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네가 간다고?”
“예. 그동안 민폐 끼친 것에 대해 책임도 질 겸........”
카르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사이프카르는 답답한 듯 붉은 적발을 만지작거렸다.
“카르안. 사실 네가 늦은 건 큰 문제가 안돼. 너는 항상 기대 이상으로 움직여줬으니까. 그 정도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줄 수 있어.”
“하지만.”
“알샤인 교단을 건드린 것은 좀 그렇지. 근데 네가 알샤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니까. 우리 조직에 폐가 될 것은 없어. 그러니까 억지로 책임감을 느끼지 말라는 거야.”
사이프카르의 금빛 눈이 반짝였다. 원래 그녀라면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카르안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안에게 험한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가 늦은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이고, 시키는 일도 잘 하지 않는가. 이미 훌륭한 부하를, 괜히 채찍질 해봐야 쓸데없는 반감만 피어날 뿐이다.
하지만 옆은 조직원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역시 형님은 대인배이십니다!”
“부 지부장님이라면 그년도 꼼짝 못하겠지요.”
그들이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카르안을 치켜세워주고 있었지만, 그들의 본심을 ‘어? 정말? 그러면 네가 해주세요. 제발.’이였다.
백작가에서 직접 판매를 할 정도면 어느 정도 짬이 되는 조직원들인데, 그들에게도 접대라는 게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 첩이라는 여자가 대체 뭘 했기에 그러십니까.”
“생각만 해도 화병이 생길 것 같아. 발암물질 같은 년.”
그렇게 운을 땐 사이프카르. 그녀가 카르안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첩의 이름은 루베아이라. 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평민일 것으로 생각되고, (사이프카르의 매우 주관적 견해에 의하면) 사창가 같은 곳에서 일하다 온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물론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얼굴도 반반한데, 남자 꼬시는 솜씨가 기똥차다니까. 그러니까 백작 늙은이도 그냥 넘어가 버린 거지. 나도 한번 보긴 했는데 색기가 아주 줄줄 흘러.”
백작의 사생활까지 파헤치지는 않아서 백작이 그녀를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백작을 홀리고 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작은 늙은 아내보다, 젊은 첩에 빠져들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리라.
마음에 구멍이 생긴 사람은, 그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그리고 루베아이라는 그런 백작의 빈 공간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백작의 심장, 그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좋아. 문제는 그놈, 아니 그년이 우리를 쓰레기 취급 한다는 것이지.”
사이프카르가 이를 악물었다. 루베아이라는 흑룡회에 원수라도 진 것처럼, 방문한 조직원들에 게 모욕을 하고 트집을 잡아 쫓아내기 일쑤였다. 거기에 약 가격을 터무니없이 깎으려 하는 등. 굉장히 성가신 짓을 하고 있었다.
백작도 그런 그녀를 말리기는커녕 맞장구치기 바빴다. 왜 루베아이라를 기분 나쁘게 했냐면서 호통을 쳤고, 조직원들은 억울한 표정으로 숨만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백작은 숨소리가 잘못됐다면서 다시 욕을 하고.......
결국 방문한 조직원들만 죽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농락을 당하는데 말도 못한다. 약팔이 하면서 좋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도 안 했지만, 일방적으로 갑질을 당하니 육두문자가 목구멍 바로 앞까지 치밀어 올랐다.
“정말 저희 조직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까?”
“나도 조사를 해 봤는데,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아. 아주 과거까지 파고든다면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알아볼 수도 없고.”
사이프카르가 대답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조직원이 슬쩍 손을 들었다.
“누님. 아마 저희 조직이랑은 관계가 없을 겁니다.”
“왜?”
“저번에 백작가 앞에서 표두회 소속 여자용병 있지 않습니까. 그 녀석을 만났습니다. 표정이 아주 울상이더라고요.”
“음.”
카르안과 사이프카르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표두회도 백작가와 관련이 있었나. 거구의 조직원은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술 한 잔 하면서 잘 달래 주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쯤 되니까, 이 여자가 저한테 안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흠흠.”
“........”
“그래서 저희 둘은 여관을 빌려서 화끈한 밤을 보냈죠. 역시 현직 용병이라 그런지 조임이 다르더라고요. 아주 정기가 다 빨리는 줄 알았습니다. 으하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사이프카르는 어이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여자 하나 따먹었다는 거냐? 그러면 뭐, 내가 감상이라도 들려줘?”
그녀가 쓸데없는 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몇몇 조직원들이 몸으로 증명한 바가 있었다. 뭔가 한 대 얻어맞을 분위기가 되자, 그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날 거사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기도 알페라츠 백작가에 마약을 팔러 갔다고 했습니다. 표두회을 물건을 말이죠.”
“이제야 쓸 만한 소리를 하는군.”
사이프카르가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백작을 만나러 기다리는데, 웬 여자가 초면부터 자기한테 욕을 하더랍니다. 뭐였더라? 그딴 얼굴을 가지고 자살을 안 하다니, 정말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도 했고. 마지막에는 자기 비위가 약하니 얼굴 좀 가리고 다니라고 했다나? 그래서 그 용병도 화가 나서 있는 대로 욕을 하고.......”
“화날 만도 하겠다.”
카르안이 맞장구쳤다. 거구는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랬더니 백작이 와서,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답니다. 처음에는 가격을 깎으려고 한번 찔러본 건가 싶었는데, 정말로 경비병을 불러 쫓아버렸다고 하지 뭡니까. 거래가 파탄 났으니 그 용병은 표두회 레드스톰에게 왕창 깨졌고, 억울한 마음에 백작가에 와 봤는데 백작은 들여 보내주지도 않았죠. 뭐. 그 뒤는 말한 대로입니다.”
“결국 우리 문제는 아니었군.”
카르안이 그의 말을 정리했다. 루베아이라는 카르안 뿐 아니라 표두회까지 적대하고 있다.
“그러면 문제될 것 없어. 그년. 그냥 우리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군.”
사이프카르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차피 백작이 즐길만한 고급 마약은 흑룡회에서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나마 넉넉하게 잡아도 백작령 2인자인 표두회정도. 그 밑의 조직들은 저급한 마약밖에 생산할 수 없다.
설령 루베아이라가 흑룡회와 표두회 두 조직만 미칠 듯이 싫어하는 특이체질이라 하더라도, 결국 백작이 약을 구매하려면 그 두 조직을 이용해야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야. 카르안, 네가 맡을 수 있겠어?”
“어떻게든 잘 구슬려 봐야겠죠.”
카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이프카르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카르안을 힐끗 봤다.
“그래. 네가 사서 고생한다는데 어쩌겠냐. 이제부터 카르안, 네가 백작가를 맡는다.”
“감사합니다.”
“후후. 근데 너 설마, 그 망할 년을 꼬셔보기라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사이프카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글쎄요. 둘도 없는 미녀를 상관으로 모시다보니, 봐도 별 느낌 안 들것 같은데.”
카르안은 능청스럽게 말을 흘렸다. 사이프카르는 그런 카르안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 여자한테도 그런 식으로만 말하면 쌍욕은 안 먹겠다.”
사이프카르는 한참 웃음을 짓더니 몸을 의자 뒤로 돌렸다.
“이제 다들 물러나봐. 카르안도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딴길 새지 말고 집에 가서 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형님, 감사합니다!”
옆의 조직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카르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마치 지독하게 싫은 일을 떠넘긴 것처럼.
카르안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향하려했다.
“근데 카르안.”
“예?”
“원하던 연금술을 찾았나?”
“,,,,,,,아쉽게도 쓸 만한 기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
카르안의 대답에 사이프카르는 잠시 침묵했다. 그 무거운 고요함이 부담스러워서, 카르안은 말을 덧붙였다.
“초장부터 알샤인 교단을 건드려서 말입니다. 괜찮은 연금술사를 만나는데 까지는 성공했습니다만, 연금술은 전혀 익히지 못했어요.”
“운도 지지리 없지.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 악투루스의 자식들인가 새끼들인가 하는 놈들이 너를 노린다고 했잖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안은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 동안 사이프카르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2.
“아흠.”
다음날 아침. 카르안이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간만에 여유롭게 씻고 푹 잔 덕분에, 피로가 전부 사라진듯한 느낌이다.
“소파에서 자는 것도 오랜만이야.”
그는 몸을 일으키고 물을 한 컵 들이켰다. 밤새 말라 칼칼해진 목으로 물이 들어오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자고 있나?”
카르안은 침실로 들어갔다. 카르안이 평소에 자던 침대. 그곳에는 백발의 소녀가 새근거리며 잠에 빠져 있다.
카르안이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소파에서 잔 이유다. 여기는 카르안이 혼자 사는 집이고, 당연히 침대도 하나밖에 없다. 침대가 널찍하기에 함께 자도 괜찮았지만, 뮬리펜이 온 몸으로 거부했다.
“그, 그건 싫어요!”
“그러면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그것도 실례잖아요. 제가 소파에서.......”
훈훈한 실랑이는 카르안이 소파에서 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뮬리펜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그녀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카르안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뮬리펜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밤새 잠을 설쳤는지, 이불이 전부 흐트러져있었다. 헐렁한 옷 사이로 통통한 허벅지가 전부 드러나고 있고, 창백해진 피부 위로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으윽.......”
카르안이 흐트러진 이불을 덮어주자, 뮬리펜은 눈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정말 상태가 안 좋았다.
강제적으로 생명력이 뜯어졌다.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카르안도 이런 상태는 회복시킬 수 없다.
카르안은 작은 포션 한 병을 책상 위에 두었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약.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회복포션이다. 병을 완치할 수는 없지만, 부족한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저녁에 봅시다.”
카르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을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카르안은 주머니 속에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3.
오랜만의 포션 제작. 다행히 카르안의 손끝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덕분에 저녁 전까지 밀린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라나리도 만나봐야겠네.”
무슨 일이 있을까싶어 여유분을 주기는 했지만, 이제 슬슬 아르나의 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그는 남은 틈을 타서 아르나의 치료제까지 몇 병 만들었다.
다시 균형 잡힌 생활로 돌아온 기분이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바빴지만, 부담 될 정도는 아니다. 바쁜 이유도 밀린 일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일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카르안은 일을 끝내고, 평소처럼 칼같이 퇴근했다. 딱히 말릴 사람도 없다. 실용주의인 사이프카르도 쓸데없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부하가 쓸데없이 책상 앞에 있는 것보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일만 끝내면 집에 가도 된다. 카르안은 그녀의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는 노을 빚을 받으며 어디론가 걸었다.
그가 간 곳은 뮬리펜이 기다리는 집도, 레이아라가 일하는 술집도 아니었다. 도시 구석에 있는 마법사 연구실. 그곳이 카르안의 목적지였다.
카르안은 러슬라이에게 부탁해서 마법사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중 마법석을 연구하는 마법사도 누군지 알아냈다. 지금 향하는 마법사의 연구실도, 마법석을 전공한 마법사의 연구실 중의 하나였다.
“어서 오세요.”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마법사 한명이 그를 반겨주었다. 연구실이 구석에 있기 때문에, 손님이 많이 오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항상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간만에 손님을 놓칠 수 없다.
하지만 카르안의 옷을 보는 순간, 마법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룡회의 간부. 일반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직위다. 마법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봐줬으면 하는 물건이 있어서.”
카르안은 웃으며 품을 뒤적였다. 마법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비록 흑룡회가 무섭기는 하지만, 밝은 표정의 카르안을 보니까 긴장이 살살 풀렸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겁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카르안은 손가락만한 보석을 꺼냈다. 알샤인의 마법진에서 꺼낸 유물. 품에서 꺼내자마자 맥박 치는 마나가 느껴졌다. 마치 갓 꺼낸 동물의 심장처럼 생기가 넘쳐흐른다.
“이건.......”
마법사도 카르안이 꺼낸 물건을 보자마자 눈을 번쩍였다.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마법사의 반응을 살피던 카르안이 말을 꺼냈다.
“묻고싶은건 많은데 이것부터 알아야겠어. 이 물건, 가격이 얼마정도 하나?”
“귀한 물건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보석의 가치는.........”
마법사가 돋보기를 든 채로 보석을 살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금화 40닢, 아니 50닢은 할 물건입니다.”
“겨우 금화 50닢?”
카르안의 눈이 깊어졌다. 마법사는 그런 카르안을 조심스럽게 살필 뿐이었다. 잠시 후, 카르안은 픽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