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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으로 무한성장 (87)화 (87/124)
  • <-- 골렘 깎는 노인 -->

    카르안과 뮬리펜은 알페라츠 백작령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겪었던 불운을 보상하듯, 마지막 순간에는 별 방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알페라츠 백작령의 마법사길드.

    마법진이 번쩍이며 카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뮬리펜과 카르안. 그 둘의 도착을 확인하러 가던 마법사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저기, 그것은........”

    카르안이 들고 있던 것 때문이다. 치프의 시체. 카르안은 슬슬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시체를 양 손으로 들고 있었다. 둘로 갈라진 체 숨이 끊어진 노인에게서는 피와 악취가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용병들도 눈살을 찌푸릴 장면이다. 모두의 시선이 카르안에게 집중되고 있다. 카르안 바로 옆의 마법진으로 텔레포트한 중년 여인은, 그 시체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다.

    ‘으윽.’

    마법사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시신을 가져오더라도, 관이나 하다못해 천으로라도 싸 오는 게 상식이었다.

    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재력가들이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예의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으니까.

    “.......”

    하지만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체를 들고 있는 흉흉한 눈빛의 흑룡회 간부. 그런 사람에게 예의좀 지키라고 지적할 용기는 없었으니까. 카르안이 쩔쩔거리는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가만히 보지 말고 천이라도 주면 고마울 텐데.”

    “아. 죄송합니다.”

    마법사는 얼떨결에 사과까지 하며 흰색 천을 가져왔다. 그것으로 시신을 감싸자,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적어도 먹은 것을 게워내는 사람은 없어질 테니까.

    “고마웠어요.”

    카르안에게 한 말인지, 치프에게 한 말인지. 혹은 둘 다에게 한 말인지. 뮬리펜이 치프의 시신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 온기는 없었다........

    “할 일은 많지만. 일단 장례부터 치러야겠어요.”

    “카르안씨는 바쁘시지 않나요?”

    “괜찮아요. 어차피 늦은 거. 그래도 왔다고 말은 해야겠는데.”

    카르안이 치프의 흰 천을 든 채로 문 밖을 나섰다. 뮬리펜도 카르안을 도와 치프를 들려고 했지만, 카르안이 직접 거절했다. 걷기도 힘든 뮬리펜이다. 이미 반쪽난 치프가 더 이상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후끈한 공기가 몰려왔다. 쨍쨍한 오후의 태양빛이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2.

    장례는 간단했다. 적당한 공터에서 시신을 태우고, 유골을 골라 땅에 묻는다. 길게 상을 치르지도 않고. 하루 안에 끝내는 게 원칙.

    빨리 시신을 태워 죽은 자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전염병을 예방하려 한 것이다. 부패한 시신을 묻지 않고 놔두다가 병이라도 돌면 난리가 날 테니까.

    그런 이유로 화장이 가장 기본적인 장례 절차였고, 카르안이 택한 방법도 이것이었다.

    “그나저나 참 설렁하군.”

    사이프카르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카르안이 들고 온 시신을 보자 별 말없이 장례를 도와주었다. 일은 빼먹고 돌아다닌 책임을 묻는 것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는 길도 심심하겠어.”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치프는 대부분의 삶이 혼자였다. 카르안은 타오르는 장작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봤다.

    주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장작을 옮기던 노예를 제외하면 카르안과 사이프카르, 그리고 뮬리펜. 세 사람 뿐이다. 작은 골방에서 고독하게 살았으니, 설령 그가 죽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더라도 찾아와 줄 사람은 없었다.

    보통은 장례를 담당할 사제라도 부르지만, 카르안이 일부로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치프가 믿는 종교도 없었고, 무엇보다 교단 때문에 이 사단이 나지 않았나.

    “아직 한참 더 걸릴 텐데. 조금 쉬다오지 그래요?”

    “저는 괜찮아요.”

    뮬리펜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몸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자리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사람 아닌가. 그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였다.

    “지겹게 기다려야겠어.”

    카르안은 그렇게 말하며 사이프카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여기 있어줄 의리는 없지 않은가. 과연 사이프카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잘 마무리 하고 와라. 또 어디로 도망치지 말고.”

    “여기 아니면 제가 어디로 갑니까.”

    “그런 놈이 무단으로 일을 빠져? 아주 간덩이가 부었네. 부었어.”

    사이프카르는 몸을 돌려 휙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그녀 덕에 빠르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카르안은 한숨을 쉬며 담배 하나를 꺼냈다.

    담배 연기가 화장터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에 섞여 하늘로 올라갔다.

    “그나저나 화장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몰랐네요.”

    “이정도면 짧은 편이죠.”

    뮬리펜은 회색 연기를 멍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에요.”

    “그런가.”

    카르안도 담배를 몇 번 빨아들이더니, 곧 털어 꺼 버렸다. 이상하게도 습관처럼 물던 담배가, 너무 맵게 느껴졌다. 그는 화풀이하듯 반쯤 탄 담배를 던져버렸다.

    “멍청한 노인네. 그냥 평소처럼 조용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아.......”

    “그래도 후회는 없었을 겁니다. 마지막에 손녀를 구했으니.”

    “손녀?”

    뮬리펜이 연기에서 카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녀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카르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만약 치프가 살아있다면,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말 했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을 보니 조용히 있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했지만. 그래도 카르안은 뮬리펜에게 사실을 밝혔다.

    ‘적어도 하나 남은 손녀는 알아줘야 할 것 아닙니까.’

    뮬리펜이 끝까지 모른다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뜻밖의 소식을 접한 뮬리펜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눈치 챘다.

    “그래서........”

    뮬리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빠졌다. 예상 외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카르안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화장은 조용히 끝이 났다.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재속에서, 남아있는 유골은 뮬리펜이 직접 회수했다.

    뼈는 산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아직 비석은 세워지지 않았다. 치프의 마지막 흔적. 땅속 깊숙이 묻고 나자 장례는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뮬리펜은 바로 발을 때지 못했다. 카르안도 그녀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었다.

    “마지막 기도라도 해주지 그래요. 전직 성녀로써.”

    “오히려 그 쪽을 더 싫어하실걸요.”

    이제 뮬리펜은 더 이상 성녀가 아니다. 그렇기에, 기도문을 외울 수도 없었고, 또 외우기도 싫었다. 무엇보다 알샤인교단 기사단장에게 죽은 노인에게 그 기도문을 들려준다니.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이제 내려가요.”

    뮬리펜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치프가 조부모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는 이야기는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둘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카르안은 마지막으로 치프가 묻힌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푸른 하늘과 투명한 바람이 가득한 곳에서 푹 쉬시길.”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이 푸르르 몸을 떨었다. 마치 카르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3.

    "생명력을 너무 소모하셨습니다. “

    백마법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뮬리펜은 하얗게 탈색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옆에 앉아있던 카르안이 눈을 찌푸렸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는가."

    "힘들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상처를 입었다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이런 경우는 방법이 없어요."

    지금 뮬리펜을 치료해주는 마법사는 알페라츠 백작령에서 알아주는 명의. 젊은 나이에 온갖 치료술을 익힌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마법사도 고개를 저었다.

    명의와 돌팔이의 가장 큰 차이는,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으로 보기에, 지금 뮬리펜이 필요한 것은 치료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은, 한번 빠져나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지금 뮬리펜은 강제적으로 생명력을 빼앗긴 상태. 사도들의 몸에 빨려 들어간 그 힘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냥 수명 자체가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의술은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이지, 사라진 세월을 되돌리는 게 아니에요."

    "치료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군."

    "이런 말은 불경스러운 것이지만....... 뮤프리드님이 강신하신다 하셔도 힘들 것 같습니다."

    백마법사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 뮤프리드의 신도였다. 그런 그가 뮤프리드까지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절박한 상황이라는 뜻.

    물론 정말 의술의 신이 힘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카르안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미 예드프리어에게는 빚을 진 참이다. 이제 와서 더 뭔가를 요구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길어야 1년 정도.......”

    "그 수명을 늘일 방법은 전혀 없는것인가?"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법이라면 가능은 합니다만."

    백마법사가 뮬리펜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등 뒤까지 따라붙었을 때. 그 검은 손길을 떨어뜨릴 방법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 방법을 뮬리펜이 허락할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알샤인의 성녀가 좋아할 방법은 아니었다.

    백마법사가 고민할 때. 카르안이 말했다.

    "나는 마족에 대해서는 지식이 많지 않아. 그래서 유능한 마법사를 찾아온 것이고."

    마법사는 헛기침을 했다. 유능한 마법사라. 카르안같은 거물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거기에 마족이라. 카르안은 이미 마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가장 안정적인 방법은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로프에게 스스로 감염되는 것입니다. 딱히 제약도 없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뮬리펜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카르안은 그런 전(前)성녀에서 말했다.

    "결정은 뮬리펜 씨의 몫입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힘닿는 대로 도와드릴 생각입니다만."

    '안할 것 같은데.'

    백 마법사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눈앞의 소녀는 성녀다. 누구보다 선하고 독실한 알샤인의 성녀.

    그런 성녀가 마족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슨 일로 그녀가 수명을 왕창 뜯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뮬리펜이 마족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차라리 성직자들이 밤마다 단체로 악마숭배 집회를 가진다는 편이 더 현실성 있었다.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로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역시 그렇........ 네?”

    백마법사가 귀를 벅벅 긁었다. 잘못 들은 것 아닌가. 알샤인 성녀가 마족이 된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코웃음도 안칠 이야기다.

    “이제, 이 목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카르안도 뮬리펜의 대답에 만족했다. 덧없이 져 버리는 꽃 보다는, 악착같이 살아남는 잡초가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하지만 알샤인의 성녀님은....... 마족이 될 수가 없으십니다.”

    “왜 그러지?”

    “빛의 신성력은 마족과 상극(相剋)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때문에, 몸이 버티질 못해요.”

    아케르나라의 4명의 신. 그 중 선과 빛의 신 알샤인의 사제들은 마족에게 특히 강했다. 대부분 어두운 마나를 가진 마족들에게 빛은 치명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신성력을 잔득 가진 성직자가 마족이 된다면, 기름통을 잔뜩 들고 있는 사람에게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특히나 성녀쯤 되는 신성력의 보유자라면, 마족이 되는 순간 몸이 타들어가서 죽을 것이다.

    “상관없어요. 이제 신성력은 없으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족이 되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신성력이 없다고 한다. 뮬리펜은 모든 신성력을 잃어버렸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백 마법사는 뮬리펜이 뭘 잘못 먹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알려주게.”

    뮬리펜 뿐 아니라 카르안도 진지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 백 마법사는 아는 것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다른 마족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그 종족으로 태어나지만, 라이칸스로프와 뱀파이어는 상대를 전염시키며 동족을 늘립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군. 잠깐.”

    카르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그들은 자식을 낳지 않나?”

    “예. 쾌락을 즐기기 위해 성 관계를 갖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아이를 갖는 경우는 없습니다.”

    백 마법사가 뮬리펜을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뱀파이어와 라이칸스로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오직 자신의 피를 전염시키며 그 종족을 늘릴 뿐이다. 필멸자들처럼 생명을 잉태하여 불멸성을 가지는 대신, 그들은 혼자서 영생을 살아간다.

    아이를 가질수 없다는 말에도, 뮬리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가만히 있어도, 1년동안 누군가와 결혼할 일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마족이 되지 않아도 아이는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카르안이 감탄한 듯 말했다.

    “이제야 조금 합리적인 사고를 하실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그거 욕인가요?”

    “물론 칭찬입니다.”

    카르안이 몸을 쭉 당겼다. 마족이라. 마침 마족들에게 볼 일이 있었다.

    “자, 그러면 마저 말해 줘. 마족에 대해서.”

    ========== 작품 후기 ==========

    카르안이 치프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미야자와 겐지의 '눈으로 말하다'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떠올린 것입니다. 사실 치프와 참 어울리는 시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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