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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계절 (카라나리 외전)
카라나리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메락의 저택에서 탈출하던 날. 그녀는 자신이 검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작은 조직에 들어갔다. 거기서 소녀의 재능은 비틀린 방향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커억!”
어두운 술집. 카라나리가 검을 뽑았다.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겁먹은 표정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로악스 놈들! 설마 우리를 속인 거냐!”
“우리 같은 놈들을 믿은 네가 잘못한 거야.”
“잠깐!”
카라나리의 검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짧은 동작, 그리고 고요함.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람의 숨이 끊어졌다.
“야아~ 카라나리양이 칼질 하나는 기가 막혀.”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피에 젖은 술집의 풍경을 감상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 그는 카라나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귀염둥이 보너스 주느라, 조직의 금고가 남아나질 않겠어.”
벌어다 주는 돈이 더 많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가 카라나리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돈은 확실히 줘야해.”
“하하, 새침하게 생겨서 돈을 참 좋아하는군. 그러면 좀 더 편하게 버는 법도 있는데 말이야.”
그가 카라나리의 허벅지에 슬쩍 손을 올렸다.
“검 기술은 기가 막히지, 그거 말고 밤 기술도 한번 보고 싶은데 말이야. 어때?”
“내 몸에서. 손. 치워.”
카라나리가 그의 손을 쳐냈다.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아픈 척을 해댔다.
“아이고 까칠해라.”
“4골드. 지금 당장 내놔.”
“알겠어. 자~ 지금 당장 줄 테니까 말이야.”
남자는 품에서 금화 4개를 꺼냈다. 카라나리는 금화를 낚아채었다.
“그럼 이만.”
“그래, 나중에 또 보자고.”
‘더러운 놈.’
카라나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술집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저런 더러운 놈에게 붙어사는 기생충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는 집으로 향했다.
“언니! 어서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르나가 반겨주었다. 그녀는 뭔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그건 뭐니?”
“과자! 오늘 친구들한테 이만큼 받았어!”
아르나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 부모님을 잃었을 때, 아르나는 밥도 먹지 않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곧 카라나리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가 투정부려봐야, 힘들어 지는 사람은 한명 뿐이다.
아르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귀족들의 학교에는 갈 수 없었지만, 그 외에도 상인, 장인의 자식 등 부유한 평민을 위한 학교도 존재했다. 카라나리의 권유로 아르나는 그 곳에 입학했다.
의외지만, 학교에서 아르나의 인기는 상당했다. 타고난 미모와 활발한 성격 덕분. 마치 여름날의 태양처럼 빛나는 소녀는, 많은 소년들의 심장을 빼앗아갔다. 지금 그녀의 양 손에 한가득한 과자도 그 결과물이다.
“그래. 나중에 같이 먹자.”
“응. 지금 밥 해 놨으니까.”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지만, 카라나리가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카라나리는 욕실에 가서 몸부터 씻었다.
핏자국은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우지만, 혹시라도 냄새가 날 수 있다. 그리고 저녁시간.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언니야, 오늘 세계사 선생님이 새로 오셨거든. 그런데 어머나, 완전 얼굴이 조각이었어, 조각.”
“.........”
“근데 그 쌤이 막 안경도 쓰고 굉장히 유약한, 꽃미남 같은 이미지였거든. 근데 외투를 벗는데 몸이 그냥 옴마야~ 였다니까. 그리고 팔을 걷어 올리는데 핏줄이 쫙!”
“그, 그렇구나. 공부는 잘 돼가고?”
“당연하지.”
조금 일찍 성숙해진 탓일까. 그녀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잘 한다면 귀족의 회계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양의 탈을 쓴 짐승남이.......”
신나게 떠들던 아르나가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 있나? 아르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옷에 흘렸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아.”
카라나리는 옷을 내려다봤다. 상의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에서 닦고 올게.”
“응. 밥 식기 전에 빨리 와.”
카라나리는 욕실에 들어갔다. 상의를 벗자 가슴과 목 사이를 감은 붕대가 전부 젖어있었다.
“너무 무리했어.”
아무리 검술에 재능이 있더라도. 계속되는 싸움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오늘 10명이 넘는 놈들과 싸웠다. 그 덕에 저번에 입은 상처가 터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이 있을 때 벌어 놔야한다. 아르나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 부르주아를 위한 학교는, 결코 학비가 싸지 않았다.
“하아.”
그녀는 소독약과 포션을 꺼냈다. 먹는 게 아닌 상처에 바르는 물건이다. 붕대를 풀고 소독약을 붓자, 따끔한 통증이 몰려왔다.
“밤에 또 울겠네.”
카라나리가 한숨을 쉬었다. 아르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카라나리가 조직에서 일 하는 것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상처받은 것도 모두 알고 있다.
카라나리가 흘린 게 음식이 아니라 피라는 것도. 오늘 반찬에 빨간색은 없었으니까.
그저, 필사적으로 평범한 일상을 연기하고 있었다. 조금 뒤틀렸지만, 그 정도는 웃음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포션을 붓고, 지혈제를 뿌린 뒤 붕대를 감았다. 더 늦으면 그녀의 동생이 걱정할 것이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
불안정한 삶이었다. 누군가의 피를 금으로 바꾸는 일은. 언제 죽어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카라나리! 뭐하는 거야!”
“........”
카라나리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위기였다. 한 남자가 조직을 습격했다고 해서 도와주러 왔더니,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강한 자였다.
호리호리한 몸. 가늘어 보이는 검을 든 남자. 저 가느다란 검에 벌써 몇 번의 상처를 입었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카라나리를 노려봤다.
“꼬마가 제법인데?”
가벼운 도발. 카라나리는 이를 악 물었다. 그녀는 힘을 모아 검을 내찔렀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하는 남자는 가볍게 피해버렸다.
“근성은 백점. 체력도 좋고, 근데 기술이 영........ 기초가 부실해.”
“젠장! 전부 칼 뽑아!”
로악스. 그들이 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수는 20명. 조직 로악스의 전부였다.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검에 오러가 실렸다.
“아가씨는 제법인데, 너희들은 왜 그 모양이냐.”
세 번의 칼질. 20명의 조직원들은 붙기도 전에 모두 목이나 몸이 잘려버렸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검술에, 카라나리의 눈이 커졌다.
“두고 보자!”
로악스의 두목은 죽기 살기로 달아났다.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곧 푹 쓰러져 버렸다. 그의 뒤통수에는 포크 하나가 앙증맞게 박혀 있었다.
“저놈의 악당들은 대사가 너무 뻔해.”
남자가 테이블 위의 포크를 던진 것, 카라나리는 다시 달려들었다. 남자는 몸을 돌려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무릎으로 명치를 찍었다.
“커억.......”
“검을 배운 것 같지는 않군. 그런데 이 정도라니, 재능이 있다. 이런 쓰레기통 속에 있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카라나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저히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늘한 검이 목에서 멈췄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죽은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 테니까. 그저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미안해. 아르나.’
그동안 벌어둔 돈이 있다. 계속 학교를 다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으리라. 남자가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됐다. 합격.”
“무슨?”
“검은 배운 적 없고, 재능은 충분. 눈에는 독기로 가득하고. 내가 찾던 인재다. 이리저리 깽판치고 다닌 보람이 있군.”
카라나리는 할 말이 없었다. 뜬금없이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잠시 카라나리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나?”
“제자?”
“검법을 전수할 제자가 필요하긴 한데, 쓸 만한 놈들이 하나도 없더라고. 재능 있는 놈들을 영 찾기가 힘들어서.”
남자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충 눈만 보면 알 수 있거든. 너는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지? 그러기에는 네 눈동자가.......”
“아니.”
카라나리가 말을 끊었다. 뭔가,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분노였다. 남자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독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돈 때문 맞아. 지금까지 돈 몇 푼을 위해 사람을 죽여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눈동자? 그딴 걸로 뭘 알 수 있다는 거야. 나를........”
설명할 수 없어. 차라리 욕을 한다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그녀가 격어온 삶과 고뇌을 다 안다는 것 마냥 지껄이는 것은, 도저히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당신이 대체 뭘 안다는 거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쓰레기를, 실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싶은 거야?”
“흠.”
“죽일 테면 죽여. 이상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남자를 카라나리를 쳐다봤다. 저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통 검이 목 앞에 사람은 비굴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여자는 조금 달랐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 미안하군. 내가 얄팍한 눈으로 너의 삶을 모욕한 것인가. 흠. 큰 실례를 했어.”
예상 외. 정말로 사과하다니. 대체 저 남자는 뭐하자는 것일까.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네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만큼 쓰레기라면, 지금 내 제안을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일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니. 안 그래?”
“........”
카라나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남자는 표정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인재를 찾고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급히 검술을 전수해 줘야하고. 네가 뭐라고 하던 나는 너를 제자로 삼고 싶다. 이정도면 됐나?”
“하아.”
카라나리는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카라나리가 제자가 되는 것을 거절하면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살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카라나리의 대답에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3.
남자는 자신의 화룡검황이라고 소개했다. 이상한 이름. 그는 동방에서 검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의 집은 산구석에 박혀 있었다. 카라나리는 그의 집에 머물며 검술을 배웠다.
수련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르나는 학교를 포기해야했다. 미안해하는 카라나리에게 아르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공부같은거 하기 싫었는데 뭐.”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카라나리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르나가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남자에게 붙잡혀, 동생의 앞길이 가로막히다니.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날, 화룡검황의 부탁에, 카라나리는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화룡검황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았어. 그런 일을 당하면 삐뚤어질 수도 있지.”
그리고 그는 왜 자신이 제자 구하기에 온 힘을 쏟았는지도 알려 주었다. 그는 불치병에 걸려있었다.
“수명이 얼마 안 남았거든. 근데 내 검술은 일인전승이라. 내가 죽으면 영원히 배울 사람이 없어진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지.”
“그러면.”
“네가 죽기 살기로 배워야지. 원래 무림인 들은 검법이 훼손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단 말이야. 나도 그런 무림인 이고.”
화룡검황은 검술만큼이나 정신적 수련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카라나리라는 제자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망가진 정신을, 조금이라도 고쳐놔야 했다.
“일단 수련이고 나발이고 좀 웃으렴.”
“그런 건 검술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니 인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화룡검황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수련은 계속 되었다. 반년 만에 오러를 깨우치고, 일 년이 됐을 때는 검법의 초식을 대부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형태뿐이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성취였다.
또한 다른 것도 조금 변하였다. 비록 아르나 앞에 한에서이지만, 전보다 조금 밝게 웃게 되었다. 그녀 안의 겨울은, 영원히 녹을 것 같지 않던 얼음덩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카라나리는 물통을 들고 개울가로 향했다. 밥 지을 물을 떠와야 한다. 그녀는 평소에 가던 곳으로 가서 물통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 젊은 아가씨. 미안한데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산을 온 것일까. 이곳은 도시와 가까워서, 가끔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순박한 인상의 노인. 카라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허허, 고맙네.”
카라나리가 물병을 건네자, 노인은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크아. 물맛한번 좋구먼.”
“그렇습니까?”
“뭐, 땀을 빼서 맛있는 것일 수도 있지. 그, 자꾸 부탁만 해서 미안한데. 내가 지금 사람을 좀 찾고있거든.”
노인이 땀을 닦았다.
“혹시 화룡검황 선생이라고 알고 있나?”
“아, 그분은.......”
워낙 이 주변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카라나리는 집의 위치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뒤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인간에게 볼 수 없는 황금색 눈동자, 긴 적발. 붉은 검 한 자루. 옷에 새겨진 검은색 용.
“아, 보스. 천천히 좀 가라니까요........ 음?”
사이프카르였다. 그녀는 뱀같은 눈으로 카라나리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