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붉은 머리의 여자가 카르안에게 다가왔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지만, 주변에서 그녀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차된 둘의 시선. 카르안도 그녀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거리가 좁혀진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루베아이라가 가까이 오자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루베아이라는 시종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카르안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백작이 빠진 첩.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붉은 머리와 새하얀 피부는 사이프카르를 연상시켰지만, 암표범 같던 그의 상사와는 반대로 첫인상은 유순해 보인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후후. 저야말로.”
두 사람 모두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하기 상당히 어색했다. 마치 어긋난 퍼즐처럼. 루베아이라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이분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루베아이라는 지그시 시종을 쳐다봤다. 화내기는커녕 미소가 방긋한 얼굴이지만, 시종은 입을 싹 다물고 물러났다. 그녀의 성질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쁘시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이 기다리실 텐데요.”
“신경써주셔서 고마워요.”
루베아이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말은 친절하게 했지만, 결국 신경 끄란 소리다.
‘끙.’
카르안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까칠하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혹시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카르안은 후각에 집중했다. 진한 분 냄새와 향수냄새. 거기에 약간의 알콜향. 다만 파이프로 피우는 마약의 냄새는 진하지 않았다. 직접 피우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냄새가 벤 정도.
약에 취했으면 대충 상대해도 그만이지만, 맨 정신이면 껄끄럽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왜 마약파티에서 뽕을 안 맞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루베아이라가 말했다.
“그나저나 저번이랑 다른 분이 오셨네요? 원래 있던 분들은?”
“그 친구들은 사정이 있어서, 이제부터 백작가에 공급은 제가 직접 담당합니다.”
“몇 마디 해 줬다고 도망간 것이군요. 한심하기도 해라.”
루베아이라는 비웃듯 말했다. 카르안은 잠깐 고민했다. 카르안이 백작가를 맡겠다고 하자, 얼른 형님 거리던 부하들이 떠올랐다. 정말 한심하긴 했다.
“그리고 고작 그런 사람들에게 떠밀려온 당신도 불쌍해요. 하는 일이 부하들 뒤나 닦는 것이라니.”
“가능하면 부하들을 사랑하는 상사라고 해 주시죠.”
“마약을 팔면서 사랑을 논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슬슬 정원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눈앞에는 큼직한 저택이 보인다. 카르안은 잠시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아쉽게도 당신이랑 길게 토론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무엇보다 벌써 도착한 것 같고. 다음에 또 봅시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마침 말이 끝날 때쯤 저택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는 카르안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니요. 당신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마약을 팔아넘기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저희는 오히려 싼 가격에 제품을 넘겨주고 있습니다만. 백작님은 특별한 고객이니까.”
“싼 가격이라는 게 150골드? 고작 그 가방 하나에?”
그녀는 카르안이 들고 있는 작은 가방을 가리켰다. 그것 하나에 150골드. 터무니없이 비싸기는 했지만, 원래 이런 건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것쯤이야 웃어 넘어갈 수 있다. 별로 노골적인 욕설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금화를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물건에 제 값을 못 받는 영업인만큼 무능한 것은 없었다.
카르안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루베아이라가 선수를 쳤다.
“솔직히 그 절반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물론 그것도 터무니없는 가격이긴 마찬가지지만.”
절반이면 75골드. 카르안은 그녀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물론 제 재량으로 금화 한두 개 정도는 깎아드릴 수 있지만, 절반이라뇨. 흥정을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싫다면 나가주세요. 흑룡회 말고도 공급원은 많이 있으니까.”
“잠깐 기다려........”
“아뇨. 지금 나가주세요.”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름다운 적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루베아이라는 이쯤 돼서 카르안이 백기를 들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다. 비록 지금은 백작의 값비싼 취미생활을 말릴 수 없지만, 최대한 그의 금고에서 금덩이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과의 관계가 뒤틀리겠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원하는 것이다.
“루베아이라씨.”
카르안이 루베아이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전혀 난처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예의를 차리기도 귀찮아하는 모습.
“어차피 다른 곳에서 백작님 입맛을 맞출 수도 없잖습니까. 소문을 들어보니 당신은 저의 다른 동업자들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번에 당황한 것은 루베아이라. 보통 흑룡회 조직원들은 가라고 하면 알아서 고개 숙이기 마련인데, 카르안은 조금 달랐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불쾌했다. 그녀는 얼굴에 달라붙은 웃음기를 싹 지웠다.
“당신. 알아서 기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기사단을 부를 수도 있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라고 말하려던 카르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괴상한 노래를 하며 덩실거리던 백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호구라면 정말 첩을 위해 기사단을 동원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뭐, 무릎 꿇고 발이라도 핥아야 합니까?”
“물론 그게 당신들이 갖춰야할 태도지요. 흑룡회니 뭐니 해도 결국 쓰레기 집단이니까.”
“쓰레기라니,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 아쉽기는 한데.”
카르안이 한숨을 쉬었다.
“저희 덕분에 영지가 무사한 것은 알고 있는지요.”
카르안은 저 루베아이라에 대해 완전히 파악했다. 저 여자는 뮬리펜과 전혀 달랐다. 뮬리펜이 흑룡회를 싫어했던 이유는, 흑룡회라는 조직의 악행 때문이다. 악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당연한 논리.
하지만 저 여자는 악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범죄 조직이라는 것만을 혐오하는 것 같았다. 그게 흑룡회가 되었든 다른 조직이 되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백작의 권위를 등에 업은 채 생떼를 쓰고 있다.
다른 시민들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흑룡회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은 흑룡회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능한 백작이 제대로 된 치안관리를 못하고 있을 때, 그 경비병 역할을 맡은 게 흑룡회 아닌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해결해준다. 개개인의 분쟁도 정리해주고, 무엇보다 다른 조직들도 감히 흑룡회의 보호를 받는 영업장은 건드리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보호비가 매우 싸고, 쓸데없는 트집거리도 잡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거대한 범죄조직이 도시를, 시민을 보호하고 있다.........
“당신의 백작, 무능한 백작 덕분에 고통 받는 시민들을 구해준 게 저희 흑룡회입니다. 뭐, 이런 짓하면서 칭찬받고 싶은 건 아닌데, 적어도 백작가 사람에게 욕을 먹고 싶지는 않군요.”
“당신이 백작님을 이렇게 만든 것은 기억하지 못하나보죠?”
“설마 마약 때문에 백작이 저런 꼴이 됐다고 하는 건가요. 마약이 없었다면 술을 먹고 저렇게 되었을 겁니다. 아니 그 전에 저희가 없었다면 알페라츠 백작가는 몰락했겠죠. 세금을 낼 시민들이 전부 죽어 나갔을 테니까.”
흑룡회가 보호해 준 덕분에 세금을 낼 시민들도 있다. 그 덕에 저렇게 백작은 흥청망청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루베아이라는 인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세치 혀로 사람을 속이고, 끝까지 추락시키지.”
“물론입니다. 지금 당신처럼요. 설마 마약중독 늙은이에게 사랑에 빠진 건 아닐 테고. 그럴싸한 말로 노인을 속여서 유산이나 낚아채려고 다리를 벌린 것 아닙니까?”
카르안이 짧게 손뼉을 쳤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조직에서 약을 살 만큼 정신 나간 노인이니, 멍청하고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니 봉도 이런 봉이 없네. 몸 한번 팔아 그런 이윤을 창출해 낸 것은.......”
카르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하지만 카르안은 순순히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카르안이 여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응?’
순간,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목부분. 그쯤이 뭔가 거칠 거렸다.
“놔!”
루베아이라가 소리치며 손을 뿌리쳤다. 카르안도 꽉 잡고 있던 것은 아니기에 손이 쑥 빠져나갔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도, 카르안은 그녀의 손목을 볼 수 있었다. 상처자국.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수십 번 칼로 벤 것처럼 파괴와 재생이 반복된 피부.
보통 손목은 몸 안을 향하기에, 다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 반복적으로 상처를 입을 확률은 더욱 더 적다. 그러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루베아이라는 자기 손목을 수십 수백 번 난도질 한 것이다. 다만 상처가 깊은 게 아니라, 얇게 베기를 여러 번 반복했기에 죽거나 손목을 못 쓰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자해했군.’
자시 상처가 들킨 게 부끄러운 것일까. 루베아이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숨기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범죄조직을 죽일 듯이 싫어하는 이유도 거기 있겠지. 다만 카르안은 거기까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시끄러운 여자가 잠잠해지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뭐라 하려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
“피곤하신듯한데, 조금 쉬시죠.”
카르안이 집사가 아가씨를 안내하듯, 정중하게 손을 뻗어 저택을 가리켰다. 당연히 정중한 조롱해 불과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약점을 잡은 것 같다. 루베아이라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카르안은 피식 웃었다. 멋대로 화를 내더니, 멋대로 사라진다.
그래도 목적은 대충 알아냈다. 아마 마약 거래를 방해하는 것도 조직에 대한 화풀이와, 줄어들 백작의 유산을 조금이나마 낮춰보려는 수작일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아무튼 백작이 마약에 큰돈을 소비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만큼 자기에게 떨어질 몫이 줄어들 테니까.
문제는 그녀에게 제대로 찍혔다는 것. 한동안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저런 여자한테 돈을 뜯긴 건가? 우리 조직원들은?”
상태가 심각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대체 그 우락부락한 몸뚱이는 왜 달고 다니는 건지.
카르안은 한숨을 푹 쉬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차.”
카르안이 중얼거렸다. 그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지만, 시종이고 제멋대로인 여인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응접실이 어디야?”
목소리는 빈 저택 안을 허무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는 한참을 헤매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회계사를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2.
“고생 좀 하고 왔냐?”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카르안을 보며, 사이프카르가 키득거렸다. 장난스런 웃음. 가식밖에 없던 루베아이라와는 대조적이다.
“까다로운 아가씨더군요. 덕분에 지각해서 벌금을 물었습니다.”
거래에서 상대방을 이유 없이 기다리게 하면, 그만큼 페널티가 붙는 법이다. 덕분에 금화 한 개를 손해 봤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고작 금화 한 개밖에 손해 보지 않은 것을 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카르안의 보고를 들은 사이프카르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사이프카르가 즐거워하는 것은 몇 번 보지 못했기에, 주변 조직원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래. 아무튼 고생했다.”
불꽃놀이처럼 터지던 미소가 사라지고, 허전한 침묵이 들려왔다.
사이프카르도 루베아이라가 성가시긴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암살이라도 하려니 리스크가 너무 크고. 막상 생각해보면 조직원들의 성질을 건드릴 뿐, 들킨다는 위험요소를 안고 암살을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 어떻게 할 겁니까?”
“뭘 어떻게 해. 그냥 무시해. 그거밖에 없어.”
카르안은 살짝 미소 지었다. 사이프카르도 눈썹을 찡그리더니, 그의 뜻을 파악했다.
“너, 무슨 수라도 있는 거냐?”
“예로부터 내려오던 말이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미녀에는 미녀.”
카르안이 작게 대답했다.
같은 고기라면 더 큰 쪽이 먹고 싶기 마련이다. 그러면 같은 여자라도 더 아름다운 쪽이 좋지 않겠는가?
========== 작품 후기 ==========
사실 5월 초부터 슬럼프가 심하게 온 것 같습니다ㅜㅜ 그래서 조금 느슨하게 쓰다 보니 연재가 느려지고......
컴퓨터만 붙잡고 끙끙거리다가, 주말에 부산 백양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산에 한번 오르고 나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무사히 슬럼프 탈출한 것 같습니다.
미세먼지에 렌섬웨어에 요즘 난리도 아니더군요. 몸건강 뿐 아니라 컴퓨터 건강까지 신경써야 한다니ㅜㅜ 힘든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