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
“사실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로프가 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백마법사가 서류를 뒤적거렸다. 낡은 종이 몇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이는 늑대인간과 날카로운 송곳니그림, 전문 용어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보통 잘나가는 용병들은 심심치 않게 선택하지요. 사실 그들에게는 나쁜 선택도 아닙니다. 노화되지 않는 몸. 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근력. 그게 용병들이 꿈꾸는 육체니까요.”
“그러면 개나 소나 다 뱀파이어가 되려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일단 뱀파이어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비용이 드나보군. 피라던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단순히 뱀파이어가 되는 것은 쉬워요. 다만 ‘어떤’ 뱀파이어가 되느냐가 중요하죠.”
백마법사가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마셨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목이 탔다.
“피의 농도가 떨어진 뱀파이어. 그런 약한 뱀파이어에게 감염이 된다면, 얼마 안가 흡혈욕구에 미친 짐승이 됩니다. 라이칸스로프도 마찬가지. 저급한 놈들에게 감염되면 광폭화(狂暴化)를 조절하지 못하고 짐승으로 인육을 탐하다가........ 사냥당하고 말겠죠.”
“결국 상급 마족에게 감염되다면 그만 아닌가.”
카르안은 마법사가 권하는 차를 받아서 마셨다. 차가운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돈 많은 귀족들이 난리도 아닐 텐데. 나 같아도 늙기 전에 뱀파이어가 되겠다.”
“물론 다들 그런 생각을 했죠. 하지만 귀족은 절대 마족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국왕이 직접 정한 법률이었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마족이 된다면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귀족이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자신보다 고위 귀족뿐 아니라 왕과 직접 만날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인간인 귀족은 마족인 귀족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암살 뿐 아니다. 인간들의 지도자가 전부 마족이라면 그게 마족의 나라지, 인간의 국가인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귀족이란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데, 정체성에 문제가 생겨버리면 해결방법도 없다.
“남은 것은 돈 많은 상인들이나 잘나가는 용병들 정도. 그 중에서도 상인들은 적응을 잘 못합니다. 일단 마족이 되면,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썩 좋은 눈길은 받지 못하니까요.”
마족이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당연히 동족에게 버림받고, 고향에서 배척당한다. 원래 이곳저곳 떠돌던 용병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상인들 같은 경우는 상당히 큰 고생을 하게 된다.
거기에 고위 마족이 되면 그 피와 심장을 노리는 자들까지 생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마족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뱀파이어와 라이칸스로프가 자신의 힘을 성장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바로 동족의 피와 심장을 삼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능력의 증가시킬 수 있다. 마치 카르안이 강화 포션을 섭취하는 것처럼.
전투 기술 없이 고위 마족이 된 사람들만큼 손쉬운 먹잇감도 없다. 그나마 용병들은 범죄 조직에 들어가거나, 아예 마족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검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상인들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뮬리펜씨는 어느 쪽이 어울릴까.”
“아무래도 뱀파이어가 좋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능력은 라이칸스로프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그만큼 마법적인 부분에서는 탁월해 지니까요.”
라이칸스로프가 야성의 종족이라면, 뱀파이어는 마력의 종족이다. 그리고 그게 대부분의 용병들이 라이칸스로프를 택하는 이유다.
엄청나게 증가하는 재생능력. 날카로운 반사 신경. 무지막지한 근력까지. 무엇보다 수틀리면 거대한 늑대로 변하는 광폭화를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뱀파이어는 마법에 특화된 종족이다. 근력과 재생력이 인간보다는 뛰어나지만, 라이칸스로프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수준. 대신 여러 마법을 다를 수 있고, 인간이 가지기 힘든 마나량을 보유할 수 있다.
“늑대인간의 식욕보다는 뱀파이어의 흡혈욕구가 참기도 쉬울 겁니다.”
물론 변하는 만큼 단점도 있다. 라이칸스로프의 경우 욕망의 제어가 힘들어진다. 이성보다 욕망이 앞서나가는 것이다. 그런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뱀파이어의 경우 그런 폭력적인 충동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기적으로 혈액을 마시지 못하면 흡혈 욕구에 시달린다. 마치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그리고 결정적인 약점은 태양빛에 노출되면 몸이 타들어간다는 것이다.
설명을 모두 들은 카르안이 답했다.
“성녀님은 둘 중 뭐가 좋으십니까? 고를 것도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아무래도, 뱀파이어 쪽이....... 낫지 않을까요.”
뮬리펜이 민망한 듯 말했다. 무슨 시장에서 저녁거리 고르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기나긴 세월을 지낼 것인데 너무 쉽게 정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 결정 났군. 그러면 필요한 것은 뭐지? 뱀파이어의 피만 있으면 되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백마법사가 손을 휘휘 저었다.
“단순히 피만 마신다고 뱀파이어가 된다면, 세상은 진작 뱀파이어 소굴이 됐겠지요. 저도 자세한 방법은 모르지만, 뱀파이어들만의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특수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하는데........”
“머리가 아프군.”
카르안이 남은 차를 다 비워버렸다. 그래도 성과는 있다. 당장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해결책은 나왔다.
뱀파이어를 찾아, 뮬리펜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버린다. 백마법사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기, 그런데 비용이 꽤나 들어갈 텐데요.”
“뭐, 금화가 몇 백 개씩 필요한건 아니겠지? 어느 정도는 상관없어.”
‘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뮬리펜은 카르안의 호의에 감사보다는 의심부터 들었다. 함께 한 시간이 조금 되다보니까 어느 정도 카르안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저 남자는 순수한 호의만으로 금화를 쏟아 붓지 않는다. 분명 뮬리펜에게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뭔지는 감도 잡히지 않지만.
‘조금 더 알고 싶은데. 카르안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
뮬리펜이 번득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카르안을 멍하니 쳐다본 모양이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니까.........”
“영감님에게 진 빚이라고 해 두죠.”
카르안은 치프에게 전투회로라는 강력한 연금술을 받았다. 반면 치프는 카르안이 벨트리의 연금술을 알려주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그러니까 뮬리펜에게 해 주는 것은 치프의 연금술의 값. 깊게 따지면 끝도 없었지만, 카르안은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더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아마 치프도 이런 방향으로 도와주는 것을 가장 원했을 것이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뮬리펜씨가 뱀파이어가 되신다고 했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적당히 지낼 곳과, 고위 뱀파이어의 피도 구해드리죠.”
“고마워요. 나중에 이 빚은 꼭 갚을게요.”
“괜찮습니다. 대신 뮬리펜씨도 제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뭐죠?”
“아직은 비밀. 얼마 안가서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뮬리펜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딱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좋아요.”
“그럼 됐네요.”
카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뮬리펜이 얼마나 강한 능력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계획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치프에게의 빚과는 별개로 그녀가 하나의 포석이 될 수도 있다. 포석이라는 게, 깔아만 두면 어느 순간에는 도움이 되는 법이다.......
2.
뮬리펜과의 일을 마치고, 카르안은 흑룡회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이미 캄캄한 밤이다. 몸은 피로에 찌들었지만, 졸리다고 집에서 한숨 자고 갈 수는 없었다.
“아이고~ 형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카르안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빡빡 밀어버린 머리. 근육질의 거구. 러슬라이였다.
“참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네.”
“저도 형님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습니다. 마치 어둠속에 버려진 어린 양처럼. 알다시피 제가 태양 없이는 살아도 형님 없이는 못 살지 않습니까.”
러슬라이가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 근육질 대머리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몸을 비틀자 상당히 보기 흉했다. 카르안은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말했다.
“하하하. 지랄이 풍년........ 아니, 다시 보니 나도 기쁘다. 아무튼 별 일은 없었고.”
“예. 딱히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형님.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셨던 겁니까?”
카르안이 어리둥절했다. 그야 여러 가지 화끈한 일들을 하기는 했지만,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난 것인가.
“알샤인 교단 전체가 방방 뛰면서 형님을 잡으려 하던데요. 소식통에 의하면 홀로 악마들을 이끌고 교단 전체를 휩쓸어 버렸다던가........”
비슷하기는 했지만 많이 달랐다. 졸지에 예드프리어 일행이 악마로 변해있었다.
“그나저나 정보가 빠르군. 내가 뭘 했는지 다 알고 있다니.”
정보가 생명이라는 게 흑룡회 보스의 방침이다. 그만큼 흑룡회는 전 세계로 널찍하게 스파이를 심어놓았고, 굵직굵직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국내 정보를 제외하고,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전 세계 소식을 다 듣는데 정확성까지 기대하는 것도 무리겠지만.
지금 흑룡회가 들은 소식은, 카르안이 누군가와 함께 알샤인 교단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교단은 상당히 화가 났고. 함께 습격한 것이 뮤프리드 교단이란 것까지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사이프카르님은?”
“안에 계십니다.”
러슬라이의 안내를 받으며,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게 하나도 없다. 짬을 내서 연락이라도 해 둘걸. 그는 살짝 후회하며 사이프카르를 살폈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사이프카르가 카르안을 보며 말했다. 영 어색하다. 카르안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사이프카르 앞에 섰다.
“아주 대형 사고를 쳤다고 하던데. 연금술 배워 오라고 했더니 왜 알샤인 놈들을 건드린 거야?”
“그게, 서로 조금의 오해와 마찰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놈들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다 깽판치고 다니면 나중에 힘들어지는 거야.”
사이프카르라 짜증스럽게 눈을 비볐다.
“아무튼 네놈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괜히 쫄지 말고 당당하게 다녀. 알겠지?”
사이프카르는 알샤인 교단과 적이 되더라도, 카르안을 보호하려 하고 있다.
배신이 난무하는 뒷세계에서, 이 정도로 부하를 챙겨주는 상관은 드물다. 물론 카르안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는 점도 있지만. 거대한 교단의 압박을 받으며 부하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카르안은 사이프카르의 배려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샤인 교단에서 저를 공격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놈들이 얼마나 지독한데. 설마 선과 빛의 신이라고 정말 선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다만 착한 놈이든 더러운 놈이든 팔다리가 잘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무슨 소리지?’
사이프카르가 카르안을 노려봤다. 카르안이 강하기는 하지만, 알샤인 교단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상대로 싸울 정도는 아니다.
팔다리가 잘렸다. 알샤인 교단이 카르안에게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치명상을 입었다는 뜻이다. 교단에 치명상을 입혔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쿵- 쿵- 쿵-
그때였다. 묵직한 노크소리가 방을 울렸다.
“누님! 일 다녀왔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거구의 조직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카르안을 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래.”
“소문은 다 들었습니다. 지옥의 악귀들과 알샤인 대신전을 불 지르고 팔다리가 잘린 교주의 앞에서 성녀들을 범했다고.......”
“이 미친놈아. 내가 무슨 정신병자냐! 아니, 정신병자도 그렇게는 못하지."
두루뭉술한 정보는 소문을 타며 있는 대로 과장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소문을 거친 것이 조직원들인 것도 문제. 그들은 부 지부장의 무용담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더했고, 그 결과 카르안은 흉악범들도 벌벌 떨 공포의 사나이가 된 것이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데, 보고부터 해라.”
사이프카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조직원들은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이게 오늘 알페라츠 백작 가에서 구매한 약들입니다.”
조직원들이 종이를 건넸다. 사이프카르는 종이를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약도 적당히 해야 즐거운 법인데. 비싼 약은 죄다 사들이니 나야 고맙지만.”
알페라츠 백작가의 주인. 그는 하나뿐인 아들 타브가 사라진 후, 더욱 약에 빠져 지냈다. 그는 지인들을 불러 종종 파티를 열었고, 거기에는 약방의 감초마냥 마약들이 함께 쓰였다. 그 약들을 공급해 주는 것은 당연히 흑룡회.
배작은 물건을 있는 대로 사주는 고객이다. 흑룡회 입장에서는 예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누님. 돈이 되기는 하는데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특히 백작가의 첩이 아주 골칫덩이에요.”
사이프카르와 다르게, 덩치 큰 사내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첩 주제에 온갖 행패를 부리고 난리도 아닙니다. 어디 사창가에서 굴러먹다온 년이........”
“고생 좀 해라.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 나중에 수고비라도 더 줄 테니까.”
사이프카르도 어쩐지 이해하는 표정. 부하가 일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면 따뜻한 한마디 보다는, 따뜻한 주먹으로 대답하는 사이프카르의 평소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백작가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말도 마라. 백작은 우리한테 설설 기었는데, 그 새로 들인 첩이라는 게 아주 징글징글한 년이야.”
그러니까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흑룡회가, 백작의 새로운 첩 때문에 고생이라는 말이다. 카르안은 잠깐의 고민 후, 사이프카르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백작가는 제가 담당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