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떼 -2 -->
정적. 무르짐은 카라나리를 무심히 내려 봤다. 알샤인처럼 폭력적인 아우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 괴물같은 알샤인을 소멸시킨 게 무르짐이다.
그가 손 한번만 까딱해도, 카라나리는 주변에 쓰러진 기사들과 같은 꼴이 날 것이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무르짐을 올려다봤다.
“아, 이거 참. 간만에 몸을 풀었더니 개운하군.”
무르짐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냉정한 표정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불바다. 무르짐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게 굳어있나? 자네한테 무슨 짓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시게.”
무르짐은 그렇게 말하며 박살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전해줘야 할 말도 있고 말이야. 지금 이 친구는 의식이 없거든.”
무르짐이 자신을 가르키며 말했다. 카르안. 그를 말하는 것이었다.
“전해줄 말씀....... 입니까.”
“그래. 이제 강신도 더 유지하기 힘들고. 아무래도 이 하늘의 문은 완벽하지 못한 것 같아.”
그는 손 안에서 빛나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강신이 영 불안정하다. 힘도 완벽하게 쓸 수 없었고, 카르안의 몸에 완전히 동조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도라면 엘프놈들 치고는 잘 만든 건가. 아무튼.”
무르짐이 계속 떠들어대었다. 하지만 카라나리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행이다.’
카르안의 몸에 무르짐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한 가지 공포를 느꼈다. 어쩌면 카르안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가슴 한쪽이 서늘한 순간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무르짐은 카르안의 몸에서 곧 사라진다고 한다. 마음이 놓였다.
그 안도감 때문에, 무르짐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르안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짝 가슴이 찌릿하고, 따뜻하며 눈가가 시큰거린다.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
“자네, 카르안의 동료인 것 같은데, 지금부터 하는 말을 카르안에게 잘 전해주게........ 듣고 있지?”
“아, 네.”
“나 참, 정신 좀 차리게. 중요한 이야기야.”
그렇게 말한 무르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멍한 표정의 카라나리. 뺨이 약감 붉었다. 무르짐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예?”
“자네, 이 카르안이라는 남자를 걱정한 것인가?”
“그건........”
“아니, 말하지 말게. 말 안 해도 다 알아. 얼굴에 전부 적혀있는데 뭐.”
푸근하게 웃는 무르짐, 알샤인을 상대할 때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 카라나리는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그랬지.’
어려운 고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카르안을 떠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다. 하지만 자꾸만 카르안이 걱정된다.......
고민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뭔가를 깨달은 표정.
“예. 카르안씨는 제 소중한 사람입니다.”
“어? 진짜로?”
무르짐이 과장되게 놀라는 척을 하였다. 반쯤 장난이었는데, 진짜 무슨 사이였나? 카라나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령 몸이 불타 사라진다 해도. 영혼의 끝자락까지 전부, 전부 바치고 싶습니다.”
“어, 어. 어어......”
이 무슨 박력 넘치는 고백인가. 무르짐은 체면도 잊고 몸을 베베 꼬았다. 본의 아니게 사랑의 큐피드가 된 기분. 이때는 전설의 연금술사고 나발이고 그냥 나잇값 못하는 아저씨 같았다.
“그, 그렇구먼. 근데 사랑 고백은 내가 아니라, 이 청년이 돌아온 다음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주변은 엉망이고 그녀도 흙과 먼지 등으로 엉망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비장미가 있다.
저런 예쁘장한 소녀의 헌신적인 고백을 받는다면, 남자 열에 스물은 심장마비로 사망했겠지. 무르짐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문제는 대상이 잘못된 것. 지금 카르안의 의식은 깊은 어둠속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르짐에게 카르안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무튼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그러니까.......”
“카르안씨가 없다면, 제 여동생은 죽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세상에 없을 은인이십니다.”
“잠깐, 여동생? 은인?”
“예. 그분이 제 여동생의 치료제를 만들어 주고 계시니까요.”
무르짐은 벙찐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희대의 천재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 그러니까.”
“만약 카르안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여동생의 몸에.........”
“그게 끝인가? 뭐 다른 건 없고?”
“.........?”
카라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 무르짐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다.
“됐어. 그냥 내 말이나 전해주게.”
김빠지는 결말. 지루한 인생에서, 사랑이야기는 무르짐의 권태를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의 핑크빛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크흠.”
아무튼 이제 농담할 시간을 끝났다. 무르짐은 카라나리를 보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방금 전까지 장난스러운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에게 전하게. 처음 나의 지식을 얻은 곳으로 다시 가보라고. 홀로 그곳에 가서 깊게 조사해보라고.”
“지식을 얻은 곳?”
“그냥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의 문신을 문질렀다. 카르안의 손에 있는 작은 문신. 그의 능력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형편없는 힘으로 용케 살아남았구나.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는 힘들어질 거야. 악투루스의 자식들이 올 것이니까.”
카라나리는 작게 입을 벌리고 앉아있었다. 이야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잠시 고민하던 카라나리는 조용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하나도 이해가 안 됩니다. 지식을 얻은 곳이며, 악투루스라니.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게 좋을걸? 두 이야기 전부 다.”
“하지만.”
“전자를 알면 나한테 죽었을 거고, 후자를 알면 악투루스에게 죽을 거야. 아마도.”
무르짐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카라나리는 더 이상 깊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지자, 무르짐은 웃으며 말했다.
“다 농담일세. 농담. 손 안 댄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튼 더 강신을 유지하다가는 이놈의 몸이 더 못 버틸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무르짐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하늘의 문은 내가 회수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카라나리가 대답했다. 무르짐은 그 뒤에 덧붙였다.
“너희들이 감당 못할 물건이야. 특히 그 흑룡회의 악마가 이 물건을 얻으면 참 귀찮아지거든. 그냥 하늘의 문은 못 본 것으로 하게. 자네나 카르안, 둘을 위해 하는 말이야.”
그렇게 말한 무르짐의 몸이 밝게 빛났다. 강렬한 빛. 카라나리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잠시 빛나던 무르짐의 몸은, 곧 빛을 잃었다. 그의 손에 있던 하늘의 문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대신 카르안이 눈을 떴다.
“하, 머리아파 죽겠네.”
“카르안씨?”
“아니, 무르짐이다. 강신이 잘 풀리지 않는군.”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어떻게 알았나?”
카르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르짐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몸을 찾은 카르안이 농을 치려했지만, 카라나리는 걸려주지 않았다.
무르짐 특유의 인간답지 않은 모습, 그 묘한 위화감이 사라진 것이다. 무르짐은 농담도 하고 당황도 했지만, 사실 인간이라기에는 조금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카라나리가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럼 설마.........”
무르짐은 카르안이 의식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방금 전처럼 장난을 칠 수도 없지 않은가. 정말 의식이 없었다면 무르짐이 강신한지도 모를 것이다.
카르안도 카라나리가 당황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무르짐 저놈이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다 보고 있었다.”
카르안은 의식을 잃지 않았다. 단지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뿐.
의식은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이 자기 몸을 움직인다. 그것도 엄청난 힘을 있는 대로 써대면서. 난생 처음 해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통각까지 같이 느껴졌단 것이다. 그래서 알샤인의 빛의 창을 맞았을 때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창으로 살을 찢은 다음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는데, 그 고통을 참으며 온갖 재주를 부리는 무르짐이 신기할 뿐이었다.
“아무튼 정말 죽을 뻔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카르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도 억울한 게, 그냥 처음부터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했으면 이 사단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싸운 것 아닌가.
“그나저나 저 여자는 어떻게 하지.”
카르안은 레이아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여기까지 안내해준 엘프. 그녀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카라나리의 표정이 식었다. 배신자를 살려줄 필요는 없었다.
반면 카르안은 복잡한 표정. 살려두자니 배신한 것이 문제였고,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자니.......
‘마지막에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지.’
게다가 여기까지 온 것도 저 엘프 덕분이다. 비록 전부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물건이 많았다.
무엇보다 묻고 싶은게 조금 있다.
카르안은 결심한 듯 레이아라에게 걸어갔다. 카라나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살려주시려는 것일까.’
아무튼 카르안의 포션 제조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게다가 여러 연금술사 연합을 털어온 덕에, 가방에 회복포션의 재료는 차고 넘친다.
비록 연금술사 연합에 남은 물건이 부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많은 곳을 털어온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문제없이 살릴 수도 있다.
레이아라를 살리는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르안의 뜻이라면 따라야겠지.
레이아라는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오직 가느다란 호흡만이 그녀의 생명이 타오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곧 그 불꽃은 재만 남긴 체 사라질 것이다.
카르안은 레이아라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찢어진 로브를 벗겼다. 깊게 베인 상처. 카르안은 상처는 보지도 않고 레이아라의 품을 뒤적였다.
“카, 카르안씨?”
카라나리가 입을 살짝 벌렸다. 치료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품을 왜 뒤적이는가.
‘설마 돈 되는 물건을 찾으려고?’
물론 레이아라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 고해도 저건 좀........ 있는 것도 얼마 없어 보이는데. 벼룩의 간을 빼먹는 꼴이었다. 상당히 치졸해 보였다.
하지만 예상 외로. 그가 꺼낸 것은 텔레포트 스크롤이다. 레이아라가 빼앗아갔던 물건. 원래 들고 있던 텔레포트 스크롤이 무력화되는 바람에 그녀의 것을 써야했다.
“여기 있었군. 피에 너무 젖으면 못쓰게 되니까. 이제 슬슬 회복포션을 만들어 보지.”
“........”
“그런데 카라나리. 왜 그런 표정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라나리가 묘한 표정을 받으며, 카르안은 포션 제조를 시작했다.
2.
카르안이 가방에서 포션 재료를 꺼냈다. 기계적인 움직임. 그렇게 손을 놀리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을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다.
카라나리에게 하지 못한 말. 무르짐의 상태였다.
무르짐이 그의 과거를 읽지 못한 것처럼, 그도 무르짐의 과거를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알수 있던게 있다. 무르짐이 그의 몸에 강신한동안, 그는 무르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무르짐의 감정. 그곳에 있던 것은 정의감도, 천재 연금술사의 냉철함도 아니었다.
‘광기.’
도저히 절제할 수 없는 폭력성만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오직 얇은 이성의 막 한 장이 그것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것은 살얼음판 위에서 걷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정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알샤인의 기사들과 사제들, 무르짐은 처음부터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살짝 힘을 주기만 해도 죽는 벌레 정도. 잘못 건드리면 부서지는 내구성 약한 장난감. 그게 무르짐의 눈에 비친 인간들이었다.
잠깐 진심을 보여준 것은 알샤인을 상대할 때 뿐. 기사들의 비명도, 사제들의 절규도 그저 시끄러운 잡음에 불과했다.
‘카라나리도 죽을 뻔했어.’
만약 그녀가 카르안의 협력자가 아니었다면, 무르짐은 카라나리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유쾌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생명체가, 인간을 따라하는 일종의 의태(擬態)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것도, 그저 애완동물의 재롱을 보는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카라나리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대하는 기분. 안에 있던 카르안은 상당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안은 계속 손을 움직였다. 레이아라를 살리기 위해. 하지만 한번 생긴 불안감은 거머리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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