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렘 깎는 노인 -->
“계획 같은 것은 딱히 없어요. 그냥, 조금 신전 밖에 있고 싶어서.”
뮬리펜은 별일 아닌듯한 말투였다. 카르안도 더 깊게 묻지는 않았다. 미심쩍은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카르안에게 크게 피해가 갈 일은 없었다. 둘을 바라보던 치프가 말했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지.”
“잠시만요.”
뮬리펜은 치프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얼굴이 많이 부은 상태. 술집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맞은 곳이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치유의 마법이면 금방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치프가 그녀를 막았다.
“아니, 괜찮아.”
“잠깐이면 되요.”
“마음만 받겠네.”
치프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대체 왜 회복 마법을 거부한다는 말인가. 치프가 한숨을 쉬었다.
“내 몸에는 특별한 마나회로가 새겨져 있어. 혹시라도 치유 마법을 잘못 받는다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네.”
납득하지 못하는 뮬리펜에게, 치프가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뮬리펜도 어쩔 수 없었다. 죽을 만큼 치명적인 상처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아.”
치프가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조금 어색했다. 그는 서둘러 말했다.
“자, 그러면 오늘은 밤도 늦었으니, 빨리 먹고 잠이나 자자고. 내일 아침부터 뭐라도 해보지.”
“알겠습니다.”
카르안과 뮬리펜이 끄덕였다. 치프는 고기를 씹을 때마다 죽는 소리를 내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늦은 저녁, 별들도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어두운 밤이었다.
2.
“그래서 척수에 회로를 새겨 넣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다음날 아침, 치프는 지하실에 박혀 카르안에게 연금술을 전수했다. 뮬리펜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골똘히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카르안은 여전히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당장은 연금술이 중요했다.
치프가 종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인간의 해부도였다.
“자, 바로 여기.”
척추 부분. 여기에 치프가 말한 전투 회로를 새겨 넣는다. 이물질 같은 것을 넣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
“조금 위험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렇지도 않아. 나도 내 몸에 시술을 마쳤네. 아주 간단한 일이지.”
그가 상의를 벗고 카르안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어제 당한 상처 때문에, 반창고가 군데군데 붙어있다. 그는 등 뒤를 힘겹게 가리기며 말했다.
“자, 내 척추 쪽을 만져보게.”
카르안이 그 곳에 손을 대자, 과연 미비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카르안은 골렘을 만져봤기에 알 수 있다. 그 흐름이 골렘의 것과 닮아있다는 것을.
“정말이군요. 그런데........”
어제 술집에서는 맥없이 쓰러지지 않았나. 전투 시스템이라면 뭔가 반격도 하고,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치프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이가 먹으니까 몸이 안 따라줘.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죄다 때려눕혔을 텐데.”
단순한 근력 부족이다.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전투 회로’는 말 그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네. 한번 새겨 넣는 게 끝이 아니니까. 더 발달시킨다면, 그 성능도 늘어나겠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전투 시스템이 진보할수록, 그 새로운 시스템을 계속 회로에 추가할 수 있어. 한마디로 끝없이 진화하는 셈이지.”
“흠.”
카르안이 생각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아직 이 전투 시스템은 미완성인 셈이다. 무한정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것.
“지금 내 등에 새겨진 것은 7급 용병의 검술과 격투술이라네. 그리고 그 용병의 검술은, 이것으로 익혔어.”
치프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흰 천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그는 그 천을 치웠다.
사람만한 기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엄청나게 크긴 했지만, 조금 조잡해 보인다.
“무슨 의료도구같이 생겼네요.”
카르안이 중얼거렸다. 마치 수술실에 있는 심박수를 재는 기계 같다. 열 개도 넘는 선이 본체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전선을 끝은 오징어 빨판처럼 생겼다.
치프가 그 전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을 몸에 붙인 다음에, 검술과 무술을 펼치면 된다. 그러면 기계가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전부 분석해주지. 그런 다음에는.”
치프가 기계의 버튼을 조작했다. 덜컥 소리와 함께 작은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알사탕만한 구체가 둘러 나왔다.
“이렇게 정보가 압축되어 나오지. 한번 시술만 받고 나면, 요만한 걸로도 즉석에서 새 검술을 익히는 게 가능해.”
카르안은 기계를 자세히 살펴봤다. 커다랗기는 한데, 여전히 좀 조잡한 감이 없지 않은가. 상당히 허름해 보인다. 그 시선을 눈치 챈 치프가 작게 말했다.
“사실 빵집 오븐을 개조해서 만들었거든.”
“예?”
“껍데기만 말이야. 돈이 없어서........”
뭔가 상당히 불안했다. 하지만 워낙 치프가 궁핍했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카르안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저런 작은 구슬에 한 사람의 검술이 전부 압축돼서 나오는 게.”
“그렇지?”
노인이 즐거운 듯 웃었다.
“자네 말대로, 참 신기하긴 하지. 한 무술인이 평생 갈고닦은 솜씨가 이런 작은 구슬 하나라니. 어쩐지 허무하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 이런 기계 하나로 검술을 베낀다는 게 가능합니까?”
의문이 안 들 수가 없다. 검술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나.
그 복잡한 과정을 단순히 저런 빨판 몇 개 붙이고 검을 휘두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노인도 그 점은 이해하고 있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기술적 한계로 절반 정도. 무술을 베껴내는 것은 그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되네. 게다가 하루 종일 검을 휘둘러야 간신히 분석되고. 여러 애로사항이 존재하긴 하지.”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 싶었다. 카르안은 그 말을 들으며, 기계를 꼼꼼히 살폈다.
기술적 한계라기보다는 재정적 한계 같다. 아무래도 없는 돈으로 연구를 하다보니까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겠지. 카르안이 제대로 기계를 완성한다면, 조금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자네 몸에도 마법진을 새겨볼까.”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나. 당장 시작하지.”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프가 혼자서 몸에 새긴 것을 보아서, 그의 연금술은 스스로도 시술이 가능한 것 같았다. 카르안은 조금 더 연구한 후에 자기가 새겨 넣고 싶었지만, 어차피 지우고 새로 새기면 그만 아닌가.
보안할 점이 많았다. 어제 치프가 뮬리펜의 치료를 거부한 것. 그는 ‘특별한 마나회로’라고 말했지만, 그게 치프가 만든 전투회로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회복 마법을 받으면 전투회로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
실컷 싸우는 도중에, 회복 마법 한번 맞았다고 전투력이 상실될 수도 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렇게 섬세한 부분을 단단하게 바꿔야 한다. 치프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한번 새겨도 해제는 가능하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말이지. 게다가 다른 연금술사나 마법사의 마법으로는 한번 입력된 것을 지우지 못해. 오직 스스로만 이 마법진을 해제.......”
“잠깐만요.”
카르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제 저녁에 분명, 회복 마법에 마법진이 훼손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거짓말일세.”
카르안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게 더 이상하다. 만약 전투회로에 문제가 없다면, 뭐 하러 치료를 거부했는가.
“그냥. 부담주기 싫어서. 그 애 한테는 말이야.”
“네?”
카르안은 어이가 없었다. 왜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치료를 거절하는가. 치료 마법이 신성력을 소모하기는 했지만, 그 뿐이다. 크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치프가 뮬리펜에게 도움받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치프는 말을 돌리려는지, 카르안에게 다가왔다.
“빨리 시술이나 받게.”
“그리 급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준비할게 있습니까?”
카르안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시술을 하라고 해도, 뭘 준비해야 된단 말인가. 치프는 속 편하게 말했다.
“딱히 없어. 그냥 저기 편안하게 누워 있으면 된다.”
그가 시술대를 가리켰다. 남자 한명이 누우면 꽉 찰것 같은 크기의 석판. 카르안은 별 말 없이 그곳에 몸을 눕혔다. 치프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상의는 벗어야 뭘 새기던가 말든가 하지. 일단 등짝, 등짝을 봐야 척추에 뭘 하지 않겠나.”
“진작 말씀을 하시죠.”
카르안이 상의를 벗었다. 곧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하도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몸에 제법 근육이 붙어있었다. 상의를 벗고 다시 석판 위에 누웠다.
치프의 손바닥에 마나가 서렸다.
“조금 따끔하겠지만, 별로 크게 아프지는 않으니까 마취까지 할 것은 없을 거야.”
“그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살을 자르는 외과적인 수술은 아니지만, 마나로 척수에 직접 마법진을 새기는 것이다. 제법 아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치프는 스스로 그 시술을 완료했다. 정말 아파서 기절할 정도였으면, 어떻게 복잡한 시술을 완료했을까. 나름대로 견딜만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카르안은 몸에 힘을 뺐다.
치프의 마나가 가느다란 실이 되어 카르안의 등을 파고들었다. 주사에 찔리든 듯한, 따끔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윽.”
“엄살은.”
치프가 코웃음 치며 마나를 계속 운용했다. 그의 말대로 못 견딜 고통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실 같은 게 등을 파고든다. 도저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후우. 힘들군.”
카르안은 얼굴을 찌푸린 채 버텼다. 마침내 마나의 실은 척수까지 파고들었다. 뭔가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 조금 따뜻한 느낌도 들었다. 치프가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지만, 뭐 잘 되겠지.”
치프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하며 마나를 운용했다. 그 소리를 듣자 카르안도 식은땀이 줄줄 흘렸다. 척수를 직접 손대는 만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 정신 나간 시술을 자기 몸에 해대는 치프도 보통은 아니었다. 카르안은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그는 그냥 눈을 감고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등 쪽에서 춤을 추던 실들이 스스륵 빠져나갔다. 시술이 끝난 것이다. 치프가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일어났다.
“후, 간만에 하니 손이 떨려 죽는 줄 알았군.”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하하하하. 어차피 다쳐도 뮬리펜 성녀님께서 전부 고쳐주실 것 아닌가.”
과연 신성력으로 반신불수를 고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르안도 온 몸이 땀에 푹 젖었다.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고된 작업.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끼이익-
그리고 지하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두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뮬리펜이 보였다.
“저, 끝나셨나요?”
“예. 조금 힘들었지만.”
“아, 예에.........”
뮬리펜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뭔가 엄청나게 부끄러운 듯한 모습. 카르안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점심이 다 되어서........”
“성녀님이 직접 하신건가!”
치프가 호탕하게 웃었지만, 뮬리펜은 말을 잊지 못했다.
실은 점심은 한참 전에 완성했다. 하지만 쉽게 지하실 안쪽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녀가 처음 문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뮬리펜이 귀를 짝 달라 붙이자, 안에서의 기묘한 대화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아, 아.........”
“조금만 더 참게. 얼마 안 남았어.”
“하지만 딱딱한 게 안쪽에서, 자꾸 꿈틀거리니까 신경 쓰여요.”
“괜찮아. 나만 믿게. 그나저나 간만에 하니 힘이 부치는군. 흐흡!”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지?'
커다란 오해를 한 뮬리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아픈 듯한 신음소리. 숨이 찬 듯한 치프의 목소리. 그녀는 후다닥 위로 도망쳐 버렸다.
‘어, 어떻게 하지?’
그리고 한 시간 뒤, 그녀는 다시 지하실로 향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장면이기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의문의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얼마나 하려는 거야?!’
뮬리펜이 경악했다. 한 시간도 넘게 저러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오, 오해였겠지. 설마 한 시간도 넘게 그런.......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 게다가 그 둘은 남자인데........’
생각해보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아침부터 그런 음탕한 일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게다가 그 둘은 남자.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뮬리펜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상의를 벗고 땀을 뻘 흘리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대체 연금술을 연구하는데 옷은 왜 벗는다는 말인가. 그것도 한명도 아니고 둘이서.
‘오해같은게 아니었어!’
뮬리펜은 머리가 쭈뼛 섰지만, 최선을 다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둘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두 사나이의 (학구적으로) 열띤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나저나 솜씨가 정말 좋으시더군요.”
“그렇지? 내가 평생 이것만 연구한 사람이야.”
“처음에 들어올 때는 아프고, 막 느낌이 이상했는데요. 나중에 가니까 안쪽이 뜨거워지면서......”
“그, 그만해요!”
뮬리펜의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카르안과 치프는 서로 당황했다.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했나? 도저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두 남자의 의문 가득한 표정을 뒤로하고, 뮬리펜은 씩씩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ㅜㅜ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수요일(19일)까지는 1일 1연재를 해야될것 같아요.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네요.....
수요일이 지나면 1일 2연재로(지금도 잘 지켜지지는 않는것 같지만)돌아갑니다. 그 뒤로는 시간이 조금 널널해 지니까, 지금 연재가 늦어진 만큼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항상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