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렘 깎는 노인 -->
“푸하하하!”
치프가 뒤집어질 듯 웃었다.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카르안은 그 옆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착각을 해도 뭐 그런 착각을 하십니까.”
“으으읏!”
뮬리펜은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뭔가 잔득 억울한 게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자기가 오해한 것은 맞았으니까. 그녀가 소리쳤다.
“마, 막 이상한 소리가 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야 마법으로 시술 중이었으니까 그런 거고.”
뮬리펜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겠다.
영원히 오해로 넘어갈 수 도 있었던 일. 하지만 뮬리펜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빨간 것을 눈치챈 카르안. 그가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 결과 뮬리펜은 결국 끙끙 앓던 것을 전부 토해냈다. 그녀가 속사포로 뱉어내는 말에,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감도 못 잡던 카르안. 뒤늦게야 그녀의 착각을 이해하는데 성공했다.
뮬리펜이 괜히 토마토를 포크로 푹푹 찌르며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면 누구나 그렇게 오해할 거예요.”
“안 해요.”
“안하지. 보통은.”
카르안과 치프가 동시에 대답했다. 머리에 음란 마귀가 가득 차지 않은 이상. 보통 남자 둘이 있는데 그런 상상은 못할 것이다.
‘의외로 금욕생활이 힘들었다거나.’
카르안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수녀라고 하다 보니 한눈에 봐도 금욕적인 생활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억눌려 살다보니, 자꾸 야한 상상이 떠오른다던가 하지 않았을까?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아마도.’
카르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멀쩡한 여자를 변태로 만들어봐야 뭐하겠는가. 그냥 뮬리펜의 상상력이 이상한 방향으로 뛰어났다. 이정도로 생각해도 충분했다. 카르안이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점심이 참 맛있어 보이네요.”
“그러게. 이런 재료가 우리집에 있었나?”
치프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대부분 식사를 밖에서 해결했고, 덕분에 식량창고에는 쓸 만한 식재료가 얼마 없었다. 집만큼이나 빈곤한 창고.
하지만 그 시원찮은 식품들이 멋진 식사로 변신했다. 카르안과 치프의 감탄에, 뮬리펜이 수줍게 볼을 긁적였다.
“그냥, 고아원에서 일하다 보니까 조금 늘었어요.”
그녀가 봉사하던 곳은 고아원이나 복지관련 시설. 그런 곳에 식재료가 풍부할 리 없다. 치프의 식량창고만큼이나 재료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실력이 붙은 것이다.
축 처진 야채와 말린 고기는 스튜가 되었고, 그나마 최근에 사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는 야채와 과일들, 그것들은 전부 샐러드가 변했다. 치프가 스튜 한 스푼을 떠먹으며 말했다.
“이거 누가 연금술사인지 모르겠군. 골렘 만드는 것보다, 이게 더 신기해.”
그들은 순식간에 식사를 해결했다. 서로 힘을 많이 소모하다보니 배가 고팠는데, 맛있는 음식을 만나자 손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그릇을 정리한 세 사람.
“잘 먹었습니다.”
카르안이 뮬리펜에게 감사를 표했다. 배가 부르니 몸이 조금 나른해진다. 옆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치프가 그런 카르안을 쳐다봤다.
“식사를 했으니, 식후 운동도 해야겠지.”
“예?”
“카르안. 잠시 밖으로 나오게.”
치프가 집안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낡은 목검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먼지가 잔득 쌓여있었다. 그는 둘 중 하나를 카르안에게 건네주었다.
“수술이 잘 되었나, 확인을 해 봐야지.”
2.
목검을 든 카르안과 치프. 노인은 먼저 품 안을 뒤적였다.
“이것을 받게.”
치프는 카르안에게 작은 구슬을 건네주었다. 투명한 보석 같은데, 태양빛에 비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몸에 새겨진 것과 같은 거야. 7급 용병의 전투능력. 그것의 절반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카르안은 노인이 건네준 구슬을 잡았다. 촉감이나 생긴 것은 그냥 유리구슬 같았다. 딱히 마나가 흐르는 것도 아니었고.
‘이 안에 검술과 격투술이 담겨있다.’
카르안은 눈을 감고 구슬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마치 바코드를 읽는 것처럼 암호화된 정보가 해독되기 시작한다. 척수에 있는 회로가 그 지식을 흡수했다.
“흐흠.”
수많은 기록들이 신경을 타고 척수 한가운데, 전투회로에 집중되었다. 카르안은 순간 아케르나라에 온 첫날, 무르짐의 지식을 흡수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엄청 아팠지.’
귀에는 환청이 들리고, 온 몸이 감전된 것만 같았다. 그때가 떠오르자, 카르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하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던가 하는 느낌은 없다. 단순히 척추가 뜨끈해지는 느낌뿐. 머릿속에 뭔가 떠오르거나, 지식이 쌓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왜 그런가? 배라도 아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르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하던 것과 달랐으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등 쪽이 따뜻하기는 한데, 머리 안에 떠오르는 게 없어서요.”
“당연하지. 이제 막 전투 정보가 저장되었으니까. 이제 전투회로에 마나를 집중시키게.”
이번에 카르안은 등 쪽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이번에는 척수에 박혀있던 마나회로가, 신경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카르안이 뚱하게 말했다.
“아무 느낌도 없는데요?”
“그래?”
순간이었다. 노인이 들고 있던 목검을 카르안에게 휘둘렀다. 예고 없는 공격. 강한 힘이 실려 있지는 않지만, 냅다 휘두른 목검에 맞아서 좋을 게 어디 있겠는가. 카르안은 황급히 목검을 막으려했다.
따악!
당황하는 의식과 반대로,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목검이, 노인의 검을 정확히 막아내었다. 치프가 목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이래도 말인가?”
카르안은 자기가 해 놓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황부터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등의 전투회로 덕분일까, 자기도 모르게 헐렁하게 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려, 치프의 검을 차단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조금 싸한데요.”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네. 자주 활용하다보면 능숙해지겠지.”
단숨에 숙련도가 늘어난 기분. 카르안은 등에서 돌던 전투회로를 껐다. 동시에 몸을 잡고 있던 기묘한 긴장감도 풀어져 버렸다.
“이게 7급 용병의 감각인가.”
“그것보다도 열화 되어 있다고 봐야지.”
치프가 거들었다. 7급 용병이라면, 용병 중에서 짬밥 좀 먹은 수준. 그러니까 재능 없는 검술사가 많은 경험으로 숙련된다면, 그 정도 등급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전투회로로 옮겨진 기술이기에, 카르안의 힘은 그것의 절반 정도.
중요한 것은 그게 원래 카르안보다 몇 배는 낫다는 것이다. 그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방금 전 같은 숙련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감각이 활성화 된 것은 마나 회로를 돌렸을 때만. 카르안은 입맛을 다지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좀 더 뛰어난 용병을 부르고 싶었지만, 전부 거절하더라고. 게다가 요즘 주머니가 텅텅 비는 바람에.”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라면, 당연히 자기 검술을 숨길 것이다. 자신이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기술을 그대로 복사해 간다는데 누가 환영하겠는가. 어지간히 큰돈이 아니고서야, 움직일 리가 없다.
치프의 연금술. 그것은 검술을 몰래 훔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검술을 복제하는 상대가 전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어찌 보면 그런 점이 이 기술을 가장 큰 난점일지도 모른다.
“자네도 옷을 보니 흑룡회인 것 같은데, 거기서 적당한 부하의 무술을 복사하면 되겠군.”
치프도 흑룡회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카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다.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그에게 완전히 협력하는 사람. 단 한사람이 있었으니까.
‘카라나리.’
그녀라면, 카르안의 무리한 부탁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카라나리의 검술을 완전히 익힐 수는 없겠지만, 3급 용병의 검술 일부분을 복사해 낼 수 있다.
카르안의 근력과 합쳐진다면, 가공할 위력을 보여줄 것이다. 적어도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일은 없겠지.
‘게다가 이것을 골렘에게 삽입한다면.’
쇳덩어리 괴물들이 섬세한 검술을 펼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카르안의 적들에게 말이다.
치프의 연구는 궁극적으로 전투 시스템에 대한 연구다. 사람과 골렘은 다르고,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도 하겠지만, 연구할 가치는 있다.
“아직 가르쳐줄게 많이 있네. 안으로 들어가지.”
‘지금 배워둬야 한다.’
휴가는 길지 않다. 흑룡회에 복귀하기 전까지, 가능하면 그의 기술을 전부 익혀야했다.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3.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카르안과 치프는 지하실에서 서로의 연금술을 지도했고, 뮬리펜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간간히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뮬리펜 성녀님이 조금 걱정되네요.”
“왜?”
“하루 종일 저러고 있잖아요. 딱히 뭔가를 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카르안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가 치프의 점심 저녁을 차려주기 위해 이곳에 왔을 리는 없다. 카르안의 말에, 치프도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이상하긴 하군. 알샤인 교단에서 추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치프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알샤인 교단이 마음먹고 뮬리펜을 추적하려 했다면, 최소한 치프의 집에 누군가가 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자네가 무슨 일인지 알아봐주게.”
“하지만 지금은 제 연금술을 알려줄 시간인데요.”
“상관없어. 도저히 입을 안 열면, 같이 산책이라도 나가던가.”
“산책?”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우울해지는 법이야.”
치프가 말했다. 카르안은 그런 노인을 쳐다봤다.
둘은 교대로 연금술에 대해 지식을 나누었다. 이제 막 치프의 강의가 끝나고, 이번에는 카르안의 차례.
하지만 치프는 카르안의 지식보다, 뮬리펜의 상태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조금 과할만큼 신경쓰는것 같기도 했지만, 카르안은 긴말 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아.........”
뮬리펜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다. 그녀는 창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심각한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단순히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카르안은 그녀의 옆에 살짝 앉았다.
“뮬리펜 성녀님.”
“예?”
그녀가 카르안을 느릿하게 돌아왔다. 잠을 못 잤는지 조금 피곤한 기색이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딱히 걱정거리는........”
“뭐든 털어 놓으면 편해지는 법입니다.”
카르안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뮬리펜은 그런 카르안을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그 뒤로 말이 없다. 그러니까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 카르안은 창틀을 톡톡 두드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같이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요.”
“저희 둘이서요?”
뮬리펜이 토끼눈을 뜨며 카르안을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작게 웅얼거렸다.
“전 집 안이 좋은데.”
“무슨 방구석 폐인도 아니고. 좀 나갑시다.”
카르안이 말에 뮬리펜이 뜨끔했다. 자꾸 집 안쪽에 있다 보니까, 어쩐지 밖에 나가기가 귀찮아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게으름이 몸에 붙은 것일까.
“밖에 나가면 저희 교단에서 잡으러 올 지도 몰라요?”
“옷의 바꿔 입으면 모를 텐데요.”
“성녀가 성녀의 옷을 벗으면 안되는 거예요.”
뮬리펜이 살짝 웃으며 옷을 펼쳐보였다. 하얀색과 금빛으로 수놓아진 수녀복이 태양빛을 머금었다.
“좋은 핑계네요.”
중얼거리는 카르안을 보며, 뮬리펜은 여전히 생글거렸다. 하지만 그 웃는 표정 그대로,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마치 잊고있던 악몽이, 현실속으로 기어올라온 것처럼.
“성녀님?”
뮬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그늘진 얼굴로 웃음을 지을 뿐.
한참을 가만히 있던 뮬리펜이 대답했다.
“하긴, 하루쯤은 괜찮겠죠. 사복을 입는 것도.”
“성녀님이 그런걸 막 어기셔도 되는겁니까.”
카르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뭔가 종교적으로 엄격할 줄 알았는데, 뮬리펜은 쉽게 수락해 버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옷을 입는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요.”
쓸쓸한 목소리. 카르안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뮬리펜이 하는 농담치고는 조금 어둡지 않은가. 하지만 카르안이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뮬리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르안에게 작은 손을 건넸다.
“그러면 오늘 산책, 잘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