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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떼 -2
“공포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인데.”
카르안이 중얼거렸다. 위에는 시체, 문 열고 들어오니 컴컴한 지하. 어지간한 강심장도 기절할만한 난이도의 코스였다.
“원래 엘프들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사나요?”
“그럴 리가요. 분명히 어딘가에 버튼이 있을 텐데.”
어둠 속에서 레이아라의 눈이 빛났다. 레이아라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은, 촛불보다 조금 강한 정도.
인간에게는 바로 앞밖에 안 보일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 레이아라는 작은 빛만으로도 이곳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괴물들이 습격하고, 뭐 그렇던데.”
“지금 이 안에 그런 것은 없어요.”
레이아라가 작게 웃었다. 그런 괴담에 나올법한 이야기는 없다. 그녀의 눈과 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카르안은 최대한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봤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 한숨을 쉬며 주변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했다.
“뭐, 정말 괴물이 나타나도 도망치면 되니까요.”
카르안이 가망을 툭툭 건드렸다.
“제 가방 안에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어요. 잠깐만 버티면 모두 도망칠 수 있어요.”
“그 텔레포트 스크롤은 어디와 연결되어 있나요?”
레이아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저희가 출발했던 마을. 그쪽 마법사 길드와 연동되어 있어요. 사용한다면 그 곳으로 이동되겠죠.”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사용하면 마을부터 이곳까지 다시 와야 하니까. 정말 위험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아야겠지만.”
카르안이 레이아라를 따라가며 말했다.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기는 햇볕하나 들지 않는 공간이다.
괴생명체가 태양 아래서 움직일 수 없다면, 이곳에서는 멀쩡하게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이곳에 숨어있다면…….
레이아라의 감각이 탁월하고, 카라나리의 반응 속도 또한 바람같이 빠르지만 상대는 괴생명체. 엘프들을 무너뜨린 적이다.
‘그런 놈들이라면.’
엘프의 감각을 속이고 습격할 수도 있다. 미지의 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아무 전조 없이 나타난 생명체들이 나라를 습격했다.
엘프들은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얼마 안가 전부 무너져 내리고, 나라의 일부를 이름 모를 괴물들에게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괴생명체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습격당한 엘프들은 알고 있겠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정보가 풀리지는 않았다.
“엇, 저기서 불을 켤 수 있겠어요.”
레이아라가 빠르게 내려갔다. 그녀의 눈에 원통형의 물체가 들어왔다. 저곳에 마나를 흘리면 천장의 마법석에 불이 들어오는 구조.
그 말을 들은 카르안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제한되자 상당히 답답했었다. 이제 불이 들어온다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때.
“윽?!”
무언가 어둠속에서 반짝였다. 두 개의 눈이었다. 그 눈은 카르안을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섬뜩했다.
‘설마 저놈이.’
소문의 괴생명체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두개의 눈이 카르안에게 달려왔다. 소리도 없었다. 그것은 카르안의 얼굴을 덮치려 했다.
“큭!”
카르안은 얼른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괴생명체의 공격은 카르안의 손에 막혔다. 카르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괴생명체를 포획했다!”
상상하지 못했다. 엘프를 공격한 생명체라고 해서 무조건 거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결과. 오히려 그 괴생명체는 작은 크기다.
아니, 작으니까 위협적이다. 거대하다면 마법이나 활도 맞추기 쉽다. 하지만 작은 생명체들이 때를 지어 달려온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카르안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달려드는 속도를 볼 때 상당히 날렵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을 당할 뻔했다.
‘어쩌면 목이 잘렸을 수도 있지.’
괴생명체는 그의 손 안에서도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상당히 흉폭한놈.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손에서 버둥거린다. 카르안이 손에 힘을 주려했다.
탁!
불이 켜졌다. 카르안은 얼른 그녀들에게 손의 괴생명체를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 이게 엘프들을 전멸시킨........”
카르안이 말을 멈췄다. 갑자기 켜진 불빛이 괴로운지, 괴생명체는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었다.
“캬아아아옹~”
“그거 고양이 아닌가요?”
카라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아라는 입을 막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카르안이 허탈하게 말했다.
“.......여기 고양이가 왜 있어.”
“그야 이 안에 연금술사가 키웠다던가? 애완동물일수도 있죠.”
카르안이 고양이를 놔주자, 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푸웁. 카르안씨. 설마 엘프가 고양이한테 당했을까요. 위험할 만큼 귀엽기는 하지만.”
“하아.”
레이아라의 놀림에, 카르안이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것만 같았다.
2.
“생각보다 큰데.”
지하의 연금술 연구실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층은 한 개였지만, 여러 개의 널찍한 방들이 있다.
조금 창백한 마법석의 빛 아래서, 셋은 다시 한 번 흩어졌다. 마탑과 같이 위험한 것은 없다. 고작 해봐야 고양이 정도일 것이다.
“싸구려로 보이는 것들도, 무사하지 말고 전부 얻어 와요.”
“네~”
“알겠습니다.”
레이아라와 카라나리가 답했다. 연금술 재료 중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귀중한 재료인 경우가 많다.
토저보화의 꽃잎만 봐도, 단순한 꽃잎 한 장이다. 이곳에도 그런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 숲의 심장이 있을지도.”
베스트 시나리오. 그러면 빌어먹을 불치병도 탈출이다. 물론 워낙 귀한 물건이라 여기 있을 확률은 낮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카르안은 커다란 방부터 꼼꼼히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연금술사 연합. 뭔가 귀한 물건이 잔득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마치 귀족의 집을 살피는 도둑처럼, 그는 서랍을 전부 열고 테이블 위를 훑었다.
심장을 뛰게 했던 기대감이 사라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는 깊게 탄식했다.
“정말 쥐뿔도 없네.”
제대로 된 물건이 거의 없었다. 알페라츠 백작령의 연금술 길드를 가도, 여기보다는 뭔가 많을 것 같다.
마법에 비해 연금술은 발달하지 않은 것인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술에 물탄 듯 어정쩡한 재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카르안씨~ 뭐 좀 찾으셨어요?”
“그다지, 별게 없습니다. 조금 더 수색해 봐야겠어요.”
상황은 카라나리와 레이아라도 똑같았다. 연금술은 잘 모르지만, 그럴싸한 물건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약 30분 후. 카라나리와 레이아라는 처음 헤어졌던 곳으로 돌아왔다. 마법사의 탑에서 양손 가득 물건을 얻은 것과 다르게, 손이 영 가벼웠다.
“카라나리 씨는 어때요?”
“쓸만한 건 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카르안씨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챙겨오라고 하셔서,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그녀의 손에는 돌 몇 개와 가루가 든 주머니, 마른 잎 몇 장이 들려있었다. 레이아라도 비슷한 상황.
“시간 낭비만 한 것 같네요.”
“혹시 카르안씨가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죠. 그리고 이것도 사실 귀한 것일 수도......”
카라나리의 자신 없는 말투. 그는 가루가 든 주머니를 바라봤다. 영 허술해보였다. 레이아라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나저나 그 카르안씨는 왜 이렇게 안 오는지...../.”
“카라나리!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아!”
때맞춰 카르안이 소리쳤다. 레이아라가 픽 웃었다.
“또 뭔가요. 이번에는 강아지라도 찾으셨어요?”
“농담이 아니라니까? 여기 좀 와 봐요.”
레이아라와 카라나리가 서로를 마주봤다. 레이아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목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카르안은 벽에 귀를 대고 있었다. 마치 금고에 귀를 대고 있는 도적 같다. 레이아라는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수맥이라도 찾으셨나봐요.”
“이 안이 비어있어요.”
카르안의 진지한 목소리. 하도 별게 없다보니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 덕에 벽에 있는 희미한 균열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인공적으로 그어진 직선의 틈. 딱 문 모양의 크기다. 궁금증에 꾹 밀어봤더니, 안으로 살짝 밀려들어갔다.
“바람이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카라나리가 벽의 틈 사이로 손가락을 대었다. 희미한 바람이 불어온다. 즉, 안에 무슨 공간이 있다는 증거였다.
“한번 열어보자.”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어떻게 열게요?”
레이아라가 심란한 표정으로 벽을 만졌다. 근처에는 열쇠구멍은커녕 손잡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카라나리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검을 뽑았다.
“열쇠가 있었군.”
카르안이 오러로 빛나는 검을 보며 말했다. 레이아라와 카르안은 뒤로 물러났다. 카라나리가 힘껏 검을 휘둘렀다.
카앙-!
“........!”
검이 튕겨나갔다. 바위도 두부처럼 썰어댈 수 있는 오러가 실린 검. 그게 맥없이 막힌 것이다.
카라나리의 오러가 더 강해졌다. 그녀는 힘을 짜내어 몇 번 더 검격을 날렸다. 쾅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흔들거렸지만, 그 문 쪽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죄송합니다. 부술 수가 없어요.”
"젠장, 이거 흠집도 별로 안 났는데."
카르안이 벽을 다시 확인했다. 강력한 검기로 계속 후려쳤다. 하지만 약간의 긁힌 자국뿐. 벽은 파이거나 금이 가거나 하지 않았다. 레이아라가 벽을 톡톡 두드렸다.
“엄청 단단한데요.”
“맞아요. 비정상적일 만큼 단단하죠.”
카르안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큼 중요한 게 있다는 거겠죠. 혹시 여기에 중요한 것들을 모아뒀을수도 있고.”
“흐음.”
셋을 머리를 맞대었다. 열리지 않는 금고를 얻은 기분이다. 뭔가 들어있기는 한데, 도통 뚫을 방법이 없다.
“옆의 벽을 파서 가는 것은........”
“저희가 두더지도 아니고. 파묻혀 죽지 않을까요? 우선 삽도 없고.”
“잠깐. 안쪽을 살펴보면 되잖아.”
카르안이 벽 앞에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골램의 핵. 반짝이는 작은 구체는 얼음처럼 땅에 녹아들어갔다.
“호.”
레이아라가 작게 감탄했다. 연금술사가 골렘을 만드는 것. 그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 곧 땅이 작게 울렁거리더니, 문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골렘의 핵은 천천히 이동했다. 마치 달팽이처럼 느릿하게. 핵은 곧 문 뒤까지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안쪽에서 열 생각이면, 문 자체를 변형시킬 수는 없나요?”
“마법적인 저항이 걸려있어, 골렘의 핵이 침투할 수가 없어요.”
문을 골렘으로 만들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특수한 저항이 걸려있었다. 카르안은 골렘을 형성하는데 힘을 집중했다.
곧 골렘이 형체를 갖추었다.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골렘은, 잠시 멈춰서더니 눈을 번쩍 떴다.
“시야공유를 해보죠.”
“시야공유?”
레이아라가 살짝 입을 벌렸다. 연금술은 잘 모르지만, 골렘과 감각을 공유하는 게 엄청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거 되게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어렵긴 하지만, 못할 것도 아니에요.”
항상 빈정대던 레이아라가 감탄하자, 카르안도 살짝 웃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싸움을 못해?’
뭔가 대단한 일은 잔득 하는데, 정작 전투능력은 높지 않다. 카르안의 마나량 부족 때문이지만. 레이아라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실은 약하다고 한 것도 거짓말 아니야?’
레이아라가 복잡한 생각에 빠진 사이, 카르안은 눈을 감았다. 카르안의 골렘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려대었다. 감각을 공유하기 위해. 곧 카르안의 눈앞에 벽 하나가 들어왔다.
“.......”
카르안은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아무도 없다. 즉 이쪽이 안이라는 뜻. 그는 천천히 문을 둘러보았다.
‘다행이 어둡지는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문고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의 구조가 특이했는데, 오직 안쪽에서만 열 수 있게 되어있다. 카르안은 조심스럽게 안쪽에서부터 문을 열었다.
“열린다!”
레이아라가 소리쳤다. 동시에 카르안도 눈을 떴다. 더 이상 감각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 그의 눈앞에 비밀의 문 안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으으으......
레이아라의 얼굴이 굳었다. 카라나리와 카르안도 마찬가지.
“단단할수록....... 중요한게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카라나리가 조용히 말했다. 카르안이 입을 열었다.
“젠장.”
안에는 난생 처음보는 괴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흥분한 사냥개처럼, 카르안 일행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