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35)화 (35/124)
  • 35====================

    파리떼 -1

    “자, 네가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생각해봐.”

    사이프카르가 조곤조곤 말했다. 러슬라이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요........”

    그는 맨땅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듯 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양 손에는 카르안이 골렘 생성을 연습하던 바윗덩이라 들려있었다.

    사이프카르가 개발한 처벌, ‘생각하는 의자’였다. 물론 진짜 의자는 없고, 머릿속에서 의자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허공에서 의자에 앉은 자세를 취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지만 러슬라이는 버틸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몇 가지 옵션까지 추가시켰다. 거대한 바위가 그것. 이러면 아무리 러슬라이라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잖니. 자,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그게........”

    러슬라이가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병간호를 교대할 시간이 됐고, 혹시나 사이프카르가 자고 있을까 깨우려고 소리쳤다. 대체 이 행동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모르면 생각 날 때까지 그러고 있어.”

    러슬라이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지은 죄가 없으니 더욱 억울했다. 마치 길가다가 스파이로 오인 받아 억울하게 고문당하는 기분이다. 자꾸 불라고 하는데 아는 것도 없는 상황.

    식은땀을 흘리던 러슬라이는 곧 탈출구를 찾았다.

    “누님.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보, 보스께서 공문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러슬라이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러면서 슬쩍 굽혔던 다리를 폈다. 사이프카르는 찌릿 눈치를 주면서 종이를 펼쳤다.

    그녀는 말없이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 이 노인네. 진짜 더럽게 구는구만.”

    “무슨 일입니까.”

    카르안이 사이프카르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끝으로 종이를 톡톡 치며 대답했다.

    “지금 르네키르다에서 난리가 난 것 같다.”

    르네키르다. 엘프들의 왕국이다. 특이한 점은 평지가 아닌 거대한 산 하나에서 살아간다는 점.

    지금 카르안이 살고 있는 알펜 왕국 못지않은 인구와 크기를 자랑한다. 엘프가 아닌 종족에게는 굉장히 폐쇄적이다. 그리고 수많은 보물이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 보스는 이런 명령을 내리네.”

    카르안이 건네준 종이를 받았다. 딱딱한 글씨체로 뭔가가 잔득 적혀 있었다. 카르안은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좀........”

    카르안도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씁쓸한 표정.

    “나도 더러운 거 알아. 그런데 우리가 이제 와서 봉사활동 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공문은 간단한 내용이었다. 르네키르다에서 알 수 없는 괴 생명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덕분에 엘프들의 왕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그 피해의 규모였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었는지, 르네키르다의 삼분의 일이 초토화 되었다.

    르네키르다는 결코 만만한 왕국이 아니었다. 엘프는 비록 그 수가 많지 않지만, 긴 수명과 마법적,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다.

    타고난 마나량은 바다처럼 크고, 몸은 바람처럼 날렵하다. 그런 엘프들의 국가. 한명 한명이 강력한 마법사이자 전사. 당연히 그들의 군대는 무엇보다 강력하다.

    성벽도, 요새도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산 자체가 요새이고 나무 하나하나가 성벽이다. 험한 지형에서 싸운다면 엘프들의 화살과 마법을 당해낼 수가 없다.

    과거 한 인간의 지도자가, 엘프들의 보물을 탐내었다. 그는 왕국의 병력을 쏟아부어가며 돌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5만의 병력중 절반이 죽었다. 그동안 르네키르다의 작은 도시하나 점령하지 못했다.

    일반 병사들은 산 높이서 쏘는 화살에 힘 한번 못 써봤고, 그나마 강력한 기사들은 마법사들의 무차별 폭격에 희생되었다. 그 뒤로 어느 왕국도 르네키르다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런 르네키르다의 일부가 박살나 버렸다. 그들을 공격한 괴 생명체가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공문의 내용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보스가 친절하게 상황만 알려줄리 없었다.

    쓸 만한 것들을 전부 약탈해와라.

    그 생명체들은, 그저 파괴만을 일삼았다. 목표는 살아있는 엘프. 그들만 죽이고 나면, 보물이나 귀한 무기를 탐하지도 않았다. 마을에 불을 지르지도 않는다. 단지 앞으로 전진할 뿐.

    “르네키르다에는 온갖 귀중품들이 다 있지. 그러니까 보물이 잔득 담긴 보물창고가 있어. 주인은 부상을 입고 밖으로 도망쳤다.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지.”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카르안의 눈이 깊어졌다. 남의 비극을 이용해 돈을 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리 막 살기로 생각한 카르안도 망설여질 만큼.

    “원래 우리 일이 이런 거였어. 거기서 나쁜 괴물 놈들을 혼내주는 건 백마 탄 기사님들뿐이지. 우리가 아니라.”

    사이프카르는 담배를 물었다. 회색 연기가 쓸쓸한 방 안을 채웠다.

    “그리고 이건 너한테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카르안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사이프카르가 하는 말이 맞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

    “숲의 심장. 운이 좋다면 그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

    카르안의 불치병을 치료할 유일한 재료. 그것이 엘프의 숲에 있다.

    “그러면 저희가 할 일은.”

    “용병 신분으로 간다. 늙은이는 아마 모든 지부에 다 지령을 내렸을 거야. 아마 흑룡회 다른 지부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겠지.”

    사이프카르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만약 가기 싫으면 다른 녀석을 보내도 상관없어. 제이크랑 러슬라이, 그 정도면 우리 지부도 충분하지.”

    “제가 가겠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가야한다. 그러면 차라리 자신이 가는 편이 좋다. 러슬라이나 제이크가 숲의 심장을 알아볼 것 같지도 않고.

    “너에겐 큰 기회가 되겠군. 하지만 기회가 큰 만큼 위험도 큰 법이야. 엘프들이 몰살당했다. 만약 그런 생명체와 마주친다면, 위험할 거야.”

    “괜찮습니다. 적당한 용병을 고용하도록 하지요.”

    카르안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조금 착잡했지만, 어차피 이건 흑룡회의 업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자, 둘이 있을때 잠깐 타오르려던 성욕은 담뱃재처럼 열기를 잃고 식어버렸다.

    고민하는 두 사람 사이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슬라이였다.

    “저, 이제 그만 해도 될까요?”

    2.

    카르안이 작업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당분간 올 수 없는 곳. 사이프카르는 드물게도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카르안은 하루 쉬고 난 뒤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르네키르다. 당연히 이곳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 가는대만 마차로 2달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다.

    “마차는 이용하지 않아. 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한다.”

    “그거, 비싸지 않나요?”

    “당연히 비싸지. 근데 이건 2명분까지 조직에서 지원해 주거든.”

    장거리 텔레포트는 마법사 길드에서 사용할 수 있다. 엄청난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대신, 가격이 더럽게 비싸다.

    하지만 그 텔레포트의 두 명 분은, 보스가 따로 준 돈으로 이용할 수 있다. 사이프카르가 카르안을 그냥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왕복으로 4달씩 걸린다면 공백이 너무 크다. 약을 만들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

    “준비는 하루 이틀쯤 시간을 줄 수 있어. 하지만 가능하면 빨리해.”

    이유는 알고 있다. 지금 르네키르다가 초토화 된 것을 아는 것은 흑룡회뿐만이 아니다.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그 곳으로 달려들 것이다. 시간싸움. 늦으면 텅 빈 보물 상자만 얻게 될 것이다.

    “다친 짐승에게 몰려드는 하이에나 같군요.”

    “세상일이 다 그렇지.”

    사이프카르가 포션병이 담긴 상차를 옮겼다.

    “어쩌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비슷비슷할지도 몰라. 차이점이라고는 똑같은 행동에도 그럴싸한 포장을 하느냐, 마느냐 정도.”

    카르안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염세주의자셨나요?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현실주의자야.”

    한순간이었지만, 가면 사이로 그녀의 진짜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3.

    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서, 그가 향한곳은 용병 길드였다. 믿음직한 경호원. 그에게는 한사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카라나리씨는 쉰다고 하셨어요. 오늘 새벽에 고블린 토벌에서 돌아오셨거든요.”

    “그렇군요.”

    그가 백작령에서 아는 실력자는 얼마 없었다. 사이프카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기서 백작령을 지켜야 하니까. 체스 판에서 킹이 떠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는 레드스톰. 처음부터 기각. 잠시 맺었던 동맹도 풀렸고, 그쪽에서도 같이 갈 이유가 없다.

    세 번째는 카라나리. 사이프카르 다음으로 강하다고 생각되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마 카르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나 안 된다면 러슬라이나 제이크중 한명과 함께한다. 카라나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도 훌륭한 경호원이었다.

    카르안은 카라나리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예전에 한번 가봤던 곳.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도시 외곽으로 걸어갔다.

    낡은 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카르안은 문에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예. 지금 가요!”

    작은 발소리. 곧 문이 조금 열렸다. 그 문 사이로 작은 얼굴이 빼꼼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 잘생긴 의사 선생님!”

    “오랜만이구나. 혹시 언니는 집에 있니?”

    “잠시 만요.”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곧 카라나리의 여동생, 아르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언니는 방금 방에 들어갔어요. 지금 불러드릴게요.”

    “혹시 자고 있으면 깨우지 마.”

    ‘새벽에 고블린 토벌을 마쳤다고 했지.’

    그러면 밤새 싸우다 왔다는 게 된다. 상당히 피곤할 터. 어차피 오늘 안에만 만나면 되니까 일부러 깨울 필요는 없었다.

    “아, 카르안씨.”

    그때 문이 열리며 흑발의 소녀가 나왔다. 카라나리. 그녀는 이제 잠자리에 들어가려는 듯,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카르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푸흐흐흡!”

    “.......?”

    카르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한 가지만 빼고는.

    “카라나리. 너 그 잠옷........”

    귀여운 곰돌이가 잔득 그려진 잠옷이었다. 복슬복슬한 게 상당히 편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랑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영하 18도를 유지하는 얼음덩어리 소녀가 곰돌이라니. 잘 때도 무늬하나 없는 밋밋한 잠옷을 입을 줄 알았는데.

    “아, 혹시 귀여운 거 좋아했나?”

    의외로 냉정해 보이는 사람들이 곰 인형에 푹 빠진다던가. 너무나 안 어울리는 모습에 카르안은 계속 웃음을 흘렸다. 한번 터진 웃음보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반면 카라나리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은 겁니다.”

    “어디서?”

    “알샤인 교단에서요. 불우이웃돕기 한다고 신자들이 입던 옷을 나눠줬는데........”

    카르안의 웃음이 멈췄다.

    “저도 입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여동생 약값을 해결하느라, 잠옷 같은 건 살 돈이 없어서. 또 입다보니 편하고........”

    “어, 그, 미안하다........”

    그러니까 가난해서 물려받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에게, 너 그 옷 진짜 안 어울린다! 하고 비웃은 셈이다. 카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진짜 쓰레기가 된 것 같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차라리 욕을 해.”

    “헤헤. 그럴 수도 있죠 뭐.”

    아르나가 카르안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남자는 얼굴만 잘생기면 인성이 쓰레기라도 괜찮아요.”

    “얘는 좀 치료가 필요할거 같은데, 불치병보다 더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아. 그리고 난 쓰레기가 아니란다.”

    “하앗. 나쁜 남자 만세!”

    아르나는 그렇게 외치더니 쪼르르 방에 들어가 버렸다. 카라나리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혼내야겠군요.”

    ‘고생 좀 하겠군.’

    카르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카라나리같은 사람이, 한번 혼내기 시작하면 굉장히 무섭지 않을까.

    “그보다도.”

    카라나리가 주변을 환기시켰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 카르안이 자리에 앉자, 카라나리도 따라서 앉았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내가 찾아올 일은 하나밖에 없지.”

    의뢰다. 카라나리도 진지한 얼굴로 카르안을 바라봤다.

    “그런데 썩 좋은 의뢰는 아니야.”

    “말씀해 주세요.”

    카르안은 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숨길 수도 없고. 그는 엘프의 나라 르네키르다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흑룡회에서 조직원들을 보내어 그곳의 보물들을 찾으려 한다는 것까지 모두 말했다.

    카라나리는 카르안을 말없이 쳐다봤다. 한없이 깊은 눈동자.

    “솔직히 말하면 네가 거절해도 좋아.”

    “카르안씨.”

    한참 후. 카라나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흑룡회 입단을 거절했는지 아십니까?”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3연참은 상당히 하드코어하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