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렘 깎는 노인 -->
산책. 산책이라고 해서, 단순히 주변만 들러보고 올 것은 아니었다. 일단 옷까지 살 생각이고, 그러려면 수도 한가운데까지 가야 한다.
카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수도에 와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정담이 나왔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치프와 연금술에 대해 떠들기만 했다.
환갑 노인네와 뜨거운 토론, 아니면 화사한 미소녀와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 남자라면 열이면 열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고, 카르안도 그 남자들 중 하나였다.
연금술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많지만, 카르안도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이야기만 했다. 정신적으로 지칠 수밖에. 약간의 환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을 식혀줄 재충전의 시간이.
“좋아. 움직여볼까요.”
카르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전히 문제는 옷. 치프의 은밀한 취미가 여장이 아닌 이상, 그의 집에 여자 옷이 있을 리도 없고, 그녀도 성녀복 외에 다른 옷을 준비하지 않았다.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카르안이 코트를 건넸다. 이제 겨울이 지나면서, 그의 코트도 얇고 바람 잘 통하는 여름용으로 바뀌었다. 고급 소재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입은 것 같지도 않은 가벼운 옷. 카르안은 그 옷을 뮬리펜에게 건네주었다.
긴 코트로 몸을 감싸자, 성녀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코트가 쓸데없이 긴 것도 있었고, 일단 옷 사이즈가 차이가 난다. 뮬리펜은 헐렁한 카르안의 코트를 신기한 듯 만져보았다.
“먼저 옷가게부터 들리죠.”
“아.”
뮬리펜이 살짝 입을 벌렸다. 부끄럽지만, 옷가게에 가보는 것은 처음. 사실 이렇게 남자와 단 둘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또래의 소녀들이라면 당연히 해봤을 경험들. 그것이 그녀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성녀가 되며 그런 경험 이상의 것들을 받았으니까. 불평할 생각은 없다.
카르안은 치프에게 나간다고 말한 후, 뮬리펜과 집을 나섰다. 치프는 그가 말한 대로, 둘이 밖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골방 같은 집에서 나가자, 계절이 느껴진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뮬리펜도 그 냄새가 좋은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제 곧 여름이겠네요.”
“여름이라. 세월 참 빠르군요.”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가 겨울.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워낙 정신없이 보내서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카르안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첫 번째 행선지는 당연히 옷집. 카르안과 뮬리펜은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수도에서 가장 그럴싸한 옷가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엄청나군.”
카르안이 감탄했다. 수도 아르페리움답다고 해야 하나, 알페라츠 백작령과는 그 규모가 다르다.
마치 알페라츠 백작령의 상권이 밀집된 곳을, 열배쯤 불려놓으면 이렇게 될 것 같다. 단순한 음식집 뿐 아니라, 차와 커피를 전문적으로 파는 카페들까지 잔득 있었다. 대신 대장장이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문화생활을 즐길만한 곳들.
처음 뮤프리드 대신전에 들렸을 때, 그때가 떠오른다. 물론 뮤프리드 대신전에 비해 세련미는 조금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여기 와보시지 않았습니까?”
카르안이야 수도 아르페리움이 처음이다. 하지만 뮬리펜은 이곳에 자주 와본 것 아니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구경만 해 봤어요. 이렇게 안쪽까지 온 것은 처음. 헤헤.”
뮬리펜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항상 규칙대로만 살아오던 소녀의 일탈 행위. 이런 일은 항상 그렇듯이 짜릿한 맛이 있는 법이다. 뮬리펜은 처음 경험하는 이런 자극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오늘 하루쯤은 신도 허락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소녀 안에서 피어났다.
“아하.”
그러니까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 그렇기에 이런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동화 속 공주님 같지 않은가. 카르안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저기, 손은.......”
“여기서 길이라도 잃으면 안 되니까, 가게까지만 잡아드릴게요.”
카르안의 말대로, 이쪽 주변은 엄청나게 혼잡했다. 안 그래도 붐비는데, 불어난 관광객들까지 가세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뮬리펜은 당황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르안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옷가게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으리으리해 보이는 집. 뮬리펜이 살짝 굳었다.
“괜찮아요? 저 지금 돈도 없는데.”
“상관없어요.”
카르안은 한숨 돌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비싼 옷만 파는 곳이다 보니, 그만큼 인구 밀도도 적었다.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친절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20대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이런 곳에 어울리는, 단정한 옷과 세련되게 묶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세요?”
그 점원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카르안과 뮬리펜의 옷차림과 행색을 순식간에 훑어내었다. 여기는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품위가 있는 손님만 받고 있었으니까.
‘흑룡회. 그것도 간부.’
능숙한 안내원답게, 순식간에 손님에 대한 스캔이 끝났다. 뮬리펜이 걸치고 있는 것이 흑룡회의 것. 또한 일반 조직원이 아닌 간부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뮬리펜의 순진한 인상도 파악했다. 설마 저 여자가 흑룡회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옆의 남자가 간부고, 저 소녀에게 코트를 입혀 주었겠지.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흑룡회의 간부 정도면 이 가게의 VIP가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카르안이 입을 열었다.
“간단한 봄옷 한 벌.”
“예. 이쪽으로 오세요~”
신원이 확인되었으면, 안내원은 정중하게 대접할 차례다. 간단한 봄옷 한 벌이라지만, 그 옷 한 벌의 가격도 어마어마한 것이 이 가계의 특징이니까. 가볍게 대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특유의 친근한 말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점원이 안내하는 길. 뮬리펜의 눈에 드레스 한 벌이 들어왔다. 붉은색 드레스,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게 특징이었다.
엄청나게 화려한 게, 무도회나 파티에 입고 간다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이 옷을 디자인한 사람도 그것을 노렸겠지.
“이 옷은 보석이 잔득 박혀있네요. 예뻐라.”
“손님은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이건 유명한 드워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작품입니다. 원단부터가........”
뮬리펜의 중얼거림에, 점원이 친절하게 답변해 준다. 이 옷집의 고객이 카르안이 아닌 뮬리펜임을 눈치 챈 것일까. 그 점원은 특히나 뮬리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애초부터 여기는 여성복 전문이다. 카르안에게도 빈틈없이 대해야 했지만, 뮬리펜의 기분을 업 시켜주는 게 우선이다. 안내원은 작업용 멘트를 능숙하게 흘려내었다.
“솔직히 이 드레스는 허리가 좁아서, 어지간하면 소화하기 힘든 옷이거든요. 그런데 손님은 라인이 너무 좋으셔서, 그냥 지나가기 아까울 정도에요~ 이 드레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안내원이 뮬리펜의 잘록한 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여자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교단의 담백한 말만 듣던 뮬리펜에게, 처음 겪는 아부성 멘트는 자극이 너무 강했다. 뮬리펜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런가요? 하지만 등이 조금 파여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요즘 유행이에요~ 품위 있으면서도 살짝 섹시한 거. 손님은 피부가 워낙 하얗고 깨끗하셔서, 오히려 감추기 아까울 정도인데 뭘~”
점원이 뮬리펜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부로 기분을 한껏 띄어준 후, 이번에는 살짝 친한 척을 한다. 그러면 손님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녀 나름대로의 노하우. 오랜 경력에서 우러나온 기술이었다.
‘근데 정말 예쁘시네.’
점원의 말이 전부 발린 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저 드레스는 보통 여자가 입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단정하게 기른 금발에, 잡티하나 없는 피부는, 아름다움의 여신이 직접 조각한 작품 같았다. 같은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으으.”
뮬리펜이 혼란에 빠졌다. 분명 뭔가 다른 것을 사러온 것 같은데, 저 여자의 말을 듣다보니 드레스를 꼭 사야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최면술에라도 빠진 것 같다. 온실 속 화초가 감당하기에, 닳고 닳은 점원의 말솜씨는 마술처럼 느껴졌다.
“음.”
카르안도 턱을 괴고 드레스를 살펴봤다. 화려하긴 한데, 지금 무도회장에 갈 것도 아니고 뭐 하러 저런 것을 산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의 취향도 아니었다.
“너무 정신없어.”
카르안은 한마디에, 뮬리펜의 정신도 돌아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드레스에서 떨어졌다.
“저희는 편한 옷 한 벌을 사러 온 겁니다.”
카르안이 웃으며 말했다. 뮬리펜도 카르안이 한마디 하자, 드레스를 간단하게 포기한 것 같았다.
‘끙.’
점원만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낼 뿐. 이럴 때는 보통 여자 손님만 구워삶으면 그만인데, 생각보다 뮬리펜이 카르안의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아쉬움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뮬리펜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봄옷들이에요.”
“전부 마음에 드네요.”
뮬리펜이 장난감 가게에 온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카르안이 그녀에게 귀띔했다.
“한두 벌만 골라요. 보관할 곳도 마땅히 없으니까.”
“다, 당연하죠.”
뮬리펜이 그제야 눈치 챈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옷을 한 벌 한 벌 살펴봤다.
“이게 제일 예쁜 것 같아요!”
그녀가 투피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조금 수수하고 가벼우면서도, 고급 재료를 사용했는지 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점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고객님. 처음부터 보는 눈이 남다르시군요. 어쩜 이렇게 예쁜 옷만 고르시는지~”
그대로 번역하자면 어떻게 이렇게 비싼 옷만 고를 수 있냐는 뜻이었다. 뮬리펜이 고른 것은 이 계절 옷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비싼 물건이었으니까.
점원은 뮬리펜이 왜 이 옷을 사야하나, 그 주제로 기나긴 일장연설을 끝냈다. 그리고 나서야 뮬리펜은 가격을 전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걸로 고를게요.”
“얼만데 그래요?”
“그게........”
뮬리펜이 우물쭈물하며 카르안에게 가격을 말했다. 보통 서민들은 듣기만 해도 눈이 뒤집어지게 비싼 가격이었다.
왕국의 수도, 그중에서도 고급진 옷만 파는 매장 물건이다. 공짜로 얻어 입는 물건인데, 이런 최고급 옷을 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비쌌으니까. 카르안이 뮬리펜을 보며 말했다.
“한번 입어 봐요.”
“살 것도 아닌데 입기는 조금.”
“살 거니까 마음 놓고 입으세요. 몸에 맞나 확인은 해야 하니까.”
“네에?”
“어머, 너무 멋있으시다~!”
점원이 겉과 속으로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어떻게 저런 미녀와 함께 다니나 싶었는데, 역시 돈 좀 있는 남자. 이정도로 비싼 옷도 쿨하게 사주는 사나이였다.
사실 점원도 가격때문에 과연 팔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품질이 좋은것은 맞지만, 그만큼 가격도 비쌌으니까. 하지만 카르안은 거침이 없었다.
‘저런 남자 어디 없나.’
얼굴도 괜찮고, 돈도 많아 보인다. 흑룡회의 간부라면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또 그게 매력 있지 않은가. 점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뮬리펜을 탈의실로 안내했다.
안에서 대변신을 마친 뮬리펜이 밖으로 나왔다. 치마가 짧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리를 전부 가린 성녀복에 비하면 노출도가 급상승했다. 갑자기 드러난 다리가 부끄러운 것일까. 그녀는 어색한 걸음으로 카르안 앞에 섰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옷은 몸에 맞나요?”
“예. 딱 맞아요,”
뮬리펜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어지는 점원의 칭찬.
“너~무 예뻐. 진짜 좋은 선택 하셨어요. 마침 이 사이즈도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운도 좋으시고. 호호호호.”
카르안은 금화를 줘서라도 저 점원의 오버액션을 막고 싶었지만, 덩달아 행복해하는 뮬리펜을 보며 그냥 넘어갔다. 그녀가 좋아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옷은 포장해 드릴까요?”
“아뇨. 이대로 입고 나갈 겁니다. 대신 원래 입었던 옷을.......”
“물론이죠. 예쁘게 싸 드릴게요.”
점원은 성녀복을 보고 나서야, 뮬리펜의 정체가 성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알게 뭔가, 돈 잘 쓰는 손님이면 성녀든 외계인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자, 여기 나왔습니다.”
카르안은 금화로 옷값을 계산하고 밖에 나왔다. 뭔가, 여전히 다리가 허전했지만, 뭔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녀가 카르안을 살짝 올려봤다.
“저, 죄송해요. 옷값은 꼭 갚을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개폼 잡으면서 사 줬는데, 돈 달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이정도 돈에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카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연금술사 모임에 가볼까요?”
“거기는 왜요?”
“볼거리가 많을 것 같으니까.”
볼거리도 많고, 거기에 카르안이 필요한 연금술을 가졌는데, 그가 못 보고 지나친 연금술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석이조. 카르안은 뮬리펜과 함께, 수도의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이제야 복잡한 일이 끝났네요. 조금 더 소설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