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투루스의 자식들 -->
“카르안씨!”
카르안이 대장간 밖으로 나가자, 한 여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긴 금발의 소녀가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레이아라. 여기는 무슨 일이야?”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어요.”
레이아라가 밝게 웃었다. 금발이 별빛에 반짝였다.
이 엘프는 마법사 길드에서 치료받고 난 후, 알페라츠 백작령에 눌러붙어 버렸다. 이유는 간단.
“어차피 떠돌이 인생이었으니까. 여기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뛰어난 활 솜씨가 있었기에, 백작령에서 용병으로 지내는 것도 문제없었다. 이미 그녀는 추방된 뒤부터 용병생활을 했었으니까.
무려 4급 용병. 카라나리 못지않은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서 택한 직업은 용병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는 기능성은 내다버린,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있다. 새로운 직업 때문이다. 레이아라 옅은 화장을 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카르안씨. 저녁 드셨어요?”
“아니, 아직 안 먹었다.”
“그러면 '저녁 노을' 로 와주세요. 오늘 제 연주가 있으니까.”
무희. 레이아라는 일주일쯤 용병을 하더니, 술집 매니저에게 스카웃을 받고 무희가 되었다. 실로 화끈한 진로변경.
무희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주변에서는 천한 직업이라며 비웃기도 하는 일. 하지만 레이아라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바쁜데.”
“아~ 저 저번에도 바쁘다고 하시고, 저번에도 바쁘다고 하시고, 이번에도 바쁘다고 하고!”
레이아라가 볼을 부풀렸다. 가끔 레이아라가 카르안에게 그녀가 일하는 곳으로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매번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 카르안이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저녁노을은 표두회쪽 가게잖아. 내가 거기를 어떻게 가냐.”
흑룡회에 요정 몽로가 있다면, 표두회에서는 저녁노을이 있다. 요정은 아니지만, 술과 음식을 함께 파는 고급 술집.
그만큼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곳이고, 거기서 일한다면 무희로써 인생은 활짝 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지금 레이아라의 귀와 목에는 보석이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가짜 보석 따위가 아닌, 마법까지 걸린 장신구다.
일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저런 물건을 걸치고 다니다니. 어쩌면 카르안 못지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레이아라가 아주 잘나가는 무희가 된 것은 말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흑룡회와 표두회의 관계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상대 조직의 이인자가 온다면 표두회 입장에서도 곤란하겠지. 불편한 자리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둘이 친하잖아요?”
최근 함께 토저보화를 얻은 후로는, 표두회와의 마찰도 많이 줄었다. 동맹은 진작 끝났지만, 그 잔해라는 게 남아있는 법.
원래 사람이라는 게 한번 피땀 흘려 호흡을 맞추다 보면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함께 오우거와 수호령을 상대한 조직원들은 그 유대감이 생겨났다. 덕분에 길거리에서 만난다해도 인상부터 쓰는 일은 많이 줄었다.
카르안도 잠시 고민에 빠졌다. 너무 거절만 하는 것도 미안했으니까. 오늘 당장 골렘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올까.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산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레이아라에게 잠시 후 만나자고 한 뒤, 대장간 안으로 돌아갔다.
2.
“어서 오십시오!”
저녁노을. 카르안이 술집의 문을 열자, 남자 한명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급 술집답게, 앞쪽부터 사람이 나와 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카르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 당신은.......”
카르안도 마찰을 대비했다. 흑룡회 코트는 벗어두고 왔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 정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는 웨이터다. 말이 좋아 웨이터지, 그냥 인상 좋은 조직원.
그리고 표두회의 조직원이라면, 카르안의 얼굴쯤은 단숨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주변에 있던 다른 웨이터들이 다가왔다. 그들도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 명은 벌써 안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카르안이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손님으로 온 것이다만.”
“그, 그런가, 그렇습니까.”
웨이터들이 버벅거린다. 존대와 반말이 섞인 기묘한 말투. 카르안을 쫒아내야 하나, 그래도 손님으로 받아야 하나. 영 아리까리했다.
“여기 흑룡회 놈이 찾아왔다고!”
그때 옆에서 한 남자가 뛰어왔다. 카르안을 보자마자 달려갔던 웨이터, 그가 불러온 것이다. 그 사내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운이 없는 놈이군. 감히 이 표두회의 검은 늑대. 록프올님께 걸리다니. 어디에 있나!”
당당하게 외친 사내와, 카르안의 눈이 마주쳤다. 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너는.........”
카르안이 잠깐 생각에 빠졌다. 어디서 본적이 있는 얼굴이다. 곧 그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네 녀석은 그때, 그 부대장이로군.”
표두회의 부대장 록프올. 그러니까 토저보화 사건 때 그를 습격한 장본인이었다. 온갖 허세를 다 부리더니, 러슬라이의 꿀밤 한 번에 힘없이 쓰러진 사내. 워낙 강렬한 존재감을 (5초 정도) 풍겼기에 카르안도 기억할 수 있었다.
표두회의 검은 늑대가 입을 열었다.
“너, 너, 너, 이놈이 여기는 왜 왔나?”
“그냥 밥 먹으러 온 거다. 호들갑 떨 것도 없지.”
카르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싸울 마음도 들지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소동은 그로써도 피하고 싶다.
록프올은 잠시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부하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 카르안이 부 지부장이니, 급한대로 부대장인 록프올을 불러왔다. 그런데 그가 당황하고 있는 것 아닌가.
록프올은 침을 삼켰다. 부하들이 그를 의심한다. 그런데 큰소리 치자니 카르안이 너무 무섭다. 록프올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곧 그는 답을 찾아내었다.
록프올은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아! 뭐, 식사정도라면 상관없지. 부디 마음껏 즐기다 가시게.”
그는 관대한 척 카르안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솔직히 카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록프올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지만. 다행이 카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얘들아. 뭐하냐. 특등석으로 안내해 드려라.”
“괜찮겠습니까. 형님.”
“손님으로 온 것이라면 환대해 줘야지. 진정한 검객이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법이야.”
록프올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조직원들도 감탄했다. 적이지만 웃으며 맞이한다. 거친 사나이의 표본 아닌가.
“역시 부대장님!”
“우리 같은 놈들이랑 그릇이 다르군요!”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빨리 좀 안내해 드려. 제발.”
“실례했습니다. 카르안님. 이쪽으로 오시죠.”
웨이터 한명이 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에서, 카르안은 바로 특등석으로 안내 될 수 있었다.
카르안은 웨이터가 건네주는 담배 하나를 물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서비스일까. 전부 담뱃잎으로 만들어진 고급 담배. 카르안이 입에 그것을 물자마자, 웨이터는 불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카르안은 숨을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이 조직은 어떻게 아직도 안 망한 거지? 거참 신기하군.’
그는 슬쩍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는 록프올이 부하들에게 ‘하드보일드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떠들고 있었다. 안쓰러워서 한번 속아준건데, 괜히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3.
카르안이 안내받은 자리는 무대쪽 자리. 명당이라면 명당이리라.
“그러면 카르안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르안은 메뉴판을 눈으로 읽었다. 가격대가 높기는 했지만, 몽로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카르안은 적당한 식사와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또각- 또각-
카르안의 귀에 하이힐 특유의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대 쪽이다. 그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카르안 뿐 아니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그 것을 본 다음 사람도, 그 뒤에 있던 사람들도 차례로 무대에 시선을 돌렸다. 무대 위로 한 여인이 올라오고 있다.
“저 아이가 새로 온 무희라는군.”
“엘프라는데 정말인가?”
사람들의 작은 웅성거림. 곧 레이아라가 그들에게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잠깐 숨을 멈추었다.
“흠.”
카르안도 숨을 잠깐 멈추었다.
상당히 노출이 많은 드레스다. 붉은 드레스는 옆이 트여 허벅지까지 훤히 보이고, 어깨도 전부 드러나 있다. 색기가 넘치지만, 그럼에도 경박해 보이지 않는 것은 레이아라가 가진 분위기 때문이리라.
로브로 몸을 둘둘 감고있을때는 몰랐는데,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놓으니까 정말 아름답다. 군살 없는 매끈한 다리. 하얀 피부, 엘프 특유의 신비로운 눈동자까지. 사람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요정이 따로 없네.”
“엘프는 처음 보는데. 정말 아름답구나........”
레이아라는 손님들을 향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따로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고,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려는 듯. 레이아라는 그녀의 몸만 한 하프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긴 장갑을 벗었다. 동시에 흰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프 위를 향했다. 곧 맑은 하프 음이 술집 안을 울렸다. 레이아라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눈을 녹아내리고 꽃은 피어나는데
저는 겨울 속에 묶여있네요
감겨진 눈. 꿈의 파편들은
유성의 끝자락을 따라 유영할까요
다만 눈꺼풀을 올리고 숨을 내쉬면
황량한 백색. 쓰라린 추위.
이런 영원한 백야에서
가녀린 소녀를 안아줄 분은 어디에 있나요
소녀의 창을 열어줄 날. 그 날이 온다면
나, 그 품에 안겨. 내 이름을 바치리.
느릿한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침만 꼴깍 삼켰다.
의도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아라는 목의 낙인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가느다란 쇄골을 타고 올라오는 추방의 낙인. 슬픈 듯 물기 가득한 눈동자.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처연한 표정.
가사처럼 슬픔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묘하게 순종적인, 안아줄 낭군님을 찾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술집에 있던 남자들은 가슴에 불이 붙을 수밖에. 카르안이 주변을 둘러보자, 정말로 몇 명의 남자들은 입 닫는 것도 잊고, 침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아라의 노래실력은 상당했다. 타고난 고운 목소리. 전문적인 가수들도 어려울법한 고음도 쉽게 소화했다. 조금씩 기교를 섞어 부르자, 그야말로 천상의 목소리가 따로 없다.
덤으로 하프 연주에도 전혀 빈틈이 없었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느릿한 곳을 택한 것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뛰어난 실력.
짝짝짝짝!
사람들의 요란한 박수소리가 술집 안을 채웠다. 마치 음악회에 온 것 같았다.
원래 술집에서 연주라는 게, 사람들이 편히 대화를 나누기 위한 배경음악 정도였다. 가끔 유명한 음악가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보기 드문 엘프가 등장한다는 기대감. 레이아라의 반쯤 벗은 듯한 옷. 하늘에서 내러온 천사 같은 목소리가 삼박자를 이루었으니, 조금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레이아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카르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작게 윙크했다.
‘어때요. 반할 것 같지?’
‘........조명이 참 예쁘구나.’
‘우씨.’
카르안과 레이아라가 눈빛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아라는 흔들림 없이 다음 곡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노래 없이 하프 연주뿐. 그녀가 무슨 인간문화재 명창도 아니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힘들 테니까.
적당히 무난한 템포의 무난한 곡이다. 술집에 어울리는 밝은 곡. 그제야 사람들은 레이아라에서 시선을 때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녀도 계속 시선을 받으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선택한 곡. 단 아직도 몇 명은 그녀에게서 눈을 때지 못한 것 같았지만.
때마침 맥주가 나왔다. 카르안은 맥주를 한 모금 꼴깍 마셨다.
“세상일 참 모르겠군.”
얼마 전까지 서로 싸우던 소녀가 이제는 무희가 되어있다. 그것도 특급. 카르안은 레이아라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남은 술을 전부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