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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로망
“그럼 가보겠습니다.”
“잘 가시게!”
예드프리어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카르안도 거기에 맞춰 인사했다.
교주는 카르안의 치료에 매우 만족. 덕분에 카르안은 알페라츠 백작령행 마차까지 얻어 탈 수 있었다.
“그, 그러니까 형님. 형님 맞으시죠?”
마차 안. 러슬라이가 어색하게 말했다. 카르안의 변한 얼굴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맞다니까.”
“흠흠. 너무 멋지게 변하셔서 알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아, 물론 전에도 멋지셨지만.”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확실히 미남이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얼굴. 러슬라이는 뮤프리드의 위대함을 직접 느끼며, 카르안을 훑어보았다.
“아무튼 이제 조직으로 가는 건가.”
“예. 이쯤이면 일도 전부 끝났을 것 같고.”
러슬라이가 씨익 웃었다. 카르안의 성형이 끝난 날. 카르안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루 동안 뮤프리드 대신전의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 도시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만 하고 가자니 억울한 기분이 들 정도. 사이프카르가 여기에 감시를 붙여둘 것도 아니고, 하루쯤 늦장을 부리기로 했다.
예드프리어 교주의 도움으로,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낮에는 각종 관광지를, 밤에는 술과 음식을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특히 러슬라이는 여자들 사이에서 미친놈처럼 술을 퍼마셨다.
“아예 여기서 눌어붙어 살고 싶습니다.”
“민폐야. 임마.”
카르안이 피식 웃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금술 책이나 얼굴 뿐 아니었다. 뮤프리드 교단의 교주. 그의 호의를 얻었다.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편한 마차도 얻었고.”
“또 그 좁아터진 마차에서 고생할 줄 알았지 뭡니까.”
커다란 마차와 교단 병사들의 호위까지 붙었다. 그 호위를 지휘하는 것은 성기사 라이. 실로 극진한 대접이었다.
“올 때 타던 마차보다 2배는 큰 거 같습니다. 이런 곳을 세 명이서 쓰다니, 어째 사치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카르안이 대답했다. 지금 마차 안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두 명이 아닌 세 명.
“그런데 저는 왜 당신들과 같이 가야 하는 거죠.”
가라앉은 목소리. 뮬리펜이 말했다. 그녀는 마차에 탈 때부터 저기압 상태였다.
예드프리어의 아이디어였다. 어차피 두 사람의 도착지도 같으니, 기왕 가는 거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나. 마침 세 사람은 함께 사냥도 한 사이니까. 초면도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희 둘이 따로 가면 그만큼 교주님에게도 부담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기왕 같이 가게 된 거, 편하게 갑시다.”
카르안이 말했지만, 뮬리펜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숨이 나왔다.
‘어른스러운 건지 애 같은 건지.’
그날 저녁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러슬라이는 어제 광란의 밤을 보낸 후유증으로 누워서 자 버렸다.
뮬리펜은 창밖을 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카르안은 연금술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때운것.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자, 열심히 달리던 마차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잘 겁니다.”
성기사 라이가 알려주었다. 그는 병사들을 지휘하며 모닥불을 만들고, 잠을 잘 천막을 만들었다.
“저희는 그냥 마차에서 자겠습니다.”
카르안과 러슬라이. 두 명은 마차 안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마차가 크다보니 오히려 안이 더 편할 정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힘들게 천막 하나를 더 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 입장에서도 그게 편하다. 결국 뮬리펜은 다른 천막에서 자기로 하고, 그들은 마차 안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간단한 스프로 저녁을 해결했다. 이제 눈을 붙일 시간. 러슬라이는 낮에 실컷 자 놓고도 또 잠들어 버렸다.
“잠이 안 오는데.”
반면 카르안은 자꾸 몸을 뒤척였다. 하루 종일 마차 안에서 뒹굴 거렸다. 조금 피로해야 잠이 잘 오는데, 오늘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되도 잠들기가 힘들었다.
“세수라도 한번 하고 올까.”
조금 답답한 기분. 카르안은 문을 열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는 불침번을 서는 병사에게 갔다.
“저기.”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이 근처에 강가는 없나요?”
“저쪽으로 조금만 가시면 나옵니다. 한 오 분 정도만 걸으시면 나올 겁니다.”
카르안은 그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처음 온 날이 생각나는군.”
그러고 보니 그때도 물소리를 찾아다녔다. 지금과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물소리를 듣자 이곳에 오던 날이 떠올랐다.
카르안은 강가로 갔다. 날은 어두웠지만, 창백한 달빛이 수은등처럼 길을 안내해 주었다. 멀리서 강이 보였다.
그쪽으로 향하던 카르안은, 강가 근처에서 멈춰 섰다.
무언가 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잡초들 사이로, 무언가 물가에 앉아있었다. 그 '무언가'는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물 마시러 온 황금 고라니는 아니겠지.”
예상대로 고라니는 아니었다. 조금 가까이 가서 보니,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누구? 카르안씨?”
아직 그의 바뀐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뮬리펜은 잠시 놀라더니 고개를 픽 돌려버렸다.
“잠깐 세수하러...... 일 다 봤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급하게 일어나더니 총총거리며 달려갔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으앗!”
카르안을 스쳐 지나갈 때, 박힌 돌멩이에 걸려 휘청거렸다. 카르안은 그녀를 얼른 붙잡아 주었다.
“어두우니까 조심 좀 하세요.”
“고마워요.”
뮬리펜은 화들짝 놀라며 카르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카르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저를 싫어하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대놓고 적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뮬리펜은 잠시 입을 오물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슨 일이라.”
“너무 달라졌어요. 이상할 정도로. 당신, 정말 카르안씨가 맞는 건가요?”
카르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카르안이 맞냐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성녀에서 모든 것을 말해봐야 믿어줄 리도 없다. 그리고 말해줄 이유도 없었다.
“원래 사춘기때 사람이 확 변하잖아요. 저는 그게 조금 늦게 와서.”
“농담으로 넘길 생각 하지 말아요.”
“하아.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성녀가 카르안을 노려보았다.
“예드프리어님을 도왔다고 들었어요. 거기 연금술사들도 하지 못한 일들을, 전부 해냈다고.”
“맞습니다.”
“연금술...... 갑자기 어떻게 연금술사가 되었는지는 안 물을게요. 하지만 당신은 그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어요.”
카르안은 뮬리펜과 거리에서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녀는 카르안이 흑룡회에 들어간 것에 놀랐다. 간부가 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관점이 조금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간부가 됐는지 궁금할 텐데, 그녀는 왜 흑룡회에 들어갔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 힘을 더 좋은 방식으로 사용해도 되잖아요! 돈은 조금 덜 벌어도, 흑룡회에 가서 마, 마약 같은 안 좋은 물건을 만들지 말고. 불치병의 치료제나 회복 포션같은 좋은 것들을.......”
“성녀님 말씀이 맞아요.”
“그런데 왜?”
“옛날 일입니다.”
카르안의 눈이 흐릿해졌다. 그의 의식은 과거를 향해 있었다. 공허한 모습. 그의 눈을 바라본 뮬리펜은 흥분이 사그라졌다.
“증오했고, 복수했고. 그리고 그게 끝나니 내 인생을 뒤틀려 있었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반쯤 썩은 채로 살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카르안은 최강민의 35년 인생을 짧게 요약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뮬리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르안에게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고독이 느껴졌다.
“성녀님. 저는 당신의 삶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 선(善)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 그 누구도.”
“......”
“저에게만은 그런 것을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산책길에서 이야기하듯 느긋한 목소리다. 하지만 뮬리펜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녀는 확신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 남자는 카르안이 아니다.
카르안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과거에서 현실로. 그는 뮬리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겁던 분위기가 다시 풀어졌다.
“그렇다고 제가 못된 짓만 골라하는 싸이코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르안이 살짝 웃었다. 뮬리펜은 입술을 꽉 물고 서 있었다.
“슬슬 돌아갈까요. 더 있다가는 불침번 서는 병사에게 이상한 오해라도 받을 것 같습니다.”
“무슨.......”
짓궂은 농담. 뮬리펜은 화를 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둘은 말없이 야영지로 돌아갔다. 반딧불 몇 마리가 안내원처럼 그들의 길을 알려주었다. 제법 멋진 밤이었다.
2.
흑룡회 사무소.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든다. 2주도 넘게 비웠다가 다시 찾은 곳. 카르안은 그뿐이었지만, 러슬라이는 영 표정이 침침했다.
‘하아. 또 굴러야겠구나.’
2주간 휴가 같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처음 일주일은 마차에서 고생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관광지에서 즐겁게 놀다가, 고급 마차를 타고 편하게 돌아왔다.
고생한 것이라고 해봐야 고라니와 데스나이트와 싸운 일. 그마저도 큰 위험은 없었다.
러슬라이는 쓸쓸한 표정으로 조직의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조직원들이 안에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무슨일 있냐? 왜 다들 굳어있어.”
“이런 씨. 그래도 좋을 때 돌아왔구만.”
오랜만에 보는 제이크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러슬라이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놈이 말하는 ‘좋을 때’ 라는게, 정말 좋은 시간일 리가 만무했다.
“설명 좀 해봐.”
뒤에서 카르안이 나섰다. 그가 보기에도 조직은 지금 긴장 상태였다. 조직원들이 전부 무장하고 있었던것. 제이크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조만한 한번 크게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3.
“결투?”
“그래. 나랑, 저 알페라츠가 기사단장 놈이랑.”
사이프카르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담배 하나를 꺼냈다. 옆에 부하가 얼른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카르안의 변한 얼굴에 조금 놀랐지만, 딱히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머리아픈 일이 생겼다.
“그런데 웬 결투입니까.”
“그게, 약 때문에 백작가랑 시비가 붙었어.”
사이프카르가 짧게 설명했다. 카르안이 약을 잔득 만들어 준 덕분에, 흑룡회는 이리저리 바쁘게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불법 약물을 뿌리는 것을 알고, 백작가에서 수사가 들어온 것이다.
“이건.”
백퍼센트 흑룡회 잘못. 애초부터 약을 판다는게 잘못된 거니까.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아니, 그 백작가 놈들이 우리 VVIP 초특급 고객이었단 말이야. 근데 미친놈들이 약이 많으니까 반값에 달라고 하잖아.”
“백작가에서 약을 산다고요?”
“그래. 그 백작놈이 뽕쟁이거든.”
“.......”
영지 치안이 개판인 이유가 있었다. 약맞고 놀다가 제대로 관리를 안한 것이다.
“개판이군요.”
“그렇지. 우리 조직일이라는게 원래 그래.”
잘잘못을 따질게 아니었다. 흑룡회나 백작가나 둘다 도찐개찐.
“단연히 반값은 안되고, 조금 깎아주긴 한다고 했지. 근데 이놈들이 살짝 밀어주니까, 미친 듯이 당기더라고. 반값 아니면 안 사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약을 판 죄로 우리를 빵에 넣어버리겠대.”
“더럽고 치사한 놈들!”
러슬라이가 분통을 터트렸다. 카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거기서 거기야 임마.......’
“아무튼 그 기사단장놈이 와서 그러더라고. 그래서 좆까라고 했지.”
“기사단장이면 백작가의 아들 타브?”
“타브 맞냐? 이름을 못 외워서.”
“맞습니다. 기사 타브 알페라츠.”
러슬라이가 대답했다. 타브. 카르안이 잘 아는 자였다.
용병 길드에서 카라나리를 죽일 듯이 패던 놈.
카라나리의 나름 정중한 욕설 한마디도 못 참은 녀석이다. 당연히 쌍욕을 먹었으니 꼭지가 돌아 버렸겠지.
“그러니까 갑자기 칼을 뽑더니 한판 붙자고 하더라고. 나도 좋다고 했고. 결국 이렇게 된거야.”
“그러면 그 결투는 언제하나요.”
“내일오전. 아침부터 땀좀 흘려야겠어.”
카르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이프카르의 힘은 모르겠지만, 타브는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다.
아무리 처음 한방을 허용했다지만, 카나라기마저 그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놈의 어떻게 해야 잘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그런 카르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이프카르는 진지한 얼굴로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