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투루스의 자식들 -->
“당신!”
카라나리의 눈에 불꽃이 튀겼다. 가볍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진다. 아르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
“아르나, 빨리 이리로 와.”
“하지만........”
“지금 당장!”
카라나리가 소리쳤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무서운 모습. 그녀가 아르나에게 이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다. 아르나는 울먹이며 카라나리에게 돌아왔다. 타브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하, 너무 소리치면 애가 울잖아요.”
“무슨 일이죠.”
카라나리의 싸늘한 말투. 그녀는 거의 검을 뽑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타브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난 거죠.”
타브는 양 팔을 들어올렸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 그때만큼은 카라나리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 선량했으니까.
‘그때 크게 부상을 당했었는데.’
사이프카르와의 싸움 이후, 그는 거의 반죽음 상태로 실려 갔다. 그 뒤로는 카라나리도 들은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완벽하게 회복된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둘째 치고.’
카라나리는 그를 노려봤다. 타브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시나요?”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만.”
회복은 그렇다 쳐도, 그의 말투부터 태도, 모든 게 변했다. 마치 친절한 성직자라도 된 것처럼. 모두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입가에는 계속 웃음이 머물러있다. 그런 타브가 손뼉을 마주쳤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타브가 카라나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아르나를 등 뒤에 숨겼다. 하지만 타브는 그녀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그동안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미 늦었겠지만. 사과드리고 싶어요.”
“네에?”
“아하하. 역시 빈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타브씨.”
이 정도면 의심하기도 뭣하다. 타브는 정말 변해버렸다. 카라나리는 그를 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별일 아닙니다. 다만 제 몸을 바칠, 그런 위대한 신을 찾았거든요.”
‘종교가 생긴 것인가?’
카라나리가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말을 이었다.
“저를 수렁 끝에서 끌어올려주신, 그런 분이십니다. 그 뒤로 저는 새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어요.”
카라나리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봤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데, 무작정 내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신이라면, 뮤프리드를 말하는 거겠지.’
그를 구원해 줬다면, 의술의 신 뮤프리드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컷 얻어맞고 제정신을 차린 것인가. 어쩐지 맥 빠지는 결말이지만.
“아, 그런데 혹시 카르안씨도 찾아뵐 수 있을까요?”
“카르안씨는 왜 찾으시죠?”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카르안씨는........”
카라나리는 카르안의 위치를 말하려다, 얼른 입을 닫았다. 뭔가 이상하다.
타브는 순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 하지만.
‘눈이 굳어있다.’
카르안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깊은 살기가 느껴졌다. 카라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
타브는 카라나리를 쳐다봤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눈. 그가 입을 열었다.
“아하하! 그렇습니까. 이거 실례했네요. 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
그는 웃으며 토끼를 땅에 내려놓았다. 흰색의 작은 생명체는 후다닥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면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의외로 그는 별 말없이 카라나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 타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에는 제대로 사죄드릴께요. 나중에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
“카라나리!”
타브와 카라나리. 둘이 동시에 멈춰 섰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카라나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카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늦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말이야.”
그는 손에 작은 약병들을 들고 있었다. 아르나의 약이다. 그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타브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이런, 카르안씨. 오랜만입니다.”
타브가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과 같은 순한 미소가 아니었다. 소름끼치는 웃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찾고 있었어요.”
2.
“음?”
카르안이 타브를 노려봤다. 뭔가 이상한 느낌.
카르안도 타브를 보자마자 경계부터 했다. 하지만 타브는 카르안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카르안씨. 어서 오세요. 꼭 뵙고 싶었습니다.”
카르안이 타브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를 뵙고 싶었다니.
그와 카르안 사이에는 딱히 관계라고 할 게 없었다. 과거에 카르안이 카라나리를 용병으로 고용했고, 그 때문에 타브의 눈이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것조차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나.
‘저놈이 독버섯이라도 먹었나.’
카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타브가 점점 카르안에게 다가왔다.
“만약 당신을 찾지 못했으면, 신께서 크게 노하셨을 겁니다.”
타브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얼굴까지 조금 붉어져 있다. 전쟁 통에 잃어버린 첫사랑을 10년 만에 본다면 이런 표정일까. 그는 환의에 가득 차 있었다.
카르안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평소에 건방지던 놈이 갑자기 저러니까,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의원이라도 좀 가보지 그래.”
타브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순간, 카르안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라나리도 검을 뽑았다.
타브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흘러나왔기 때문. 흑색의 연기는, 주변을 뿌옇게 물들였다.
“흐흐흐.”
하얀 로브는 순식간에 타버렸다. 마치 불붙은 휴지조각처럼. 그가 검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심장을 그분께 바친다면, 신께서도 즐거워 하시겠죠.”
“정신이 나갔군.”
카르안이 혀를 찼다. 그리고
콰앙!
타브의 몸이 폭발했다. 뿌연 안개가 순간적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그 다음 나타난 것은, 더 이상 타브가 아니었다. 아니,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진한 검은색 껍질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갑옷은 입은 기사처럼. 그 사이로 붉은 빛이 혈액처럼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당신을 살려 드릴 수 없습니다.”
타브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나, 빨리 집으로 가."
카라나리가 아르나에게 말했다. 여기는 위험하다. 아르나까지 지킬 자신이 없었다.
위협적인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카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한판 붙고싶다 이거로군.”
그의 발밑에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네놈이 무슨 신을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감사해야겠어.”
그 마법진 안에서, 은색의 기사 한명이 솟아오른다.
붉은 노을도, 그의 은빛 광체를 훼손시킬 수 없었다. 고고한 기사. 2미터가 넘는 거체의 기사는. 눈에서 푸른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기사. 카르안이 씨익 웃었다.
“나도 이놈을 빨리 시험해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했거든.”
2미터의 덩치. 괴물로 변한 타브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컸다. 하지만 타브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 정도로, 그분께서 주신 제 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타브도 손을 폈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의 팔이 검처럼 변했다.
마치 사마귀와 같은 형상.
“크합!”
타브는 기합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엄청나게 날렵했다. 마치 그 혼자 시간이 2배속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제가 막겠습니다.”
그가 뛰어오른 곳을 향해, 카라나리도 날아올랐다. 검에 오러가 서렸다.
단순한 오러가 아니다. 붉은색 오러. 그녀의 스승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카라나리에게는 화룡검황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둘도 없는 동방 검법의 고수. 그리고 흑룡회의 보스에게 살해당한 검사.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카라나리는, 이미 스승의 검법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다만, 하도 바쁘게 사느라 단련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살 돈에, 여동생의 약값까지 챙겨줘야 하는데 언제 검술을 연마하고 있겠는가.
검이라는 것도 실전뿐 아니라, 형을 익히고 마나를 쌓을 수련기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카라나리에게는 실전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올라갈 수 있는 실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 지금 그녀의 검과는 다르다. 최근 한 달 정도, 그녀는 집중적으로 검을 연구했다.
타브와 카라나리. 둘이 공중에서 맞붙었다.
과거에는 둘의 실력이 비등비등했다. 굳이 승패를 나누자면, 약간 타브가 우세한 정도일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카라나리의 검술을 한껏 물이 올랐고, 타브는 검게 타락했다.
타브의 칼날이 카라나리에게 쏟아진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 오러와 타브의 칼날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다. 카라나리는 피하지 않고 힘싸움을 걸었다.
타브의 칼은 손이고, 카라나리의 검은 그저 검이다. 서로 부딪힐수록, 칼이 깎여나가는 것보다는 손이 잘려나가는 게 손해겠지.
카라나리의 검은 무사한 반면, 타브의 칼날은 이가 나가고 그 사이로 피가 흘렀다.
“캬악!”
타브는 더 이상 사람 같은 기합도 넣지 않았다.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그는 양 손을 미친놈처럼 휘둘렀다.
‘이건.’
비록 정신이 썩었기는 했지만, 타브는 훌륭한 검사였다. 오러를 사용할 만큼의 수련을 쌓은 검사. 그만큼 검술도 날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긴 움직임. 짐승의 발악과 다를 게 없다.
“크윽!”
양 손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단순하기는 한데, 그럼에도 위협적이다. 손이 너무 빠르다.
카라나리가 한번 막을 동안 그는 두 번 공격한다.
“그래도.”
카라나리의 몸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한끝차이. 스쳐지나간 칼날에 작은 혈흔이 생겼지만, 그뿐이다. 카라나리는 차분하게 한 번의 힘을 모았다.
지이잉-!
무언가 가속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벌겋게 달궈졌다. 오러를 모은 한 번의 일격.
타브도 위협을 느꼈는지, 양 손으로 몸을 방어했다. 하지만
“천(穿)”
콰앙!
검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일격에 타브의 양팔, 검은 갑옷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는 공중에서 힘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오.”
카르안이 박수를 쳤다. 그야말로 깔끔한 일격. 그가 나설 틈도 없었다. 카라나리는 사뿐하게 착지했다.
“고작 이정도군요. 당신은.”
그녀가 타브를 내려다봤다. 차가운 경멸.
그때였다. 추락한 타브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엄청난 빠르기로 돌진했다. 4개의 다리로 돌격하는 모습은, 기형적이기까지 했다. 마치 바퀴벌레같은 모습.
카라나리도 얼른 그를 막으려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타브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그가 노린 것은 카라나리가 아니었으니까.
카르안. 그를 노리고 있다.
“너는.......죽어줘야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카르안의 골렘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달려오는 타브를 향해 육중한 주먹을 휘둘렀다. 한 대만 맞아도 산산조각 나리라.
“느려터진놈!”
타브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있는 힘껏 점프를 해서 주먹을 피한 것이다.
그는 골렘의 뒤에 착지했다.
“안 돼!”
카라나리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카르안을 지키던 골렘을 넘어서자, 카르안은 완전한 무방비로 서 있다. 비록 큰 타격을 입고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타브는 위험하다.
카라나리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늦는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뒤져라!”
타브가 자신 있게 소리쳤다. 양 팔의 칼날 반쯤 잘려나갔지만, 아직 남은 부분이 있다. 카르안은 갑옷은커녕 칼 한 자루 없는 상황.
그는 완벽하게 승리를 예감했다. 저 골렘이 뒤를 돌아보기 전에, 카르안의 목을 따버린다! 그는 카르안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가 하나 간과한 것이라면, 저 골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위이잉-
사람이 할 수 없는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할수 있다는 것이다.
골렘의 몸통이 180도 돌아갔다. 처음에 날린 주먹의 힘을 살린 채로 말이다. 첫 번째 주먹이 빗나간 순간부터 골렘은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타브가 골렘의 뒤에 착지했다 싶은 순간. 이미 몸을 완전히 돌리는데 성공했다.
파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타브가 튕겨나갔다.
골렘은 마치 파리를 잡는 것처럼 타브를 후려쳐 버렸다. 골렘은 비록 느리지만, 그 힘만큼은 압도적. 저 육중한 손바닥의 파워는 어지간한 철퇴 못지않았다.
“.......!”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타브. 그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는 산책로를 벗어나 길가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졌다.
“뭐야! 무슨 소리야!”
“이, 이건 뭐지?”
요란한 소리 덕분일까,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타브가 떨어진 곳을 향하던 사람들은, 끔찍하게 박살난 타브를 보며 숨을 삼켰다.
“허억!”
“처음부터 끝까지 싱거운 놈이네.”
카르안이 혀를 찼다. 뭔가 검게 변하기에 대단한 힘을 쓸줄 알았는데. 그냥 파리처럼 나가 떨어지는게 아닌가. 골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너무 쉬워.”
“이상합니다.”
카라나리라 고개를 갸웃했다. 카르안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왜?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순간, 검은 연기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너무 쉬웠어요. 이상할만큼”
타브가 쓰러졌던 자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