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렘 깎는 노인 -->
카르안의 한수. 의외로 단순했다. 그냥 뮤프리드 대신전에 자신이 얻은 정보를 모두 보내버렸다.
과거 카르안은 뮤프리드 대신전의 교주, 예드프리어에게 큰 도움을 줬다. 그때 예드프리어는 카르안의 의술에 큰 감동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교주 예드프리어에게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을 받아내었다.
마법을 이용한 무전 통신. 장비가 굉장히 비싸서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장비다.
하지만 마법사나 연금술사 길드, 귀족의 저택, 부유한 상인의 사업장, 그리고 대형 종교조직쯤 되면 그런 거 하나 둘쯤은 챙겨두기 마련이다.
그중 카르안은 뮤프리드 교단이 아닌 예드프리어에게 바로 연락할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다. 오직 각 국의 지도자와 다른 교단의 교주, 직접 심어놓은 스파이들만 알고 있는 수단이다.
이쯤 되면 예드프리어가 카르안에게 얼마나 감동했는지, 또한 탈모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 알 수 있었다.
“알샤인 교단이 병사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드프리어는 곧장 준비를 했다. 예드프리어도 나름대로 정보통이라 할 만한 스파이들을 사방에 뿌려놓았다.
거기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르네키르다를 습격한 괴생명체들, 그들의 배후로 알샤인 교단을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보류하고 있었을 뿐.
거기에 카르안이 말한 정보들을 종합해보니, 대충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그 괴생명체들이, 카르안이 말한 전투회로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파국의 시작이리라.
무슨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예드프리어는 카르안이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 탈모를 고쳐주지 않았는가. 그런 의인중의 의인이 거짓을 입에 담을 리가 없다는 게 예드프리어의 철학이었다.
“그럼 병력을 꾸려서 출발하겠네.”
알샤인이 그 전투회로를 얻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시가 급한 상황. 안타깝게도 뮤프리드 대신전과 알샤인 대신전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육로로 이동하려면 한세월이다. 대륙에서 배를 탈 수도 없다. 가장 빠른 수단은 장거리 텔레포트.
마지막 남은 문제라면 비용이다. 그 많은 뮤프리드의 병력을 전부 장거리 텔레포트로 수송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거기에 마법사들의 마나가 부족한 것도 있고. 아무리 부유한 뮤프리드 교단이라도 그것까지는 불가능하다.
소수 정예. 그게 마지막 남은 방법이다. 예드프리어는 스무 명 정도의 기사, 사제들로 소대를 편성했다. 뮤프리드 기사단의 단장, 부단장, 교단의 사제장 등. 그리고 그 중에는 예드프리어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단 알샤인 대신전과 가장 가까운 도시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이동했다. 대신전 한가운데로 텔레포트를 했다가는 당장 만 명에 가까운 병력들과 싸워야 할 테니까.
알샤인 교단도 그들의 도시를 지키는 방어체계가 있었지만, 침입자가 좀도둑도 아닌 뮤프리드 교단의 우두머리와 그의 최측근들이다. 기사들이 앞장서서 정찰을 하고, 사제장은 경보 시스템을 완전히 먹통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신전 안에 침투했다. 그들을 기다리던 카르안도, 설마 예드프리어 본인이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랜만의 재회에 기뻐할 틈도 없이, 그들은 곧장 달려가야만 했다. 뮤프리드의 지원군이 오는 사이에도 카르안이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나름대로 알샤인 교단에 침투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 결과 지하에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세례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들은 신전 안쪽으로 최대한 잠입한 후, 일정 순간부터 정면으로 돌파했다. 가로막는 기사들을 날려버리고, 지하실로 가는 숨겨진 벽도 박살냈다. 그들은 단숨에 지하까지 도착했다.
그 결과. 지금 아슬아슬한 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폴룩스가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망할 대머리놈. 여긴 네놈이 매일 가는 가발 가게가 아니야. 썩 꺼져.”
“뭐? 이 노인네가 진짜 뒤지고 싶나.”
예드프리어가 체면도 잊고 쌍욕을 퍼부었다. 옆에 서 있단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교주님. 이제 괜찮지 않습니까.”
“아.”
예드프리어는 이제 제법 자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입고 있는 황금색 갑옷과 똑같은 금발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대머리라는 소리만 들으면 울컥하지 뭐야. 하하.”
“이놈!”
교주가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듣자, 알샤인의 사제 한명이 몸을 떨었다. 그는 분노하며 양 손에 신성마법을 모았다. 침침한 지하실에 밝은 빛이 번쩍였다.
푸욱-
“아아악!”
하지만 그의 마법은 완성되지 않았다. 예드프리어 뒤에서 석궁 볼트 하나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볼트는 정확하게 사제의 어깨를 꿰뚫었다.
“고라니보다는 맞추기 쉽군요.”
뮬리펜, 카르안, 러슬라이와 함께 고라니 사냥을 했던 사냥꾼. 라이였다. 그가 거대한 석궁을 들고 눈을 찡긋했다.
“다음에는 심장입니다. 죽기 싫으면 그대로 누워 계시길.”
“크아악!”
사제는 대답도 못하고 온 몸을 비틀었다. 묵직한 화살이 어깨를 꿰뚫었으니 기절 안한 게 다행일 정도다. 그보다 제법 먼 거리였는데 한방에 맞추다니. 박수가 절로 나오는 솜씨였다.
“고라니 빗 맞출 때만 해도 조금 의심이 갔었는데. 오해였군요.”
“사실 동물보다 사람을 더 잘 잡거든요.”
라이가 섬뜩한 소리를 하며 석궁에 볼트를 먹였다. 예드프리어가 소리쳤다.
“좋아. 잡담은 여기까지 하자고. 폴룩스. 당장 이 짓을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어쩔 거지?”
폴룩스가 손짓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알샤인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전원 기사와 마나 사용자들이다. 전에 있던 기사단이 전멸하고, 급하게 새로 편성했다. 하지만 전력만큼은 확실하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대기시켜 놓았다. 하지만 예드프리어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가 호전적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글쎄. 어떻게 될 거 같나?”
동시에 예드프리어가 허리에 있던 양손 검을 뽑아 올렸다. 브로드 소드로 보이는 거대한 장검.
“흐합!”
예드프리어가 기합을 외치자 엄청난 마나와 신성력이 모여들었다. 그는 번쩍이는 검을 폴룩스에게 휘둘렀다. 마치 대 마법사의 마법처럼, 응집된 에너지가 폴룩스를 향해 진격했다.
“선한 자를 지키는 것은 위대한 자의 말씀뿐이라.”
폴룩스가 신성 마법을 사용해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예드프리어의 오러는 그 방패에 부딪혔다.
콰아아앙!
“뭐 이런.........”
카르안이 말을 잃었다. 예드프리어가 강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러를 장거리로 발사하는 것도 대단했지만, 단순히 막힌 오러의 충격만으로 이 정도 힘을 낼 줄은 몰랐다.
폴룩스의 주변이 전부 터져나간다. 지하실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위에서는 불길한 돌가루들이 떨어진다. 예드프리어가 소리쳤다.
“자, 뮬리펜 성녀의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는데, 빨리 움직이자고!”
“돌격!”
“성녀를 구하고 마법진을 파괴해라!”
예드프리드의 공격이 신호탄이 되었다. 양 쪽의 정예병들이 서로에게 돌진했다. 뮤프리드 교단의 선두에는 예드프리어가 있었다.
‘우리가 유리하다.’
알샤인 기사단은 속으로 승리를 점쳤다. 비록 저들이 정예라고는 하지만, 이쪽은 수가 100명가까이 된다. 일단 수적으로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알샤인에게 선택받은 존재들. 신성력과 마나에게 선택받은 재능 덩어리들 아닌가! 저들은 고작해야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5배의 전력 차. 저들은 5명의 적을 혼자 상대해야 한다.
“지금 도망가면 살려주지!”
예드프리어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당연히 알샤인 기사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부우우웅!
예드프리어가 대검을 휘둘렀다. 검이 아니라 거대한 쇳덩이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예드프리어에게 검을 휘두르던 4명의 기사가 한칼에 동강나 버렸다.
“어어?”
폴룩스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이 눈을 번쩍 떴다. 예드프리어의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무슨 분쇄기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그는 기사단 한 중간으로 돌격하더니 기사들을 전부 갈아버리고 있었다.
기사단장 출신 교주 예드프리어. 대부분의 교주들이 사제장이나 성녀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교주라는 것은 예드프리어가 불리한 출신을 뒤집을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크하하하!”
전장에 돌입한 순간, 예드프리어는 피에 취한 맹수처럼 날뛰고 있다. 말 그대로, 황금 사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교주님!”
그때였다. 카르안 일행이 뚫고 온 벽 틈새에서, 교단의 사병들이 모여들었다. 폴룩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는 일반 병사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많은 병사들이 알게 되면 그만큼 그들의 입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니까.
옆에 서 있던 사제들도 당황했다. 잠시 고민하던 폴룩스가 명령했다.
“전부 들어오라 그래.”
“하지만......”
“지금은 저놈들을 막는 게 우선이다.”
일단 사도들을 완성해야 한다. 사제들도 상황을 이해했는지, 처음 침입을 알린 기사에게 명령했다.
“교단의 모든 병력의 집합시켜. 비상사태다.”
안 그래도 처음 이곳을 돌파할 때 생긴 난동 때문인지,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카르안 일행은 교단의 모든 병력에게 둘러싸일 판이다.
“카르안씨. 뒤를 부탁합니다!”
뮤프리드교의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그는 카르안이 골렘술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 전부 소환.”
카르안도 이 상황을 예측했다. 그래서 골렘을 미리 소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명령에 마법진이 활짝 피어났다.
“저게 뭐야........”
달려가던 병사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병사들 앞에 강철의 벽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괜히 골렘술사가 군에서 대우받겠는가. 전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병사들 기준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기사도, 대형 몬스터도 아니다. 바로 골렘이다.
기사든 오우거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칼이 박히기는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사라도 찔리면 부상을 입는다. 무시무시한 오우거도 계속 찌르고 베다보면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골렘은 전혀 다르다.
처음부터 데미지 자체를 줄 수가 없다. 특히나 저런 아이언 골렘은 칼이나 철퇴 따위가 먹히지도 않는다. 게다가 힘은 무식하게 강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움직임이 느리다는 것이지만, 많은 수의 병사들을 상대한 때에는 그조차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뭉쳐있는 병사들은 움직임이 제한되기 마련. 양 팔을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해도 그들은 전부 다진 고기가 된다.
유일한 상대법은 골렘술사의 마나 고갈을 기다리거나, 뛰어난 기사의 오러, 마법사의 마법뿐이다. 아니면 같이 맞 골렘으로 대항하던가. 아무튼 병사들이 상대할 물건은 아니었다.
“뭐해! 빨리 들어와!”
기사단장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병사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죽으러 가라는데 그게 쉽게 되겠는가.
카르안이 입구를 부쉈다고는 하나, 아직 지하실의 입구는 좁았다. 골렘을 피해 우회해서 예드프리어를 치기도 버거웠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만만치 않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돌격! 전부 돌격해서 골렘을 쓰러뜨려! 명령이다!”
카르안이 그런 기사단장을 비웃었다.
“아니, 명령은 내가 한다. 전부 죽기 싫으면 그대로 멈춰.”
“크윽!”
병사들은 굴욕적인 신음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일단 가지만 않으면 그쪽에서 올 일은 없다는 뜻 아닌가.
기사단장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이 아닌 적의 명령을 듣다니. 이런 수치가 어디에 있을까.
카르안이 장판파의 장비마냥 홀로 수백 명을 묶고 있을 때, 예드프리어는 기사들과 난장판을 버리고 있었다.
알샤인의 사제들이 신성마법을 날려대었지만, 이쪽에는 사제장이 있었다. 그는 가볍게 모든 마법을 방어했다.
“하하. 내가 지금까지 이런 병신들과 함께 교단을 이끌었군. 나도 참 대단한 놈이었어.”
폴룩스가 그 꼴을 보며 자조했다. 모든 게 무르짐 때문이다. 그놈 때문에 정예들이 전멸한 게 너무 큰 타격이었다. 나머지 오합지졸을 모았지만, 결국 잡병들은 잡병에 불과했다.
옆의 기사단장과 사제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러다가 정말 저들이 뮬리펜의 구출하고, 마법진을 박살낼 것 같았다. 폴룩스가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수단이었다.
“자고 있던 사도들. 전부 깨워. 이쪽으로 부른다.”
2.
“흐아아암!”
깨어난 것은 사도들뿐이 아니었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치프. 그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밖이 굉장히 소란스럽다. 그는 눈을 비비며 창문 밖을 봤다.
“허.”
무슨 일인지 병사들이 전부 달려가고 있다. 치프는 눈을 찌푸렸다. 멍했던 정신이 점점 돌아왔다. 저게 훈련일 리도 없고,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은 세례식이 있는 날 아닌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옆의 주전자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거 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혹시라도 사도들이 폭주를 일으켰거나 누군가 침입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며, 치프는 병사들이 달려가는 쪽으로 뛰어갔다.
성기사 라이. 그의 석궁이 다섯 번째 손님에게 바람구멍을 내 주었다. 알샤인의 기사는 솟아지는 피로 볼트 값을 지불했다. 손쉽게 적을 사냥하고, 다음 볼트를 꺼내려는 라이에게 기사 한명이 달려들었다.
모든 백병전이 그렇듯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적은 마법사와 연금술사, 그 다음은 궁수였다. 적의 빈틈에 한발의 화살을 박아 넣는 궁수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압박을 주었으니까.
그것을 잘 아는 기사가, 혼란 속에 몸을 숨기고 접근한 것이다. 그는 검에 오러를 실어 라이에게 휘둘렀다. 라이는 급히 땅을 구르며 검을 피했다.
“죽어!”
그는 울분을 토하며 다음 검격을 날리려 했다. 라이의 눈이 번뜩였다.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 기사의 가슴에 볼트가 박혔다. 그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라이를 쳐다봤다.
라이가 땅을 구름과 동시에, 볼트 한발을 장전했다. 그리고 기사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순간 발사한 것이다. 볼트 장전이라는 게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라이는 작은 단궁을 장전하는 것처럼 날쌔기 그지없었다.
기사는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질 눈빛이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라이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제 슬슬 되겠군.”
라이는 한숨을 쉬고 다음 발을 준비했다. 볼트의 통이 영 가볍다 했는데, 이제 준비해 둔 볼트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한쪽 눈을 감으며 천천히 조준을 시작했다.
다음적은 기사가 아니었다. 저 마법진에 신성력을 흘리는 사제들. 지금까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공격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한 번에 즉사시킬 수 있을만한 거리에 들어왔다.
그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주변을 살폈다. 이제 그를 노리는 기사는 없다. 전부 예드프리어에게 신경을 쏟고 있다. 지하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바람도 없고. 타겟인 사제들은 마법진에 정신이 팔려있다.
이상적인 상황. 그는 숨을 참으며 조준을 마쳤다. 이 한방이 빗나가면 상대가 경계하게 된다. 한방에 끝내야 한다. 조준은 금방 끝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억!”
이변은 없었다. 볼트는 사제의 목을 깔끔하게 뚫고 지나갔다. 화살에 당한 사제는 열심히 구멍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게 될 리는 없다. 그는 피거품을 쏟아내며 땅에 쓰러졌다.
“이제 끝인가?”
장거리 저격에 사제는 대처하지 못했고, 마법진을 이루던 놈은 죽었다. 하지만 이제 마법진이 힘을 잃으리란 예상과 다르게, 저 불길한 연기는 뮬리펜을 끝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혹시 저놈들을 다 죽여야 되는 건 아니겠지.’
아직 남은 사제들이 마법진을 조작하고 있다. 라이는 남은 볼트가 많나 저놈들의 머리통이 많나 비교해보며, 다음 볼트를 성궁에 장전했다.
‘으흠.’
순간 라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조준하던 사제에서, 살짝 조준을 옆으로 움직였다. 거기에는 쓰러져 있는 뮬리펜이 있었다.
꼭 멈춰야 한다면, 사제가 아닌 뮬리펜을 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뮬리펜은 의식의 핵심이었다. 그녀가 죽는다면, 확실히 마법진은 작동을 정지하겠지.
‘젠장.’
그는 고민에 빠졌다. 저 의식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 제물 역할을 뮬리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뮬리펜이 무슨 선택받은 소녀도 아니다. 그가 뮤프리드 대신전에서 뮬리펜을 봤을 때도, 그녀의 신성력은 딱 평범한 성녀 수준이었다.
뮬리펜을 죽인다고 해도 다른 사제가 들어간다면 그만이 아닐까.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의 교주, 그리고 동료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뮬리펜 성녀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짧은 사과와 함께, 그는 뮬리펜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볼트는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 것이 뮬리펜의 심장을 뚫으려는 순간이었다.
“어?”
날아가던 화살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방어막에 튕긴 것은 아니다. 강한 염동력에 막힌 것 같다.
라이는 눈을 비볐다. 저 검고 진득한 연기, 그게 화살을 낚아챘다. 마치 의식이 있는 동물처럼.
무슨 상황인지는 깊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정확한 것이 있다. 그의 석궁으로는 뮬리펜을 죽일 수 없다. 만약 근접전으로 오러를 펴고 베어낸다면 모르겠지만, 원거리로는 무리다.
라이는 다시 석궁을 장전하며 사제들을 노렸다. 일단 저놈들부터 쓰러뜨려야 한다.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때였다. 그의 예리한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괴상한 생명체들이다. 그는 서둘러 카르안을 보았으나, 그들의 연금술사는 입구를 안정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입구 쪽이 뚫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것은 소환수다! 폴룩스가 서 있던 방향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괴물들은, 곧장 예드프리어를 향해 돌격했다.
2.
“이제 사도들이 풀려났으니, 저놈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흐음.”
폴룩스의 측근들. 그들이 신성력으로 사제를 깨운 뒤, 폴룩스가 직접 그들을 소환한다. 사도의 소환 권한은 교주만 가지고 있기 때문. 그는 침착하게 예드프리어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기사단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저들은 사망자는커녕 부상자 하나도 없다. 상처를 입어도 저 사제장이 단숨에 치유해 버린다.
뮤프리드의 사제장답게, 치유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곳의 사제장이라면 세상에서 치유 마법은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한마디로 저들은 피해 없이 멀쩡하다. 과연 사도로도 저들을 사냥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폴룩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교주님. 어디 가십니까.”
“저 멍청한 사제 놈들을 보니 답답해서 그래. 내가 직접 마법진에 들어간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 한 사제는 목에 구멍을 내고 쓰러져 있다. 폴룩스는 혀를 한번 차고, 마법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교주는 대충 계획을 세웠다. 사도를 풀어 시간을 끌고, 자신이 직접 마법진을 운용한다. 결국 남은 사도들은 깨워 내면 저들도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 마법인은 일반적인 마법진이 아니었다. 막대한 제작기간과 비용이 들어간 물건이다. 이 알샤인 대신전의 정수가 깃들어있다고 해도 될 정도. 거기에 교주가 안에서 운용한다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제 그 위력을 저 놈들에게 알려줄 시간이다. 알샤인 대신전에서 자신을 상대가는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도. 폴룩스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예드프리어를 비웃으며, 마법진에 몸을 던졌다.
“젠장. 이러다가는 끝도 없겠군.”
예드프리어가 달려오는 사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던 기사 한명이 말했다.
“교주님. 그냥 지하실을 무너뜨리는 게 어떨까요.”
저놈들을 다 상대할 바에는, 그냥 이 곳을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탈출하면 그만. 예드프리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 할 문제가 아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여기를 전부 무너뜨려도 마법진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무너뜨린다 해도 큰 피해를 줄지는 미지수. 아마 교주 폴룩스의 힘만으로도 마법진 정도는 지켜낼 수 있다.
“그냥 빨리 돌격해서 마법진을 파괴해.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 사제장,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마침 기사들도 얼마 남지 않았고, 사도들은 아직 그들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예드프리어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법진을 향해 돌격했다.
덕분에 얼마 안가 마법진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제장을 보호하는 형태로, 방진을 짰다.
“사제장은 얼른 마법을 해제하고, 자네는 빨리 가서 뮬리펜 성녀를 빼오게. 나머지는 자리를 지킨다!”
정교한 마법진일수록 물리적인 공격은 효과가 없다. 그렇기에 사제장이 힘을 쓸 차례. 예드프리어는 기사들을 독려했다. 사제장은 얼른 마법진에 달라붙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엄청나게 정교한 마법진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만드는 것은 한세월이지만, 부수는 것은 한순간인 법이다. 이렇게 벌건 속살을 다 드러낸 마법진, 그것을 파괴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쉬웠다.
예드프리어와 기사들은 서로 기합을 내지르며 사도들과 맞서 싸웠다. 사도들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방진을 잘 짠 탓에 한 번에 한두 놈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죽이는 게 아니라 시간만 끈다는 생각으로 방어에 집중하니,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그런데 교주님.”
“엉? 왜?”
석궁을 집어넣고, 검으로 사도를 베던 라이.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여기로 오면 카르안씨는 어떻게 합니까?”
“........아차.”
예드프리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르안이 싸우지도 않고 조용히 있어서, 그만 깜빡해 버렸다.
같은 시각, 카르안은 멀리 떨져 가는 예드프리어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양반은 머리털이랑 뇌랑 바꿔먹었나.”
자신만 혼자 두고 가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사도들은 대부분 예드프리어에게 몰렸지만, 그에게도 하나 둘씩 기어온다. 카르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골렘을 조작했다.
4미터 대형 골렘만 놔두고, 나머지 두 골렘은 자신을 보호하도록 배치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카르안이 틈을 보이자,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병사들이 안쪽으로 달려든 것이다.
“와아아아아!”
“사악한 놈들을 전부 쳐라!”
병사들이 호기롭게 소리치며 돌격했다. 카르안은 아차 싶었으나,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일부는 카르안을 향해, 일부는 예드프리어를 행해 돌격했다.
“어어?”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굴러갔다. 달려가던 일반 병사들을 사도들이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뜬금없이 등장한 괴물들에게 공격당하자, 사병들은 악을 쓰며 사도들에게 반격했다.
만약 이 꼴을 폴룩스가 다시 봤다면 뒷목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사도의 지성은 짐승과 다를 게 없다. 그것도 아주 굶주리고 폭력적인 짐승.
그들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은 오직 알샤인의 신성력뿐이다. 알샤인의 신성력이 있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게 없는 자는 누구든지 공격한다.
문제는 일반 병사들에게 신성력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폴룩스도 그 문제를 알고 있기에 신성력이 충분한 기사단, 사제들과 함께 운용했던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 일반 사병들은 사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신을 습격하는 괴 생명체들을 완전히 적이라고 파악해 버렸다.
사도와 알샤인 사병들이 싸우고 있다. 뜻밖의 어부지리에 카르안은 어리둥절했다. 뭔가 상황이 좋게 흘러간다. 그는 얼른 예드프리어에게 합류하려 했다.
“카르안?”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카르안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영감님. 여긴 어쩐 일입니까?”
3.
“쯧쯧. 멍청한 놈들. 내가 여기 들인 공이 얼마인데,”
폴룩스가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마법진 안으로 동화하는데 성공했다. 폴룩스는 반쯤 유체가 된 체로. 예드프리어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마법진이라면 그 안에 동화된다던가 하는 게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마법진은, 그런 단순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예드프리어가 폴룩스에게 소리쳤다.
“이 미친놈. 마법진만 박살내면 바로 네놈 차례다. 다신 이런 수작을 못 부리게 해주지.”
“아이고.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쌀거같군. 그런데 그건 마법진이 부서진 다음이겠지?”
폴룩스가 여유롭게 사제장을 내려 봤다. 처음에 자신 만만하게 마법진을 파괴한다던 사제장. 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교, 교주님.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마법진이 부서지지가 않습니다!”
마법진을 지우고 지워도 다시 생겨난다. 마치 칼로 물을 베는 기분. 베어고 베어도 원래 모양대로 돌아온다.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득 지나갔다. 이렇게 마법진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뭔가 안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고민하던 사제장이 소리쳤다.
“성물! 이 마법진은 성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성물이건 똥물이건 아무 상관없어! 해결법을 찾으란 말이야!”
예드프리어가 소리쳤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뮬리펜은 이제 신성력을 완전히 잃고, 생명력이 빨리기 직전. 더 이상가면 정말 그녀가 죽고 사도들이 깨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들을 상대하는게 슬슬 벅차기 시작한다. 사제장이 급하게 말했다.
“성물을 파괴해야........”
“자아. 장난은 끝이다.”
폴룩스가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시선에는 뮬리펜을 꺼내려 애쓰는 기사단장에 있었다. 그도 연기에 막혀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알샤인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 빛을 벗어난 삶은 모두 원죄가 되리라.”
폴룩스가 길게 영창을 했다. 예드프리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후끈한 기운이 아래에서 올라온다.
“거룩한 이름으로,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 그들을 정화의 불로 태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