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77)화 (77/124)

<-- 골렘 깎는 노인 -->

뮬리펜.

그의 하나뿐인 손녀딸.

갑작스러운 사고. 가족이 모두 죽었다. 아니, 죽을 뻔 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속에서 한 소녀는 살아남았다.

한 사제는 소녀를 치료하며, 그녀의 몸에 알샤인의 신성력이 몸에 깃들었다는 것을 눈치챈다. 끔찍한 신의 저주와 재능의 축복을 동시에 받은 아이. 그게 뮬리펜이었다.

그녀의 신성력을 알아본 사제들은 뮬리펜은 교단으로 데려가려 했다. 치프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난한 연금술사의 손녀보다는 교단에서 성녀, 귀족 같은 삶을 사는편이 그녀에게 더 좋을것이라 생각했다.

그 뒤로도 치프는 뮬리펜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연구에 미쳐있었다. 사고 전까지 손녀를 키워주지도 사랑을 주지도 못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할아버지 행세를 한단 말인가. 늙은이가 가 봐야 손녀의 인생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실제로 뮬리펜은 치프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그저 모든 가족이 사고로 죽은 것 밖에 알지 못했다.

덕분에 치프는 그저 약간의 죄책감을 안고 그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뮬리펜은 사고 당시 너무 어렸다.

덕분에 소녀는 그녀의 가족이 죽은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부모가 마차사고로 죽었다. 그 사실밖에 알지 못한다.

‘과거 같은 것은 다 잊고, 그저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는데.’

그런데 지금 저 종이에 뭐라고 적혀있는가.

순교자.

불쌍한 희생양을 포장하는 하나의 단어.

그럴 수는 없었다. 치프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폴룩스 교주는 연금술사와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막이 귀를 틀어막고 있는 기분.

‘저 괴물들.’

서류를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치프 역시 연금술사다. 저런 괴물들을 깨우는 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희생 없이는 움직일 수 없어.’

그리고 순교자가 필요한 것.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저놈들은 뮬리펜을 희생시켜, 괴물들의 먹이로 줄 생각이다.

“교주님.”

“왜 그런가?”

폴룩스가 연금술사와의 대화를 멈췄다. 치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이 괴물들은 완성된 것입니까.”

“아직 아니지. 두 가지가 부족해. 일단 자네의 전투회로.”

알샤인의 사도들. 그들에게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바로 지능이 무식할 정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검술이나 격투술도 가르칠 방법이 없다.

그들의 전투방법. 좋게 말해서 야성적이지, 그냥 훈련 안 된 날짐승이다. 그래도 압도적인 육체적 스펙, 기사의 오러와 같은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능력. 그 둘만 보고 양산해 냈다.

“자네의 전투회로만 있으면, 이 사도들을 더욱 강력한 군대로 만들어버릴 수 있네.”

거기에 전투 능력까지 익힌다. 마나야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대체를 하면 그만이고, 뛰어난 검사와 격투가는 교단에 차고 넘친다. 그런 기사들의 검술을 익힌 사도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짜릿했다. 훈련되지 않은 사도들 만으로, 엘프들의 르네키르다를 초토화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괴물들이 숙련된 기사처럼 싸운다.

대체 얼마나 위협적일지 상상도 안 된다. 그저 압도적. 이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엘프들따위는 적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흠....... 이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많은 신성력이 필요하네. 고위 성직자의 희생이 필요해.”

“누가....... 희생됩니까.”

“왜. 혹시 교단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폴룩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치프가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제발 부탁드립니다. 뮬리펜, 뮬리펜 성녀만은 안 됩니다.”

“뭐라고?”

폴룩스의 표정이 바뀐다. 그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왜. 혹시 뮬리펜 성녀와 아는 사이인가.”

치프는 침을 삼켰다. 지금은 진실을 말해야 할 때다. 치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아이는 제 손녀입니다.”

“손녀?”

“예. 가족이 죽고, 하나뿐이 안 남은 혈육입니다.”

“허. 뮬리펜에게 가족은 없다고 들었는데.”

폴룩스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애초부터 그 많은 성직자의 가족관계를 어떻게 알겠는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만은, 그 아이만은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누군가는 희생해야하네. 게다가 순교는 그 아이가 원한거야.”

“예에?!”

치프가 헛숨을 들이켰다. 대체 왜 뮬리펜이 희생을 자처했단 말인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치프가 결심한듯 소리쳤다.

“제가 돈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교주의 눈이 커졌다. 치프에게는 상당히 큰 금액을 약속했다. 평민이 아니라 어지간한 귀족도 놀랄 만큼의 돈을.

그런데 그것을 안 받아도 좋다니. 처음에는 잠깐 의심이 갔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저 노인은 정말로 뮬리펜과 피로 이어진 사이다.

그 많은 금화를 포기해가면서 까지 그녀를 살리려 한다면, 그런 이유밖에 없으리라.

“흠.”

폴룩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되면 뮬리펜을 희생하지 않는 게 좋아보였다. 일단

치프에게 돈을 안 줘도 되니까 쓸데없는 지출을 막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도 있다. 교주가 뮬리펜을 순교시킬 경우, 치프가 알샤인 교단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다. 협박하려해도 그에게는 뮬리펜을 제외하면 가족도 없다. 인질로 잡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저렇게 쉽게 금화를 포기한걸 보니, 치프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일을 망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하지만 저 노인의 말대로 하면 결정을 번복하게 된다. 교주의 말은 천근보다 무거워야 하는데 말이지.'

폴룩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집단에서, 특히나 종교 집단에서는 지도자의 권위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번복하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

폴룩스는 치프를 슬쩍 내려 봤다. 그는 거의 땅바닥과 키스를 할 만큼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폴룩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였다.

“그대의 뜻은 잘 알겠네. 허나 일이 일인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어.”

“그러면.......”

“조만간 결정이 나면 전해 주겠네. 얼마 안 걸릴 거야.”

“알겠습니다.”

치프는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뮬리펜이 살 기회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보지.”

교주는 치프와 함께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제법 긴 계단이었지만, 올라가는 동안 치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에서는 병사 한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교주의 명을 받고 치프를 침실로 안내했다. 호화스러운 방 안에 들어가서도, 그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잠이 안와.”

침대에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봐야 복잡한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킬 뿐이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방문을 열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하.”

숙소 밖. 밤공기가 유독 차게 느껴진다. 치프는 한숨을 내쉬며 정처없이 길을 걸었다.

"더럽게 넓네."

교단 자체가 거대했다. 한참을 걷다가, 치프는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다리가 아파온다.

"나도 늙었군."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정도만 걸어도 다리가 쑤시다니.

그때 뭔가가 치프의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 사이로, 새하얀 무언가가 치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치프씨!”

성녀복을 입은 뮬리펜이었다.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그녀는 빠르게 치프 앞까지 걸어왔다.

뮬리펜이 치프 앞에서 활짝 웃었다. 치프도 그녀에게 웃어주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어색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치프가 힘겹게 말했다.

“여기서 또 만나다니. 세상 참 좁아.”

“그런거 같네요. 그런데 치프씨는 어쩌다 이곳까지 온거예요?”

“그건 나도 묻고 싶은데.”

카르안과 산책을 떠난 손녀가 왜 이 먼 곳까지 왔는지. 사실 묻지 않아도 정답은 알고 있다. 그녀가 희생양이기 때문. 의식때 써야될 제물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 법이다.

“저는 어....... 급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

“나도 비슷하지. 이쪽 교주님이 내 연구가 마음에 들었나봐.”

“정말요? 축하드려요!”

뮬리펜이 그의 손을 잡아줬다. 따뜻한 온기가 손을 타고 올라왔다.

“별거 아니지. 그나저나 어디에 가나?”

“산책 좀 하려고요. 잠이 잘 안 와서........”

“하. 이것까지 비슷하군. 나도 몸은 피곤한데 눈이 잘 안 감겨.”

치프가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마음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 치프에게 뮬리펜이 말했다.

“그러면 같이 좀 걸을까요? 마침 산책하기 좋은 날씨인데.”

2.

두 사람은 인공적인 정원을 거닐었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 알록달록한 봄꽃들이 마법석의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하지만 치프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쁜 정원이죠?”

“그렇구나.”

치프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수도 있다.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득 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는다.

“지금도 예쁘지만, 여름만 되면 저어기, 저기까지 전부 푸른빛으로 물들어요. 정원에 바다가 피어난 것처럼.”

뮬리펜이 손끝으로 정원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치프는 멍한 눈으로 그녀의 손끝에 시선을 맞추었다.

뮬리펜은 그가 듣거나 말거나, 계속 정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가을이 되면 무슨 꽃이 핀다. 겨울에는 식물은 없지만, 얼음들로 장식을 한다. 이런 이야기였다.

문득, 치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솟았다. 짜증. 그리고 분노였다. 이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저렇게 밝단 말인가.

뮬리펜은 자신이 희생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태평하다니. 치프가 한마디 툭 뱉어내었다.

“어차피 네가 볼 일은 없지 않나.”

“예?”

“여름, 가을, 겨울. 정원 말이야. 너는 볼수 없을거 같은데.”

무언가 뚝 끊어지듯, 그녀의 말이 멈추었다. 발걸음도 멈췄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혹시 아시는 건가요?”

자신이 얼마 안가 순교하게 된다는 사실을. 치프가 대답했다.

“조금.”

약간 애매한 답변. 타라카르의 계약. 그것 때문에 쉽게 말할 수가 없다. 뮬리펜이 고개를 숙였다. 치프가 계속해서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을. 대체 왜.”

왜 희생을 자처했냐는 뜻이다. 뮬리펜은 치프의 말을 이해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원래 희생될 사람이 있었으니까. 제가 대신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이랑 무슨 사이인데? 친구인가? 그렇다고 해도.......”

“친구 일까요? 조금 어색하긴 한데.”

뮬리펜이 말을 흐렸다. 반면에 치프는 기가 찼다. 어색하다니, 그러면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것인가.

“젠장. 넌 네 목숨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네가 죽을 필요는 없........”

“그 아이에게는 가족이 있으니까요.”

뮬리펜이 작게 속삭였다. 치프의 말이 멈췄다. 원래 희생되어야 할 성녀, 레이츠에게는 평범한 부모님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죽으면, 가족들이 아주 슬퍼할 거예요. 정말로. 정말로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너는.......”

치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바로 그 가족이다. 너의 혈육. 하나 남은 조각.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치프는 억지로 한마디 내뱉었다.

“너는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결국 네가 죽는 거야.”

“당연히 무섭죠. 하지만 그것보다, 죽는 쪽 보다 남겨지는 쪽이 더 괴로워요.”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더니, 이어 말했다.

“그 아이의 가족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요.”

뮬리펜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처량한 미소였다.

“남겨지는 괴로움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죽는 쪽이 아닌 남겨지는 쪽.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가족이 전부 죽은 고독함은 그녀의 심장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심장 소리에 집중할수록, 그 쓸쓸함은 커져만 갔다.

그녀가 고아원에 봉사를 자주 가던 이유도 그런 것이다. 자신과 같은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젠장.”

치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와서 가족 행세를 하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에 간격이 너무 벌어졌다.

무엇보다 뮬리펜이 믿기는 할까. 실은 치프가 그녀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말이다. 괜한 의심만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뭘 해야 할 지는 알겠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뮬리펜의 희생을 막는다. 만약 교주가 무조건 뮬리펜을 희생시키려 하면, 죽어도 협력을 안 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면 교주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게 치프가 뮬리펜에게 진 ‘빚’을 갚을 방법이었다. 설령 그것을 뮬리펜이 원하지 않더라도. 도저히 뮬리펜이 희생되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죽는다면, 울어줄 가족은 여기 있었으니까.

짧은 공원 산책을 마치고, 두 사람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치프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떻게 일을 해야하나. 그 방향이 잡혔다.

“.......”

그때였다. 치프를 누군가 어둠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눈은 증오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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