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96)화 (96/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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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명. 하나의 세계가 무너져간다. 대체 이정도 수준의 문명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을까. 피와 땀이 대지에 스며들었을까.

불사의 종족보다 긴 세월의 시간. 바다조차 초라해 보일 것 같은 거대한 역사가, 하룻밤 사이에 흙더미로 돌아간다.

무르짐이 지나간 모든 땅이 무너져 내린다. 저항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절망만이 가능한 악몽이었다.

한참의 질주를 마치고, 무르짐은 공중에 멈춰 섰다. 무한한 파괴력을 쏟아내던 그에게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다.

"오는가."

그것은 지평선 넘어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작게 반짝이던 점이었던 비행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그것이 무르짐 앞에 멈춰선 것은 10분이 지난 후였다. 작은 점이었던 생명체는 끝없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제는 농담처럼 거대해졌다.

무르짐과 생명체의 거리는 상당했지만,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저녁을 형상화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드래곤의 형태의 괴물은, 검은 비늘에서 축소된 은하수가 요동치고 있다.

“나에게 안식과 평온을 주러 온 것인가.”

무르짐이 말했다. 답변은 침묵. 괴물의 거대한 눈동자가 무르짐을 내려 보고 있다. 너무 거대했기에 표정을 확인하기도 불가능했지만,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용이 분노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긴 고요를 깨고, 그가 무르짐에게 입을 열었다. 온 세상의 공기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형님."

"엥?"

카르안이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무슨 형님?

그리고 다음 순간에야 카르안은 무르짐에서 나온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게다가 저 커다란 놈의 목소리도 묘하게 정감이 간다. 약간 건들건들한 게, 꼭 그의 부하를 보는듯한.......

"형님!"

"윽!"

카르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온다. 그 앞에 용은커녕, 양아치 같은 주황머리가 서 있었다.

"으, 내가 얼마나 잠들었지?"

"글쎄요. 얼마 안됐을 겁니다. 들어오신지 5분도 안 됐으니."

"5분?"

카르안의 눈을 찌푸렸다. 작업실에 들어와서, 잠깐 보석을 확인했다. 그 다음 정신을 잃었는데 그것 전부가 5분 안에 이뤄졌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그가 환각을 본 시간은 몇 시간이 족히 넘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찰나의 시간이라니. 원래 꿈에서의 잠깐이 현실의 몇 시간 아니던가. 상식과 정 반대였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제이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카르안이 깜빡 졸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그 잠깐사이 깊은 잠에 빠졌을 리는 없다. 더위에 지쳐 잠깐 잠든것이리라. 하지만 카르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내뱉듯 말했다.

"젠장맞을 꿈이지."

그리고 옆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포션 제조용으로 준비한 생명수. 그냥 마시기엔 상당히 비싼 것이지만, 도저히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쉬엄쉬엄 하시지 말입니다."

제이크가 들고 있던 둥그런 물체를 내려놨다. 주먹만 하고 투명한 수정구 같은 물건이다.

"이건 뭐냐."

"누님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게 여름의 친구 아닙니까. 친구."

구체에서는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구체를 기준으로 하여, 차가운 기운은 점점 넓게 퍼지고 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조금 식어가는데 굉장히 신기하다.

'에어컨 비슷한 것인가?'

단숨에 시원해지지는 않았지만 방의 온도가 점점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카르안이 신기해서 구체에 손끝을 대자, 얼음과 똑같은 미끈한 촉감이 느껴진다.

얼음을 고밀도로 압축시키고 냉기마법을 잔득 걸어놓은 물건이다. 방에 두고 문은 닫아놓으면 반나절은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손도 못 댄다는 것만 제외하면 기막힌 상품이 아닐 수 없다. 목을 죄는 무더위가 주춤하자, 엉망이 된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아무튼 고맙다. 누님께도 고맙게 받았다고 전해줘."

"네."

"내가 자고 있던 건 말하지 말고."

"에이,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투덜거리던 제이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가버렸다. 겁나게 쿨한 모습이었다.

제이크는 러슬라이처럼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만 하고 떠난다. 군더더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일단 일은 잘 하니까, 카르안이 싫어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다시 적막해진 방. 카르안은 미끈거리는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환각이 아니었어."

카르안은 손에 쥔 보석에 시선을 돌렸다. 순간 방금 전이 떠올라 잠깐 멈칫했으나, 그는 눈에 힘을 꽉 준채 눈동자를 돌린다. 이것도 못 이겨내서 뭘 하겠는가.

“없군.”

보석 안에서 눈을 빛내던 카르안.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보석은 여름의 햇살에 반짝거릴 뿐이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마약 때문인가."

아무래도 여기는 작업실. 아무리 카르안이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흘러나간 마약에 취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환각을 본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애매했다. 만들어진 마약은 전부 창고에 보관되고 있다. 게다가 카르안은 방금 작업실에 들어왔다. 마약조제는 시작도 안했는데 어떻게 약에 취한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말 이 보석이 보여준 무언가 일까. 카르안은 다시 한 번 마법사의 말을 떠올렸다. 레비아탄의 저주. 미신 같지만,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다.

그를 미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무언가를 보여준 것은 확실했다.

"빨리 움직여야겠어."

방금 그 환상이 무르짐의 과거인지, 현재인지, 혹은 미래의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의미 없는 환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치고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의 감각이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현실과 관련 없는 신기루가 아니라고. 무언가 명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만약 사실이라면, 대체 무르짐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한 문명을 초토화시킨 힘보다도, 도무지 그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게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아무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카르안은 기지개를 쭉 뻗었다. 지금은 정보가 부족하다. 더 고민해봐야 시간낭비.

기분 나쁜 환상을 보기는 했지만, 잠깐 잠든 덕분인지 몸은 이상할 만큼 개운하다. 그는 작업을 위해 책상을 정리했다.

'레비아탄의 저주라는 것도 별거 없구만.'

미치기는커녕 좋은 힌트를 주지 않았는가. 덤으로 정신도 상쾌. 몸도 편하고. 게다가 마나까지 넘쳐난다.

"잠깐."

카르안은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몸 안에 마나가 잔득 느껴진다. 갑자기 마나가 넘쳐 날리는 없을 텐데. 마나라는 건 잠 좀 푹 잔다고 넘쳐나는 게 아니다.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손등을 문질렸다.

근력: 27

체력: 20

물리저항력: 12

마법저항력: 4

마나: 74

틈틈이 마나포션을 삼켜 약간씩 올라간 수치다. 다만 전과 특별히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번 해볼까.”

카르안은 시험 삼아 포션하나를 만들어 보았다. A급 회복포션. 마나가 어느 정도 드는 작업이다. 그는 몇 개의 포션들을 뽑아낸 뒤, 다시 한 번 손등을 문질렀다.

마나: 74

마나량과 소비량. 포션을 만들기 전과 변한 게 없다. 평소라면 저 옆에 (-3)정도가 붙어있어야 하는데.

마나가 전혀 소비되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효능. 마나를 회복하는데 그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마나 포션과 다르게 회복할 때도 몸에 부담이 거의 없다.

"비싼 값을 하는군."

이제 골렘 사용에 부담이 확 줄어들었다. 골렘의 가장 큰 문제점. 지속적인 마나 소모를 커버할 수단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투력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대장간에서 골렘을 잔득 찍어내면, 소대 하나 이상의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이상은 역시 심장에 무리가 가지만, 홀로 십여 기의 골렘을 운용하는것도 농담같은 것이다.

아이언 골렘으로 이루어진 소대. 그 전력은 전장을 뒤집어놓을만한 힘을 가진다. 단숨에 허공에서 나타나, 대규모 전쟁의 승패를 바꿀만한 능력.

“내 몸만 잘 간수하면 되겠어.”

정작 카르안이 공격당한다면 의미가 없지만, 이제 그 단점도 보완할 수단이 완성되고 있다.

그는 괴물로 변한 타브와, 그 기사를 타락시킨 줄락이 떠올랐다. 악투루스의 자식들. 이제 그 정도 수준의 적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무르짐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카르안은 말을 멈추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는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과 같으니까.

순식간에 세계를 파괴하는 힘이다. 그리고 아케르나라의 4대 신중 하나, 강신한 알샤인마저 손으로 찢어발겨 버린다. 그런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 그 양반은 대체 어디서 마나가 계속 나오는 거야?’

만약 무르짐이 전설 속 드래곤이라도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마나량은 도저히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정도였다.

만약 카르안이 마나량을 있는 대로 늘리고, 악마의 진주를 서너 개쯤 소유한다 하더라도, 마법 골렘과 수호령 수백 기를 찍어내면 그 순간 몸이 터져버릴 것이다.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카르안은 잡생각을 지우고 포션 제작에 집중했다. 역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일단 악마의 진주. 이 보물의 성능을 마음껏 즐길 시간이다.......

2.

끼이이익-

뭔가가 타들어가는 소리. 카르안의 손에서 고밀도로 압축된 마력이 쏟아진다. 그렇게 칼날처럼 섬세한 마력은, 얇은 판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다.

골렘을 위한 마법이 아니다. 그곳에 쓰이는 마나회로와는 전혀 다른 기술.

카라나리의 동작을 베껴낼 복사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치프에게 배웠던 기억과, 그의 능력을 합쳐 새롭게 완성될 기계.

껍데기는 대장간에 의뢰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안에 넣을 부품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복잡한 알고리즘을 이 작은 판 안에 전부 넣어야한다.

".......“

집중하고 있는 카르안의 옆모습. 그것을 누군가 지그시 관찰하고 있다. 날카롭지만 커다란 눈. 카라나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걸로 사람의 동작을 복사할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그녀는 신기한 듯 카르안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아마 이런 일은 처음 보는 것이겠지.

카라나리 집 근처의 작은 창고를 빌린 덕분에, 그녀는 종종 카르안의 작업을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지금처럼 별 말없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다가, 어느새 스스륵 사라지곤 했다. 딱히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카르안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후우.”

카르안은 오늘의 작업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고밀도의 마나를 쏟아내고 있지만, 소모는 전혀 없다.

지금까지의 마나 회복방식이 소비 후 충전이었다면, 이제는 소비와 충전이 동시에 되고 있다.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악마의 진주를 사용해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부품 하나를 완성시킨 다음,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에는 땀이 송글송글. 섬세한 작업이다 보니 마나가 무한하더라도 집중력이 소모된다. 그는 숨을 돌릴 겸

허리를 쭉 폈다.

“잠시.”

카라나리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색 손수건. 그녀는 카르안의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마치 귀중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카르안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예전에는 가만히 보고만 있더니, 요즘에는 가끔씩 이렇게 스킨십을 시도한다.

“끙.”

얼마 전 서로 입을 맞춘 이후로, 묘하게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 지금까지 카르안을 거절하지는 않았어도 먼저 접근한 적은 없었는데.

더 신기한 것은 이런 순간에도 여전히 무표정이라는 것이다. 가끔 이 여자가 감정표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아무리 포커페이스를 취한다 하더라도, 패를 다 까버린 마당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

손 끝에서, 푸근한 소녀의 향기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르안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카르안은 잠시 고민했다. 좀 더 깊은 관계를 가져야하나. 이미 가능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처녀는. 이미 카르안에게 심장 일부를 저당 잡혔다.

다만 때가 문제였다. 아직은 조금 이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미 물고기는 그물 안에 걸렸는데, 지금 꺼내드나 나중에 꺼내드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카르안은 조용히 카라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인에게나 허락할 법한 행동. 하지만 카라나리는 살짝 눈을 감은 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긴 흑발이 고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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