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렘 깎는 노인 -->
모두들 긴장했다. 심지어 러슬라이조차. 카르안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자. 한 번 더 붙어봐.”
사이프카르가 새 목검을 던져주었다. 카르안은 날아오는 목검을 낚아채었다.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는 거칠게 웃으며 러슬라이에게 달려들었다. 러슬라이조차 긴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방심하다가는 당할지도 모른다. 카르안의 끝없는 잠재력. 그것이 두려울 정도.
러슬라이와 카르안이 다시 맞붙었다. 목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타악-!
“합!”
따악!
“하압!”
딱!
삼십분 후, 모두들 그 둘의 혈투를 보고 있다. 수련 따위는 잊은 지 오래. 그만큼 희귀한 광경이니까.
“너.......”
사이프카르도 떨리는 눈으로 카르안을 쳐다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싸움 더럽게 못하는구나.”
“.........”
카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 위에 작게 솟아오른 혹을 말없이 문지를 뿐이었다.
힘은 정말 좋은데, 반사 신경이나 센스가 세기말급 이었다. 머리를 때리면 머리를 막고, 연계해서 다른 곳을 공격하면 그제야 허겁지겁 막는다.
검로(劍路)는 비효율의 극치였고, 약간의 페이크, 허초에도 전부 반응해 버린다.
전형적인 초보의 모습. 카르안은 약이 바싹 올라서 러슬라이를 공격했지만, 그는 유유히 카르안의 공격을 피하고 허점을 가격했다.
“형님도 사람이셨구나.”
“하긴,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지.”
“크흠.”
카르안이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러자 조직원들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사이프카르가 그런 카르안을 한심한 눈으로 봤다.
“야. 이놈은 답이 없다. 그냥 검술 말고 다른 수는 없나?”
삼십분째 싸우는데, 그냥 같은 장면을 한 50번 정도 돌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똑같은 공격에 똑같이 당한다. 뻔한 공격에도 카르안은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건 그냥 재능이 없는 것이다. 힘은 좋으니 실컷 훈련시키면 뭔가 가닥이 잡히긴 하겠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검술은 체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사이프카르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전투 감각이 없는데, 다그쳐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의 눈에 카르안은 안 될 놈 이었다.
어거지로 밀어 붙이기보다는, 다른 길을 찾는 게 현명했다.
“그러면 어쩌나.”
사이프카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카르안은 러슬라이가 건네준 얼음 팩을 머리에 올렸다.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서.........”
“뭔 소리야. 너 잘못되면 우리 조직이 휘청 이니까 그런 거지.”
흑룡회에 카르안이 벌어다주는 돈은 상당한 수준이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카르안이 없어진다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카르안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도, 전부 조직을 위한 것이다.
“하아, 모르겠다. 그러면 나중에 수도나 한번 가봐.”
“수도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일은 아니다만. 2주일쯤 후에 알펜왕국 연금술사 정기모임이 있어. 3년마다 하는 건데, 아마 왕국에서 하는 연금술 학회 중에서 규모는 가장 크다고 봐도 되지.”
말하던 사이프카르는 스스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게다가 너 휴가도 안 썼잖아.”
뮤프리드 대신전으로 떠난 것을 제외하면, 카르안은 휴가를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일이 너무 널찍했으니까.
보통 저녁 먹기도 전에 일이 끝난다. 게다가 그 저녁 전까지도 여유 시간이 많이 남는다. 포션이야 아침에 얼른 만들면 그만이고, 영업 쪽도 재력가들과 협상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
사이프카르가 일을 더 시키려 해도, 원료 공급이 한계가 있고, 또 너무 많이 만들어봐야 처리하기도 힘드니까. 공장처럼 포션을 찍어낼 필요가 없는 것.
일이 끝나면 느긋하게 벨트리의 골렘책을 보면서 시간을 때운다. 부 지부장이라 눈치 보일 것도 없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딱히 휴일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덕분에 그도 모르는 사이에 휴가가 착착 쌓였다. 그리고 카르안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딱히 눈치 보며 휴가를 아낄 필요도 없다.
사이프카르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카르안에게 제안한 것. 수도까지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장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게 도움이 될까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확실해. 가만히 앉아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사이프카르는 팔짱을 꼈다. 주변에는 기합을 지르며 검을 수련하는 조직원이 대다수. 사이프카르는 그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답은 스스로의 발로 찾는 거야. 한번 가봐. 예상치 못하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카르안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은 연금술의 재능뿐. 그렇다면 근접전이라는 약점도 연금술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검술을 배우는 것이지만, 자신의 몸이 문제였다. 끔찍한 센스. 스스로 생각해도 검술의 고수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연금술이라고 골렘과 포션제작만 있는 게 아니니까.’
카르안이 포션제작의 달인이고, 골렘을 다루는 솜씨도 어지간한 명인 급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알펜왕국에는 수많은 연금술사가 있다. 분명 그 중에서도 재야의 고수들이 많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수들이 나타나는 정기모임.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갈 생각이 들었어?”
“예. 세상을 좀 넓게 봐야죠.”
어차피 휴일에 딱히 할 일도 없다. 무엇보다 수도는 처음 가보는 곳. 정 얻을게 없으면 휴가답게 관광이라도 즐기다 오면 그만이다.
“자, 그러면 바로 휴가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아직 2주일이나 남았는데요.”
“그러니까 준비해야지. 내일부터 조금 힘들어 질거다.”
사이프카르가 밝게 웃었다.
“설마 탱자탱자 놀다 휴가를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휴가도 팍팍 꽂아줬는데, 너 없을동안 팔아먹을 놈들은 만들어둬야 되지 않겠냐.”
“끄응.”
카르안은 고개를 저으며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날부터 사이프카르가 재료를 잔득 대령할 것이다.
아무래도 휴가 때까지는 바빠질 것 같다.
2.
2주 뒤, 마법사길드.
카르안은 장거리 텔레포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이 준비되는 시간동안, 그는 빈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이주일. 카르안은 평소보다 어느 정도 바쁘게 움직였고, 덕분에 문제없이 휴가를 쟁취할 수 있었다.
잠깐 바빴던 생활, 그 복잡한 시간이 끝나고 얻은 휴식이었기에. 차가 조금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음?”
그렇게 마법을 준비하던 중. 문이 열리고 여자 한명이 들어왔다. 그냥 여자라면 신경을 껐을 태지만, 그가 아는 얼굴이라면 그렇게만 할 수도 없었다.
긴 금발, 순백의 수녀복. 꼭 토끼를 의인화시킨 것 같은 여자.
‘뮬리펜?’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간만에 보는 얼굴이다.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길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뭔가 곤란한 일이 있는 것일까. 마법사와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마치 풀죽은 토끼처럼. 힘차게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축 처진 어깨.
뮬리펜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다시 길드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해요?”
“으힉!”
카르안이 뒤에서 속삭이자, 그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굉장히 독특한 리액션. 뮬리펜은 정말 놀랐는지 눈에 약간의 눈물까지 맺혔다. 그녀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카, 카르안씨!”
그녀는 사탄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카르안을 쳐다봤다.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알거 없잖아요.”
뮬리펜은 근심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상당히 급한 일이 있다. 그녀는 카르안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흑룡회의 부 지부장. 아마 이 남자라면 자신을 도와줄 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문제였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을 싫어했고, 특히 관계가 어색한 카르안에게는 더욱 더.
그녀는 카르안을 지나쳐 나가려 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쯤은 상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궁금해 하죠.”
“글쎄요. 하지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 일수도 있고.”
뮬리펜의 냉랑한 태도에도, 카르안은 웃으며 말했다. 뮬리펜이 고민했다.
‘이야기 정도라면.’
그녀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고민하던 뮬리펜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알샤인 교단에는 큰 일이 한번 일어났다. 괴생명체를 잔득 만들어 엘프들을 공격했고, 그 공격은 실패했다. 강신한 알샤인이 수많은 괴 생명체, 사도들을 멋대로 소환한 것이다.
그 사도들은 무르짐은 손에 큰 피해를 입었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알샤인이 소환을 해제하고 교단 내로 돌려보냈지만, 이미 많은 수가 줄어든 상태.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도들을 땅 파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희생’, 그리고 막대한 신성력을 필요로 했다. 알샤인 교단은 사도들을 대량 생산하는데 엄청난 금화와 시간, 노력을 모두 소모했다.
그리고 야심차게 공격한 엘프, 르네키르다 침공. 성공할 뻔도 했으나, 알샤인 덕에 화끈하게 말아먹었다.
그 파탄을 일으킨 주인공이 모시는 신인 덕분에, 알샤인 교단에서는 화풀이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 모르겠지만, 교단에서 큰 손해가 생긴 것 같아요.”
뮬리펜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걱정되는 것이겠지. 대충 속사정을 아는 카르안과 다르게, 그녀는 교단 내의 깊은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제로, 저희 알펜 왕국에 있는 성직자분들이 큰 회의를 갖기로 했답니다.”
실패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큰 투자에 실패했으니, 알샤인 교단은 그 값을 치룰 시간이다. 그리고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규모의 축소.
“잘못하면, 알페라츠 백작령에서 신전 건축이 취소될 수도 있어요.”
“그건 큰일이겠군요.”
알샤인이 몸집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알샤인 교단에 적대하는 자들은 이 틈을 노릴 것이다.
덩치가 크면 클수록, 얻어맞기도 쉬운 법. 알샤인의 선택은 나름대로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뮬리펜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당장 뛰어가서 막아야 한다. 이번 회담은 그녀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문제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가서 회담에 참석하면 된다. 순간 카르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혹시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일까.’
뮬리펜은 순진하고, 가끔 멍한 짓을 하기는 하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 올곧고 심지가 견고하다. 그런 그녀도 당연히 참가할 회의에 참가할지 고민하고 있다. 보통일이 아니리라.
무슨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일까. 카르안이 모르는 복잡한 사정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저 성녀에게 빚을 만들어 놓아야 하나.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뮬리펜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성녀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카르안이 살짝 밀고 들어왔다. 정보를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힘겹게 속사정을 털어놨다.
“돈이.”
“네?”
“갈 돈이 없어요오.........”
“그게 무슨........”
카르안이 말을 흐렸다. 성녀쯤 되는 사람이 차비가 없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게, 자금난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지원이 끊겨서.”
“끊겨서?”
“돈은 알아서 만들어 오라고 하니까. 그것도 일주일도 안남은 시간에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점심값 아낀다고 봉사 활동하는 곳에서 빵을 몰래 먹다가 걸리고, 일자리를 찾아보려니까 일주일만 일하는 곳은 공사장밖에 없다고 하고.........”
“아이고.”
“밥도 못 먹고 밤에 걷고 있었는데, 좀 이상해 보이는 주황머리 남자랑, 대머리 근육질 남자가 큰돈을 벌게 해준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그런데 막 이상한 옷을 입히고 이상한 곳에 들어가라고 해서 도망쳐 나오고.......”
카르안은 왠지 그 좀 이상해 보이는 남자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러슬라이와 제이크.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조직을 위해 힘쓰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니, 뮬리펜은 그 두명한테 협박당한 기억이 있지 않나. 카르안이 국수를 뒤집어 썼을때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따라가다니, 어지간히 급했던것 같다.
뮬리펜이 울먹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신성력을 인정받고, 성녀가 되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을 것이다. 그런 소녀에게, 정글이나 다름없는 사회는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카르안은 기침을 한번 하더니, 뮬리펜에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부족합니까?”
“20실버 정도........”
장거리 텔레포트가 워낙 고가이다 보니까 그런 것이다. 카르안이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 정도쯤은 내줄 수 있습니다.”
“저, 정말?”
“정말로. 그래서 어디로 가시나요?”
“알펜 왕국 성직자들이 전부 모이니까요. 적당한 곳은 한곳밖에 없잖아요.”
뮬리펜이 말했다.
“수도. 아르페리움이에요.”
========== 작품 후기 ==========
저번 화 댓글에 카르안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짧게 말씀드립니다.
카르안의 처음 근력은 12였습니다. 건강한 성인 남자 평균이 10 정도이고, 카르안은 노동자였기 때문에 조금 높은 수치. 12였지요. 지금 카르안의 근력은 그때의 3배쯤 강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마나는, 처음에 1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카르안이 마법 수련 같은 것을 평생 해본 적 없기에, 정말 기본밖에 없었죠.
보통 신참 마법사가 마나량 10 정도입니다. 베테랑이라고 할수 있는, 알페라츠 백작령 연금술길드의 4급 연금술사 리젝트가 150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고, 박제된 계절 편에서 등장한 흑룡회 간부 메락은 700대 후반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죠.
다만 메락은 흑룡회 간부인 만큼 규격 이상의 마나를 가지고 있던 것이고, 리젝트급 실력자도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유독 카르안의 마나량이 많이 증가한 이유. 무르짐이 처음부터 마나에 관련된 강화포션들 위주로 준비해놨기 때문입니다. 연금술사에게는 마나만큼 중요한게 없으니까요.
참, 다음화는 아침까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