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투루스의 자식들 -->
“여기에 있겠군.”
야심한 밤. 카르안은 홀로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바스락거리는 수풀소리는 위협적이게까지 들렸다.
“누구 한명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카르안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크라도 튀어나오면 큰일이다. 여기가 그다지 위험 지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괴물들이 위험지대 안에서만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우연히 지나가던 오크나 고블린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위험한 것이다.
“안되겠다 싶으면, 골렘이라도 만들어보지.”
30초 정도라면, 어지간한 오크들 정도는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두운 산길을 계속 걸었다.
한번 와봤던 곳이다. 손에는 작은 램프 뿐,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달빛에 의지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카르안은 곧 이 세계, 아케르나라에 와서 처음 깨어난 곳에 도착했다. 쉽게 알 수 있었다. 무너져버린 거대한 나무, 그 나무의 조각난 시체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일종의 이정표역할을 해줬다.
“젠장, 치우는 것도 한세월인데.”
카르안은 투덜대며 나무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지금은 봄이다. 결코 추운 날씨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이상하게도, 주변보다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살짝 몸을 떨며 나무토막 한 가운데에 일어섰다.
카르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나무의 근처에 왔을 때부터, 흔한 풀벌레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오싹한 공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카르안은 골렘의 핵을 떨어뜨렸다. 핵은 땅 속에 스며들어, 천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쿠르릉-
2미터 크기의 골렘. 그 거대한 시종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평소의 모습과 다른 점이라면, 팔이 4개나 달렸다는 것. 그리고 손바닥이 유독 크다는 것이다. 카르안이 지시했다.
“저 중간, 저쪽을 전부 파내.”
무너진 나무의 중간, 카르안은 그 쪽을 가리켰다. 카르안의 명령에 골렘이 팔을 움직였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한번 움직일 때마다 나무토막이 뭉텅이로 없어진다. 포크레인이 따로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손을 넣었던 곳도 나무의 몸통, 이쯤이었다. 아마 중요한 물건이 있더라도 그쪽에 있겠지.
골렘의 활약에 힘입어, 순식간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골렘은 열심히 나무토막을 파냈다. 하지만 기대하던 물건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마나가 떨어진다. 그는 한 덩이만 더 치우고 쉬자고 생각했다.
달칵-
“심봤다.”
카르안이 씨익 웃었다. 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뻑뻑한 나무토막이 아닌, 매끈한 유리병이 손에 잡혔다.
“생각 대로였군.”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병들을 꺼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5개. 포션들은 여러 가지 색을 띄고 있었다. 그는 들고 온 가방에 포션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S급 포션이 있다면 하나밖에 없을 리가 없겠지.”
원래라면 포션 하나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단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물건. 연금술사 무르짐의 지식이 담겨있던 나무치고는, 포션이 영 어정쩡했다.
근력과 체력, 마나를 전체적으로 올려주는 S급 포션 하나라. 무르짐이 준비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 무르짐은 신까지 압도적으로 박살내버린, 인간 이상의 무언가였다.
만약 이 나무를 그가 준비했다면, 포션 여러 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무르짐은 카르안이 자신의 지식을 얻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카르안이 그의 지식과 경험을 얻어내었기에, 무르짐이 그의 몸에 강림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런데 카르안의 마나량을 확인한 무르짐은, 그가 미리 준비해둔 포션을 전부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력부터 체력, 마나량이 너무 적다. 그가 지식의 나무에 숨겨 놓은 포션을 전부 마셨다면, 그 정도로 낮은 능력을 가졌을 리가 없다.
그 때문에 카르안에게 이 자리에 오라고 알려준 것.
‘그때 조금 더 침착하게 살폈어야 했다.’
갑자기 나무가 무너지는 바람에,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에는 이 포션이 뭐하는 것인지도 몰랐으니, 손을 넣었던 구멍 안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결과적으로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S급 포션들은, 나무토막 밑에 묻어버렸다.
'그나마 병이라도 단단해서 다행이지.'
S급 포션의 병들은, 하나같이 튼튼했다. 이 나무가 무너졌음에도 금하나 가지 않았으니까. 하긴, S급 포션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정도 쯤은 당연한 것인가.
“먼저 하나만 마셔봐야겠다.”
카르안은 가방 안의 S급 포션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병에는 진한 녹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 녹즙 같은 물건의 효능은 마나량의 증가. 처음 마셨던 포션과는 다르게, 오직 마나량 하나만 늘려주는 것이다. 카르안은 우선 손등을 한번 만졌다.
근력: 25
체력: 19
물리저항력: 11
마법저항력: 2
마나: 26 (-20)
골렘 때문에 마나가 꽤나 줄어있었다.
‘마나를 조금 사용하기는 했는데. 별 문제 없겠지.’
카르안은 포션을 목으로 넘겼다. 뭔가 텁텁한 느낌이 식도에서 느껴지고, 짜고 쓴 맛이 혀를 괴롭혔다. 한마디로 더럽게 맛없었다.
“개똥으로 만든 스프 같군.”
카르안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병을 탈탈 털어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 먹어야 한다. 결국 그는 병을 싸악 비웠다.
가만히 있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처음 먹었던 S급 포션과 다르게, 이 포션은 심장 쪽에서 서늘한 기분이 느껴진다.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던 첫 포션과 대조적이다.
그 기운이 안정화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손의 문신을 문질렀다.
근력: 25
체력: 19
물리저항력: 11
마법저항력: 2
마나: 66 (-20)
과연 S급. A급이나 그 이하의 포션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치를 보여준다. 단숨에 마나량 40이 늘었다.
“좋은데. 골렘 사용시간을 더 늘릴 수 있겠어. 아니면 아이언 골렘이라도 만들어볼까.”
이게 끝이 아니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4개의 포션이 남아있다. 지금 당장 이것을 전부 마시지는 못한다. 몸에 무리가 가니까. 하지만 시간을 나누어 이걸 전부 섭취한다면, 마나 뿐 아니라 전체적인 능력이 크게 상승하리라. 카르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더 찾아보자.”
그는 골렘 2기를 동시에 소환했다. S급 포션을 마시면서, 마나량이 늘어난 만큼, 마나도 그만큼 회복되었다. 골렘을 운용한 마나가 다시 생겼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다. 오늘 온 김에 해결하는 게 좋았다.
카르안은 그가 손을 넣었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나무토막 아래 묻혀있던 포션 2개를 더 꺼낼 수 있었다. 그 두 개는 전부 진한 녹색을 띄고 있다.
“이제 철수해야겠지.”
더 이상 포션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설령 있더라도, 이 포션을 전부 소모하고 대규모로 골렘을 소환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무르짐은 왜?’
이 지식이 담긴 나무를 만들었을까. 또, 왜 카르안을 도와준 것일까.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질문의 기회는 없었다. 카르안은 포션을 잔득 얻은 기쁨과 함께,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산을 내려갔다.
2.
그 시간 알페라츠 백작가. 알페라츠 기사단의 단장 타브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작은 촛불 몇 개만 켜 둔 채로. 그 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이 서 있었다.
타브. 기사단장 타브 알페라츠는 그 노인에게 말했다.
“약 더 가져와.”
“도련님.......”
“더 가져오라고.”
“안됩니다.”
“내 말이! 개 좆으로 들리냐!”
“크윽!”
분노한 타브의 주먹이 노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비록 오러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맨 주먹이었지만, 노인이 감당할 주먹은 아니었다. 묵묵히 서 있던 노인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으으........도련님. 참으셔야 합니다. 주인님 몰래 물건을 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주먹으로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동정과 걱정.
그 노인은 타브의 집사였다. 그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준 노인. 주색에 빠진 아버지와, 명품과 사치에 미친 어머니보다, 오히려 부모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는 묵묵히 타브의 ‘조금 심한’ 투정을 받아주었다.
집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타브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도련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도련님 같은 축복받은 분은 세상에 얼마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셔야 합니........”
“흐흐, 영감. 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타브가 얼굴을 들었다. 어둠속에서, 촛불의 빛에 타브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그러진 얼굴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타브가 절규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흉측한 얼굴. 심각한 사고를 당한 듯한 얼굴이다.
전부 사이프카르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타브는 그때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타브는 사이프카르에게 패한 그날, 그는 마법사 길드에서 즉시 치료를 받았다. 돈은 충분했고, 기사단의 신속한 대처 덕분에 시간도 늦지 않았다. 보통 상처라면 충분히 치료 받을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상대가 사이프카르였다는 점.
악마화된 사이프카르의 팔은, 상대의 치유를 막아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파괴적인 독기가 진득하게 묻은 주먹. 그 주먹은 타브의 팔과 다리, 얼굴과 내장까지 전부 박살내 버렸다.
마법사 길드에서도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했다. 목숨을 살려놓을 응급 처치 정도만 가능했을뿐.
그 심각함을 눈치 챈 기사들은 얼른 뮤프리드 대신전에 장거리 텔레포트를 신청했다. 의술의 신, 뮤프리드의 사제들은 이런일의 전문가니까.
장거리 텔레포트는 원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타브는 백작가의 아들. 게다가 곧 죽어버릴 것 같은 환자다보니 절차쯤은 무시했다.
만약 그가 바로 치료를 받았으면, 최소한 지금처럼 온 몸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들의 대처는 신속했고, 타브는 곧 뮤프리드 대신전에서 무사히 치료를 받을 것만 같았다.
백작가의 권한으로 텔레포트도 빠르게 신청했다. 그대로 이동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백작가의 권한은, 그의 영지 안에서만 유용했다. 뮤프리드 대신전으로 이동한 기사들은 곧 절망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뭐! 남는 사제가 없어?”
“기다리셔야 합니다. 저기 줄 긴거 안 보이세요?”
피켓을 들고 있는 사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마침 뮤프리드 대신전은 성형 열풍. 사제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젠장. 도련님은 부상자라고! 저런 얼굴이나 고치러 온 연놈들이 아니야!”
“음. 치료는 다른 곳에서 줄을 서야 하는데........”
기사의 외침에, 사제가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도 긴 줄이 있었다.
치료를 받는 줄도 만만치는 않았다. 병이나 부상을 당한 온갖 귀족들은 뮤프리드 대신전을 선호했다.
의술의 신 뮤프리드답게, 이곳 사제들의 치유마법은 어떤 백마법사보다 뛰어났으니까.
평소에도 감당하기 힘든 환자가 오는데, 지금은 성형 쪽으로 많은 사제가 빠져나갔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결국, 타브는 한참 뒤에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비싼 돈을 쏟아 부은 덕분에 최고 수준의 치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온 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흉하게 변했다. 거기다가 비틀렸던 팔 한쪽까지 쓸 수 없게 되었다. 덤으로 내장까지 많이 상해서, 밥도 잘 먹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타브는 끝없이 추락했다. 빠지지 않던 검술 연습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집 밖을 나가는 일도 없었다. 오직 술과 담배에 의존했다. 그러다가 이제 마약까지 발전했다.
더 슬픈 사실은, 타브가 그 꼴이 난 것을 슬퍼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타브가 사라진 것을 좋아했다.
그는 툭 하면 젊은 여자를 끌고가고, 그것을 막는 여자의 아버지를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농민들과 아낙네들은 술집에서 작은 잔치까지 벌일 정도. 그 소식을 우연히 들은 타브는, 몸을 떨 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도련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도련님 편입니다.”
“영감. 정말인가? 내 얼굴을 보고도?”
타브가 작게 웃었다. 그는 집사에게 망가진 얼굴을 들이대었다. 그 어떤 시녀도, 충실했던 부하도 그가 변해버린 얼굴을 들이대면 한걸음 물러섰다. 겁 많은 시녀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 비명의 댓가는 상당히 비쌌지만. 그녀는 타브의 칼에 죽었다.
이 집사도 비슷할 것이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고 하더라도, 질린 표정을 짓겠지.
“예. 어떻게 변해도, 도련님은 도련님입니다.”
하지만 그 늙은 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깨를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
분노로 떨리던 타브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영감........”
타브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손이 떨려왔다. 그는 마약의 후유증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진 상태다. 타브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 더 이상 검도 쓸 수 없고, 얼굴도 몸도 괴물처럼 변해버렸어.”
“제가 백마법사를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분명 세상은 넓으니까, 뮤프리드의 사제들보다 뛰어난 마법사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야. 젠장. 나는 틀렸다고. 전부 다.........”
그의 눈에서 투명한 슬픔이 방울져 떨어진다. 그동안의 행동이 미친 듯이 후회되었다. 뒤늦은 참회. 하지만 그 눈물도 결국 자신의 몸이 망가졌기 때문에 흘리는 것이다. 만약 다치지 않았다면, 평생 흘릴 일 없을 눈물.
“젠장, 젠장! 젠자앙!”
그의 머릿속에 여러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이프카르, 그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 도저히 복수할 용기도 생기지 않는다. 그녀를 떠올리는것 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그는 서둘러 과거에서 빠져나갔다.
또 한명의 여자. 한명의 여자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있었다.
“카라나리.”
“도련님?”
갑자기 타브가 멍하니 말을 멈췄다. 집사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타브는, 아무 말 없이 입 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래. 그녀가 있었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주홍빛 촛불만이 그의 일그러진 입가를 비춰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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