운 얼굴과 대조적인 볼륨 있는 몸매. 거기에 서큐버스 특유의 매혹술까지. 그가 지금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을 무시하다니. 뭔가 오기가 생긴다.

소녀는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활짝 웃었다. 위험한 미소였다.

“제가 못 미더우시면, 한번 시험해 보실래요?”

대담한 어프로치. 그녀는 카르안의 몸에 따개비마냥 딱 달라붙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데, 카르안은 온 몸에 솜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꾹-

인간에게는 없는, 서큐버스만의 특징. 악마 같은 꼬리와 작고 검은 날개. 그중 말랑말랑한 꼬리가 카르안의 다리를 뱀처럼 타고 올라간다.

그녀가 숨을 뱉을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확 느껴진다. 인간에게는 없는, 서큐버스만의 매혹적인 향.

“사실 종이 말고 다른 곳에도 사인을 받고 싶었거든요. 후우.”

서큐버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매끈한 아랫배를 가리켰다. 그녀가 카르안의 귀를 깨물었다.

“만년필 말고, 다른 물건으로.”

“그,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지.”

카르안은 얼른 서큐버스를 때어냈다. 여기서 수락해버리면 저 소녀에게 말려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뒤에서 찌릿하게 째려보는 뮬리펜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거의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려하지 않는가. 저렇게 놔두면 며칠은 눈치를 봐야한다. 당장의 쾌락을 위해 훗날을 피곤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때 뒤에서 침만 꼴깍거리던 러슬라이가 한걸음 나섰다.

“어흠. 그럼 검사는 제가 직접.........”

“하하하. 싫어요.”

“젠장. 왠지 안 될 것 같더라.”

서큐버스가 칼처럼 단호하게 말하자, 러슬라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굉장히 궁상맞아 보인다.

그 순간만큼은 카르안과 뮬리펜, 서큐버스 모두 한마음이 되어 그를 쳐다봤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 잠시 식은 분위기에서, 카르안이 말했다.

“근데 아직 이름도 모르는군. 뭐라고 부르면 되지?”

“이름은 비밀이고, 음. 편하게 레이카 라고 불러주세요.”

흔한 이름. 본명은 아니고, 밤일을 할 때 쓰는 예명 비슷한 것 같다. 카르안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좋아. 레이카. 그럼 슬슬 가 보자고.”

“숙소는 흑룡회에서 마련해 줄 거다.”

“저, 근데 저는 밤에 깨어있고 낮에 자는 체질인데........”

레이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흑룡회 입장에서는 특이할 것도 없다. 그들도 낮에 깨어있는 조직원보다 밤에 깨어있는 조직원들이 많았으니까. 레이카가 양 팔을 쭉 폈다.

“낮에 잘 곳이랑, 적당한 술집이나 소개시켜줘요. 미리 몸 좀 풀고 용돈도 벌게.”

“몸을 푼다고?”

러슬라이가 기가 막힌 것처럼 말했다. 술집에서 일하는 것을 무슨 검사가 스트레칭 한다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가.

“우리도 손해 볼 건 없잖아.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카르안의 명이 떨어지자, 러슬라이는 군말 없이 레이카를 안내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거리로 함께 사라졌다.

“우리도 이만 가볼까요.”

“네.”

카르안은 뮬리펜의 손을 잡아주었다. 창백한 피부와 다르게, 손만큼은 여전히 따뜻했다.

2.

“몇 년 만에 만나는 건가.”

“나도 바빠서. 찾아올 시간이 없었네.”

어두운 공간. 한 노인이 누군가와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상대방은 깊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조직 운영은 좀 어떤가?”

“그럭저럭. 소일거리로 할 만하지.”

흑룡회의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속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가, 모든 어둠을 지워버릴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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