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카라나리와의 시간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자, 문 앞에 작은 편지가 놓여있었다. 핑크색에 앙증맞은 하트가 몇 개 박혀있는 귀여운 편지. 카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편지를 훑어봤다.
“이건 또 뭐지?”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았다. 모양을 보니 연애편지인 것 같은데, 누가 보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연애편지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흑룡회에서 촉망받는 엘리트로 떠오르는 카르안. 평범한 여자들은 겁이나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유흥가에 일하는 여자들은 그런 카르안에게 가끔 연서를 보내기도 했다.
카르안은 전부 거절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카르안을 잡아 인생역전을 꿈꾸는 여자들. 그런 사람에게 누가 마음을 주고 싶겠는가.
아무튼 카르안을 노릴 정도라면 화류계에서도 상당한 위치. 보통 고급스럽고 세련된 편지지를 사용했다. 이런 풋풋한 여고생들이나 쓸 법한 물건은 절대 쓰지 않았다.
“뭐든 열어보면 알겠지.”
설마 폭탄이라도 들었을까.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냈다. 귀여운 표지와 다르게, 편지지에서는 고급스러운 향이 흐른다. 카르안은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살짝 떨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 편지를 사이프카르가 보냈어도 이 정도로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주님?”
편지지 구석에는 예드프리어로부터. 라는 작은 문구가 적혀있다. 카르안은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살펴봤다. 예드프리어 맞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
“아니, 왜 이런........”
그러면 좀 정상적인 편지지를 쓰지, 왜 이딴 핑크빛 편지로 사람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가. 하지만 그 정답은, 편지를 몇 줄 읽어보자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위장. 아무래도 이게 예드프리어의 편지라는 것을 알면 누군가 가져갈 수도 있으니, 편지지에 장난을 친 것이다. 이러면 일반적인 연애편지처럼 보이지 않는가. 확실한 도난 방지는 안 되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카르안은 예드프리어의 기막힌 센스에 한숨을 푹 쉬고, 편지를 마저 읽었다.
‘역시 편지가 가장 무난한가.’
확실한 연락수단은 마나 수정구를 이용한 원거리 통신이 있다. 하지만 그 마나 수정구가 더럽게 비싼 관계로 카르안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흑룡회 알페라츠 백작령 지부. 사이프카르의 방에 하나 있기는 하다. 다만 그걸 사용하면 은밀한 통신은 물 건너갈 것이다. 예드프리어 입장에서는 딱히 숨길게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악마의 진주에 대해 사방팔방 떠벌릴 필요도 없다.
마나 수정구가 불가능하다면, 남은 수단은 가장 고전적이고 정확한 방법. 편지밖에 없다. 카르안은 찬찬히 내용을 읽어봤다.
간단한 안부인사와 함께, 시간이 될 때 한번 대신전을 방문해 달라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 그리고 그 시간이 가능하면 두세 달 안이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다.
언 듯 보면 평범한 초대장이다. 다만 카르안만이 그 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교주님도 나름대로 조사해 본 것 같은데.’
카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교주가 두세 달 안에 만나자고 한 것. 당장 만나자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너무 긴 여유를 주는 것 아닌가.
예드프리어도 악마의 진주에 대해 알아내었다. 비록 보석은 카르안의 손에 있지만, 예드프리어에게는 정상급 참모진들이 전무 모여 있다. 알샤인 대신전에서 살짝 본 것과, 나중에 조사한 정보를 모으면, 카르안이 얻은 보석이 악마의 진주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쓸데없이 친절하다.’
당연히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래서 카르안에게 돈을 마련할 유예기간을 준 것. 만약 카르안이었으면 돈을 빌린 사람이 도망갈까 봐 꽁꽁 묶어두었을 텐데. 실로 아케르나라 4대 신, 뮤프리드 교단의 교주다운 그릇이다.
대인배라고 하면 이런 사람을 뜻하겠지. 하지만 카르안은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다. 몇 번 보지도 않은 타인을 신뢰한다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을 동반한다.
“아무튼 좋아.”
신뢰에는 신뢰로 답한다. 가끔은 예외가 생기긴 했지만, 어지간하면 이 원칙은 지키는 편이 좋다. 카르안은 결코 악마의 진주 하나 때문에 예드프리어와 등질 생각이 없으니까. 또한 돈이 없어 이 보석을 그냥 넘겨줄 생각도 없다.
카르안은 집으로 들어와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감히 예드프리어의 편지를 불태운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지만, 그도 쓸데없는 종이를 남기는 것을 원치 않겠지.
카르안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여름답게, 풀벌레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2.
“형님. 그나저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응? 뭐가?”
며칠 뒤 술집. 카르안과 제이크가 잔을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파는 작은 술집이었다.
제이크와 술을 마시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러슬라이와 제이크같은 최측근이 아니더라도, 카르안이 부하들과 술을 마시는 일은 자주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이크가 먼저 술자리를 권한 것은 처음 있는 일.
제이크는 항상 아웃사이더였다. 행사 같은 것도 꾸준히 따라오긴 하는데, 능동적으로 그런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허구한 날 여자들과 술을 먹자는 러슬라이와는 정 반대였다. 그런 제이크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여자 말입니다. 형님 옆에 여자들.”
“여자?”
카르안이 눈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여자는 무슨 여자. 카르안은 여색을 밝히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검소한 편이다. 원래 카르안의 위치쯤 되는 사람들은, 여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며 방탕하게 즐겨도 이상하지 않다. (사이프카르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남자를 갈아치운다.)
다른 조직 간부들에 비하면 수도승이라 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제이크는 걱정스러운 표정.
“카라나리님. 그리고 요즘 레이아라 님과도 어울리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너 내 뒷조사라도 한 거냐.”
카르안은 술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가끔 카르안과 카라나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 둘 사이에는 미묘하게 다른 공기가 흘렸으니까. 눈치 빠른 조직원들은 벌써 그 둘의 관계를 확정지었다.
그 뿐만 아니라, 카르안은 레이아라와도 종종 술잔을 기울였다. 이건 레이아라가 일방적으로 카르안을 찾아온 것이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다. 카르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당돌한 엘프 아가씨와 어울려 주었다.
“그게 뭐 어때서.”
카르안이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소문 좀 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점도 많이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카르안이 여자를 멀리하는 것을 보며 ‘카르안 고자설’이 돈 적도 있었다. 돈과 권력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아야 되는 것 아닌가? 이게 조직원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카르안이 선비마냥 연금술에만 몰두하니, 실은 성 불구였다, 하는 불경한 이야기가 돌만도 했다.
조금 더 진화한 버전으로는 '카르안 게이설'도 있었는데, 이건 카르안이 실은 동성애자며 애교 덩어리 러슬라이와 쿨한 제이크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학설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그 이야기는 카르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작 카르안은 살기 바빠서 여자를 만나지 않은 것이지만. 원래 소문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슬슬 미녀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니, 그런 헛소문들도 꼬리를 감추었다.
그뿐 아니라 카라나리와 친근한 관계라는 것은, 카르안이 밤늦게 카라나리를 만나러 가는 행동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서로 남남이었다면 ‘대체 왜 야밤에 저 여자 집으로 가는 것일까?’ 라는 의심이 들겠지만, 서로 연인 관계라면 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내가 여자 좀 만나는 게 그렇게 배 아팠냐.”
“그게 아닙니다. 다만, 여러 명을 만나는 게 괜찮나 싶어서.”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알펜 왕국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귀족들이 첩을 여러 명 두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 당장 저 멀리 백작집의 주인만 해도 첩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하지만 제이크가 말하는 것은 조금 더 깊은 이야기였다. 사회 통념이 어떻든 간에, 그것보다는 개인의 의사가 중요한 것이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 해도, 남자나 여자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다.
“다른 분은 모르겠는데. 카라나리님은 어떨지.”
카라나리에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모시는 형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여자다. 제이크는 그런 이유로 카라나리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여자 잘못 만났다가 패가망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의 공통점이었으니까.
제이크의 우려와 다르게, 카라나리가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여자는 아니었다. 나중에 제이크도 그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제이크의 느낌으로는, 카라나리는 도저히 사랑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레이아라는 잘 모르겠지만, 카라나리같은 타입은 한 사람만 끝까지 따라갈 것 같았다.
카르안도 대충 제이크의 뜻을 알아챘다. 결국 여러 명의 여자를 사귀면, 상처받는 여자도 생기지 않나 싶은 것. 카르안은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나에게 신경 써 주고 있었구나.”
“아니, 뭐.”
제이크가 카르안의 시선을 피했다. 딱히 카르안이 걱정돼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상사가 망가지는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것이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네 말이 맞기는 하지. 그래도 그건,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두 사람이랑 연인 관계도 아니고 말이야.”
키스까지 해놓고 이런 말을 하기는 뭣했지만, 그 뒤로 두 사람과의 관계는 제자리걸음.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중요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국 지금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두 사람 모두와 친한 관계를 유지해야 함은 자명하다.
카라나리는 둘도 없는 전력이고,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재산이다. 카르안이 그녀를 마음먹고 키운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소녀는 그 재능이 봄날의 꽃처럼 만개하리라.
레이아라도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전혀 없다. 카라나리만 못해도 그녀는 4급 용병출신. 결코 무시할 전력이 아니다.
무엇보다 장거리에서 저격을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단순히 검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방심한 상대를 먼 곳에서 저격한다. 그녀보다 한참 위의 실력을 가진 고수도 당할 수 있다.
원거리 저격수라는 특성자체가 중요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어지간한 기사 몇 명보다도, 레이아라가 더욱 쓸모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귀중한 사람들. 세상 일이라는 게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믿을만한 조력자가 필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네 걱정은 잘 알겠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 아파할 것도 없어. 내 여자도 감당 못하면서, 어떻게 큰일을 하겠나.”
카르안은 걱정 말라는 듯이 제이크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황금빛의 액체가 투명한 잔을 가득 채웠다.
“복잡한 생각은 잊고, 건배나 한번 하지.”
“알겠습니다. 흑룡회를 위하여.”
“그래. 흑룡회를 위해.”
두 개의 잔이 살짝 부딪혔다. 맑은 소리가 술집 사이로 퍼졌다. 시원한 맥주의 냉기와 알코올의 온기가 몸 안에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몸이 더워지면 그걸 식히기 위해 맥주를 마시고, 더 더워지면 또 그것대로 즐겁게 마신다. 제이크와 카르안이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카르안은 간만에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다. 충직한 부하와 마시는 술은, 항상 즐거웠으니까.
둘은 술에 떡이 되도록 마신 후, 어깨동무를 하며 밤거리를 걸었다. 아직 깊은 저녁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마시다보니 금세 취해버렸다.
“형님.”
“왜 그러냐.”
드물게 술에 취한 제이크. 그가 붉어진 얼굴로 카르안에게 말했다.
“저는 형님이 참 좋습니다.”
“푸핫!”
카르안이 사래에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케엑. 설마 그거 사랑 고백이냐.”
“제가 미쳤습니까. 푸하하하!”
제이크가 카르안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 카르안도 작게 쿡쿡 웃었다. 알코올에 취하다보니, 실없는 이야기에도 웃음이 자꾸 흐른다.
“그저 다행이라 말입니다.”
“뭐가.”
“형님을 모실 수 있어서.”
“.......”
“전 부 지부장은........ 정말 무능하고 멍청한데, 성격까지 지랄 맞았거든요.”
카르안은 그 말을 듣자 한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이프카르가 해준 이야기다.
조직의 약에 손을 대다가 여러 곳이 잘린 사람. 결국 무능한 놈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내다가 죽은 이야기.
“그런데 형님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합격!”
“네가 뭔데 합격이냐 마냐를 정하냐.”
그 뒤로도 제이크는 한참이나 죽은 전 상사의 뒷담화를 풀었다. 그렇게 얼마간 떠들다보니,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버렸다.
한참 왁자지껄했는데, 이제는 적막함이 흐른다. 그 고요 사이로 카르안이 말했다.
“그런데 제이크.”
“예.”
“넌 내가 뭘 하든 따라올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조직에 반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구나.”
카르안은 그런 제이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새 카르안의 집. 그들은 가볍게 작별인사를 하고 밤거리로 사라졌다. 카르안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뮬리펜이 러슬라이와 돌아온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