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카르안은 대장간에 도착했다. 여기서 할 일은 하나. 카르안은 산산 조각난 골렘 1기와 손상된 나머지 골렘을 모두 소환하였다.
“아이고, 내 새끼!”
골렘을 만든 대장장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성들여 만들어진 골렘이 죄다 박살나있었다.
비록 회로를 새겨 넣은 것은 카르안이지만, 쇠를 두드리고 깎아서 몸체를 완성한 것은 대장장이들. 대장간의 주인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골렘을 쓰다듬었다.
4 미터 크기의 대형 골렘 1기는 주먹 파츠가 일그러져서 손가락도 잘 안 펴진다. 폴룩스에게 마법폭격을 당한 중형골렘 1기는 아주 벌집이 되어있었고, 나머지 골렘들도 잔손상이 있다.
카르안이 이것을 전부 수리하겠다고 하자, 장인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슬픈건 슬픈거고
돈은 돈이다.
돈 되는 일거리가 늘어난 것이다. 비록 자기 작품이 박살난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고칠 수 있고 돈까지 버는데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으흠. 그럼 가격은........”
대장장이가 눈치를 보며 적당히 대답했다. 서로 흥정은 없었다. 이미 많은 돈을 쓰는 카르안이기에 바가지를 씌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카르안도 괜히 가격을 깎지 않았다. 카르안은 비상용 골렘 1기만 회수한 채로 대장간을 나섰다.
곧바로 향한 것은 흑룡회의 사무실. 카르안은 작업실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대충 굵직한 일들은 처리했고.”
나머지는 뮬리펜이 잘해주면 된다. 카르안은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작업을 준비했다.
‘그나저나 이건 약빨이 영 안 느껴지는데.’
카르안은 ‘악마의 진주’를 꺼냈다. 분명 그 마법사가 일주일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일주일이 한참 지난 아직까지도 영 소식이 없다.
덕분에 오늘도 지긋지긋한 포션을 마셔야 하지 않는가. 포션을 무한대로 마셔대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기에, 카르안은 절정에 다다른 포션 제작 실력을 가지고서도 마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르안은 장난스럽게 악마의 진주를 손 안에서 굴렸다. 태양빛을 받아 보석은 아름답게 빛났다.
레비아탄, 모든 선원들에 절망을 안겨주는 존재. 하지만 그 괴물의 심장에 있는 이 보석은,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세상일이 참.”
카르안은 피식 웃으며 보석을 살펴봤다. 여전히 마나는 느껴진다. 하지만 몸에 뭔가 흡수되는 듯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그 마법사를 다시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잠깐의 상담이 필요했다.
“.......!”
그때였다. 카르안은 순간 자신을 노리는 시선을 느꼈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열기까지 얼려버리는 것처럼. 차가운 시선.
카르안은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만 작업실에는 그 혼자밖에 없고, 문은 단단히 닫혀있다.
착각인가. 요즘 여러 일을 했더니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카르안은 품속에 보석을 넣으려했다.
“아.”
그리고 시선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시선. 카르안이 카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석 안쪽에서.
원래 이 보석은 거울처럼 무언가가 비치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와 같이 태양빛이나 달빛을 아름답게 반사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악마의 진주 안에서, 카르안은 카르안을 차갑게 보고 있었다.
마치 기분 나쁜 괴담처럼. 보석 속 카르안의 눈이 빛났다.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장거리 텔레포트를 할 때처럼, 무언가 끝없이 추락하는 무중력이 카르안을 덮쳤다.
“으윽!”
마치 보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끝없이 추락하는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카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지나갔다.
‘레비아탄의 저주’
이 보석을 연구하는 자는 얼마 못가 미쳐버린다.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젠장.’
카르안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렇게 되면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의식이 끊어져간다.
투욱.
카르안은 책상 위에 쓰려졌다. 악마의 진주는 여전히 그의 손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2.
눈을 뜬다.
카르안은 서둘러 고개를 돌리려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려 해도 시선이 고정된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몸에 빙의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상황이 정 반대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의 몸에 누군가 들어온 게 아니라, 그가 누군가의 몸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카르안에게 허락된 것은 그가 빙의된 누군가의 시각과 청각을 공유하는 것 뿐.
‘그’는 높은 곳에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성이나 탑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죽기 전 카르안이 살던 서울의 빌딩과 비슷하다.
발달된 문명. 백색의 조각상들과 하늘을 뚫을 듯 치솟은 빌딩. 마법과 과학이 골고루 발달한 세계.
카르안이 살고 있는 아케르나라보다 월등히 발전한 것만 같았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마치 자동차를 닮은 매끈한 비행물체들, 종이와 펜 대신 작은 마법도구를 이용해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까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인간이 아니었다. 머리가 이상할만큼 크고, 팔다리는 가늘다. 피부는 희고 종잇장처럼 연약해 보인다.
카르안은 어렸을때 보았던 외계인 사진이 떠올랐다. 일치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비슷했다.
마치 SF영화를 보는 것 같다. 만약 백년 뒤, 아니 이백년 뒤의 도시가 이런 모습일까. 마법은 없겠지만, 단순한 과학 기술만 봐도 대단한 것이 느껴진다.
“음.”
지금 카르안에게 그 것들을 보여주는 누군가는, 길게 자란 수염을 한번 쓰다듬었다.
묵직한 목소리와 수염을 보니 남자인 것 같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오직 공유되는 것은 시각과 청각밖에 없다.
그는 마치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듯, 최대한 지금의 풍경을 뇌 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다시 못 볼 것처럼 말이다. 감상이 끝나자, 그는 손뼉을 살짝 쳤다.
“이정도로 발달된 곳은 처음이군. 조금 골치 아프겠지만, 대충돌(Big crash)은 막아야 하니까.”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마치 우주의 일부를 잘라온 듯 한, 별자리의 지도가 펼쳐졌다. 그 사이로 여러 가지 선들이 어지러이 그려진다. 지금 그 남자는 그 복잡한 그림들을 이해한 듯 했지만, 함께 보고 있는 카르안은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우주와 차원에 관한 여러 정보가 함축된 지도였다. 연금술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카르안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차원을 동결(凍結)한다.”
그가 중얼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긴 주문이었다. 몸에서 땀이 흐르고, 혈관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어두운 밤 사이로, 여러 가지 마법진들이 요동친다. 그제야 카르안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마법진이다. 평소에 카르안이 골렘 소환시 사용하는 마법진. 다만 그보다 훨씬 치밀하며, 섬세하고 또한 효율적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자신의 골렘 소환술을 비웃는 것 같은.
“나의 검. 나의 방패들이어.”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다. 그들은 멍하니 소환된 은빛 골렘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신기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그들을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무르짐은 작게 속삭였다.
“막을 내려라.”
3.
수십 기의 골렘이 도시를 헤집어 놨다. 마치 인간이 개미집을 밟는 것처럼,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태한 종족이군. 단순한 골렘에게 반격조차 못하다니.”
무르짐이 반항한번 못하는 그들에게 경멸하듯 말했다. 문명이 발달한 만큼, 개인의 전투능력은 퇴화했다. 덕분에 무르짐의 골렘들은 방해한번 받지 않고 대부분의 도시를 무너뜨렸다.
카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단순한 골렘이라고 했지만, 저것은 골렘중의 정점이라 불리는 이너리움 골렘이다. 껍질이 금속인 것은 아이언골렘과 비슷했지만, 내용물은 전혀 다르다.
골렘들은 훨씬 날렵한 움직임으로 파괴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마치 일반적인 골렘의 움직임을 1.5 배속으로 빠르게 재생한 것 같다.
“그냥 벨트리를 보냈어도 해결됐겠군.”
태연하게 말하는 무르짐. 카르안은 고민에 빠졌다. 아케르나라보다 발전한. 그가 살던 세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도 저런 괴물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 저항하지 못한 채 도망치고, 골렘들을 도시를 파괴하겠지. 그리고
쿠웅-!
굉음이 터졌다. 골렘 한기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무르짐은 지루한 듯 한 표정을 지우고, 쓰러진 골렘을 쳐다보았다.
‘경찰이나 군대가 나타나겠지.’
“%@&^#%*!!”
괴상한 고함과 함께, 전투복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이 화약병기를 든 채로 골렘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위에 몇 개의 마법석이 둥둥 떠다니는 탱크. 아이언 골렘보다 더욱 견고한 합금으로 만들어진 골렘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래. 아주 초식동물은 아니었군!”
무르짐이 감탄한 듯 말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며, 이너리움 골렘들 분쇄시키고 있다.
무르짐의 골렘들도 대응했지만 속수무책. 특히 탱크의 포신에서 뿜어대는 충격탄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골렘이 양 팔을 들어 올려 방어해도, 그 팔과 함께 몸통까지 커다한 구멍을 뚫어버린다.
병사들의 화약병기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이쪽은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다. 대부분은 저 외계인들에게 붙기도 전에 파괴당했고, 간신히 접근한 골렘도, 이계의 거대한 골렘에 저지당했다.
무르짐의 골렘이 대부분 파괴당했다.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골렘을 파괴시킨 병사들은 곧 건물 옥상에 서 있는 무르짐을 발견하였다.
전차의 포신이 돌아간다. 병사들의 총구가 무르짐을 향했다.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무르짐에게 마법과 총탄이 날아왔다.
하지만 모든 공격은 무르짐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공격이 전부 빗나가 버린 것.
두 번째도, 세 번째 공격도 모두 무르짐의 옷깃하나 스치지 못했다.
무르짐이 의도적으로 무기의 명중률을 떨어뜨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공격을 전부 허용하고도 상처하나 없는 무르짐.
비록 종족은 달랐지만, 그들이 당황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게 전부인가.”
무르짐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손의 몇 번 휘저었다.
그러자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다. 평지였으면 크게 강력한 공격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대도시에서는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쿠르르릉!
천둥이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 흔들거리던 건물이 굉음을 터트리며 무너져 내린다. 다른 건물들도 마찬가지. 건물과 건물이 부딪히며, 피해를 증폭시키고 있다.
무르짐이 인공적인 지진을 일으킨 것이다. 건물의 잔해는 이종족의 군대도 피해가지 않았다. 거대한 잔해들이 병사들을 덮친다.
골렘이 우그러지고 전차들은 폭발을 일으켰다. 병사들은 잔해에 깔려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을 구원해 줄 천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절대력을 과시하는 악마만이 파괴를 반복할 뿐.
위에서 건물이 무너질 뿐 아니라, 땅이 갈라지고 아래로 무너진다. 이들도 카르안이 살던
지구의 도시처럼 지하를 개발한 것 같다. 덕분에 지하의 빈 공간으로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라리 문명이란 게 없었다면, 지금 죽지는 않았을 텐데.”
무르짐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아쉬움도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의 철저한 파괴행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무르짐은 무너지는 건물에서 붕 떠올라 허공을 걸었다. 그가 즐겨 쓰는 골렘이나 수호령은 소환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축을 흔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
순식간이었다. 거대한 도시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부분 부분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전부 박살내버리니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지진 후의 광경은 참혹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돌덩이와 금속이 모든 생명을 덮었다.
불가항력의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다.
“다음 곳으로 가볼까.”
무르짐은 그렇게 선고하며 몸을 움직였다. 허공에 뜬 채로 몸을 가속한다.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무르짐의 눈에 다음으로 희생될 도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록 무르짐의 시야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