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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아! 하아!”
카르안과 러슬라이는 있는 힘껏 달려갔다. 라이도 뒤에서 석궁을 들고 쫒아오고 있다.
러슬라이야 원래 기사급 체력을 가지고 있었고, 라이는 현직 기사. 카르안은 일반인보다 체력과 근력이 2배 이상 강했다. 아무리 발빠른 짐승이라 하더라도, 거리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쿨럭!"
카르안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체력이 빠지자, 병때문에 가슴 안이 저릿했다. 잠깐은 몰라도, 장시간 달리기는 위험했다.
“이거나 처먹어라!”
그때 러슬라이가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던졌다. 은빛이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끄악!”
고라니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동물 특유의 민첩함. 나이프는 고라니의 목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몸을 틀어댄 덕에, 거리가 대폭 좁혀졌다. 카르안과 라이는 동시에 몸을 던졌다.
“잡았다! 요놈!”
“끄아악! 끄아아악!”
고라니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었다. 야생동물답게 있는대로 발버둥을 쳐 대는데, 소문답게 힘이 굉장히 강했다.
“크윽! 연금술사님! 꽉 잡으십시오!”
“말 안해도!”
카르안이 고라니의 목을 꽈악 졸랐다. 원래라면 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의 힘이 워낙 강해서 가능한 일. 고라니는 몇 번 발버둥 쳤지만, 얼마 안가 힘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이렇게 힘이 좋은놈은 처음보는군요. 석궁이 빗나가는 바람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닙니까.”
카르안이 말했다. 라이는 피식 웃으며 고라니를 번쩍 들어올렸다. 카르안이 도와주려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런건 사냥꾼이 드는 법이죠. 실수로 빗맞춘 벌입니다.”
“그럴필요는 없으신데.”
“그나저나 힘이 정말 좋으시군요. 당장 기사단에 들어오셔도 되겠어요.”
라이가 고라니를 목에 둘러매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검술도 영 시원찮아요.”
기사단에 들어오라고 한 것은 농담이었지만, 카르안의 힘에 라이가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연금술사가 아니라 무슨 전사라 해도 믿겠군.’
저 대머리 경호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금술사라는 사내가 자신과 비슷하게 달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흑룡회라는게 정말 대단하긴 한가봐.’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러슬라이도 뒤따라 걸어왔다. 단검을 던지느라 조금 뒤쳐진 것이다. 그는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그나저나 참 멀리도 왔네요. 성녀님이 기다리시겠습니다.”
“빨리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네요.”
라이도 수긍하는 눈치. 그들은 기절한 고라니를 들고 호숫가로 향했다.
“그나저나 꼭 이런대서 보면 막 성녀님이 사라져있고........”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러슬라이의 말에 라이가 한마디 했다. 다른 교단이라고 해도 성녀는 성녀.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냥 심심해서 해본 말입니다.”
카르안이 검을 꺼내어 풀등을 헤치며 나아갔다. 꽤나 멀리 떨어졌지만, 근처에서 자주 사냥을 하던 라이가 길을 잘 알기에 문제 없었다.
“그나저나 왜 이리 한기가 들지? 햇볕이 없어서 그런가?”
카르안이 살짝 몸을 떨었다. 방금 전까지 뛰어다니느라 몸이 후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늘해졌다. 러슬라이도 뭔가 이상한 눈치.
툭.
고라니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라이가 바닥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는 검을 뽑더니 몸을 낮추었다.
“지금 뭐하는......”
동시에 러슬라이도 검을 뽑았다. 그도 뭔가를 느낀 것 같다. 카르안도 사태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단검에 손을 뻗었다.
“형님. 방금 전 농담 말입니다.”
“그게 왜.”
“아무래도 악당은 공주님만 노리는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연기가 몰려들었다. 그 불길한 기운은 한 곳에 뭉쳐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아니 인간이라도 하기는 너무나 기괴했다. 빛조차 삼킬것같은 검은색 갑옷. 투구에서 얼굴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있었다. 그 놈은 따뜻한 생명체의 숨 대신 얼음같은 냉기를 뿜고 있었다.
“저건.”
“데스나이트입니다. 젠장. 고라니 사냥왔다가 이상한 놈을 만나는군.”
2.
놈은 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눈은 없었지만,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라이와 러슬라이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데스나이트는 죽은 기사를 주술적으로 살려낸 괴물이다. 실력있는 흑 마법사, 재물과 굉장한 마력,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기에 그 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공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전사이기도 했다. 데스나이트의 전투력은 일반적인 기사를 뛰어넘었다. 과거에도 강했던 기사를 온갖 주술로 강화시키기 때문.
물론 같은 기사라도 실력의 편차가 심한만큼, 저 데스나이트들도 개체마다 실력차이가 상당했다. 저 데스나이트가 비교적 실력이 형편없는 녀석일 수도 있다.
“뒤진 시체주제에 뭘 그리 꼬라보냐.”
러슬라이의 검이 오러로 빛났다. 라이도 석궁을 땅바닥에 놓았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듯.
“위대한 뮤프리드여. 그대의 권능을 빌려주소서.”
강력한 신성력이 라이의 검을 감싸안았다. 데스나이트는 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허, 이놈이 겁먹었나 보군. 먼저 들어간다!”
“하압!”
둘이 돌격을 시작했다. 그제서야 데스나이트도 검을 뽑았다.
냉기가 서린 검. 데스나이트의 검은 스치기만 해도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하지만 러슬라이와 라이는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치잉!
러슬라이의 검과 데스나이트의 검이 부딪히며 굉음을 내었다. 라이는 바로 검을 찌르지 않고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데스나이트의 허리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와 맞춰 러슬라이도 목을 노렸다. 데스나이트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머리를 비틀어 피하고, 허리를 검으로 막았다.
“뒤져라!”
러슬라이의 검이 미친 듯이 몰아쳤다. 실로 폭풍같은 기세. 평소 상급자에게 싹싹거리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라이는 정교하게 검을 움직이며 빈틈을 노렸다. 실로 훌륭한 콤비였다.
문제는 그 훌륭한 공격을 데스나이트가 전부 막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러슬라이도 오러를 사용하고, 라이는 성기사다. 공격만 성공한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타격이 안 들어가고 있었다.
“크윽!”
힘이 아닌 기술 차이 때문이다. 라이가 굴욕적인 신음을 내뱉었다. 두 명이서 공격하는데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성기사인 그에게 더없는 굴욕이리라.
그 때문일까. 라이는 무리한 공격을 시도했다. 동작이 큰 베기.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침착하게 그 검을 막아내었다.
“엇!”
동시에 그의 비어있는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러슬라이도 눈치채고 데스나이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조금 늦는다. 저 괴물은 라이의 다리를 베고 러슬라이의 검을 막아낼 것 같았다.
티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가 물러났다. 무언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데스나이트는 분노한 듯 카르안을 쏘아보았다. 그가 석궁을 들고 있었기 때문.
“부하가 땀나게 싸우는데 보고만 있기 민망하거든.”
카르안은 다시 석궁을 장전했다. 처음 쏴 보는 것이지만, 워낙 가까이서 쏜 덕에 머리를 맞출 수 있었다. 게다가 거대한 사냥용 석궁. 물리공격에 내성이 강하더라도 무시할 물건이 아니다.
데스나이트는 카르안에게 달려드려 했지만 러슬라이의 검에 막혀버렸다.
“감사합니다. 연금술사님!”
라이가 자세를 잡고 공격을 시작했다. 과연 3:1 구도가 되자 데스나이트도 당황한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자꾸 카르안이 석궁으로 견제를 했다. 그 덕에 데스나이트의 방어에 틈이 생겼다.
러슬라이의 검격에 갑옷이 부서지고, 라이의 찌르기에 데스나이트의 푸른 마나가 피처럼 흘렀다.
데스나이트가 분노한 듯 굉음을 내뱉었다. 카르안은 겁먹기는커녕 대담하게 웃었다. 아무리 매서운 분노라도 그에게 닿지 않으면 그만이다. 데스나이트도 피해가 누적되어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결정타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왔다. 맑은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알샤인의 권능으로, 방황을 멈추어라.”
“크아아아악!”
환한 빛이 터지더니, 데스나이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말 그대로 훅 꺼져버렸다. 카르안이 고개를 돌리자 뮬리펜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빛과 어둠은 상극. 언데드인 데스나이트는 얄샤인의 권능에 특히나 취약했다. 게다가 뮬리펜은 성녀다. 맹해 보이기는 해도 신성력 하나는 손에 꼽을만큼 강했다.
“하아. 이게 무슨 일이죠?”
“저희도 그게 궁금합니다.”
카르안이 라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도 고개를 저을 뿐. 갑자기 데스나이트가 왜 그들을 습격한단 말인가.
“이거 가져가면 돈이라도 되려나.”
러슬라이가 데스나이트의 시체를 뒤졌였다. 놈의 몸통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껍데기같은 갑옷 뿐.
“돈이 될 만한 것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검이라면.........”
“하, 죽기살리고 싸웠는데. 보상이 있어야지.”
라이의 말을 무시하고 러슬라이가 갑옷 안을 뒤졌다. 뮬리펜은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그들에게 검을 휘두른 괴물. 러슬라이는 그 잔해를 겁도 없이 뒤져대고 있었다.
“여기 뭐가 잡히는데.”
“이상한거 아니지?”
러슬라이는가 손을 쑥 뽑았다. 사전만한 두께의 책. 러슬라이는 책을 펼치고 읽어보았다.
“뭐라고 적혀있나?”
“골렘........ 마나회로? 무슨 전문서적 같습니다.”
카르안이 책을 받았다. 표지에 제목은 없었지만, 한두장 정도만 읽어도 연금술에 관한 책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싼건가요?”
“그거야 읽어봐야 알겠지.”
워낙 두껍다 보니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카르안이 말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
“예. 아쉽게도.”
러슬라이가 입맛을 다졌다. 그때 카르안이 품에 손을 넣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정확한 가치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같은데.”
“형님.”
“이것은........”
금화였다. 카르안은 뮬리펜과 라이, 러슬라이에게 금화를 3개씩 건넸다. 원래 전투후 얻은 전리품은 나누는게 원칙이니까.
하지만 카르안은 이것을 얻고자 마음먹었다. 원래 연금술사의 책은 가치있는 물건이다. 이 책은 그가 잘 모르는 골렘생성에 관한 책.
과거 그가 살던 세계와 다르게, 아케르나라에서는 정보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법사나 연금술사는 자신의 지식, 연구성과를 꼭꼭 숨겨둔 채로 산다. 그 지식은 자신이 인정한 제자나 아들, 딸 같은 혈육에게만 전수된다.
그러기에 연금술을 배우려면 누군가의 제자가 되거나, 자신의 지식 일부를 건내주며 배우는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다.
왕립 연금술 아카데미나, 마법에 관련된 학교들이 있기는 했지만, 학비가 매우 비싸고 깊이 있는 기술을 배울수는 없었다. 학생을 가르켜야 할 선생들 마저 자신의 기술을 몰래 숨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금술이 적힌 책은 더없이 귀중하다. 이게 돌팔이 연금술사일지 진짜 연금술사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데스나이트의 품에서 나온 물건이면 심상치가 않았다.
“저는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황금 고라니를 잡으러 왔다가, 진짜 황금을 얻게되는군요.”
“이런 것을 받을수는 없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라이와 다르게 두명은 금화를 거절했다. 러슬라이야 그냥 한번 튕겨보는것에 불과했고, 뮬리펜은 정말 받을 수 없다는 표정.
“받지 않으시면 제가 나쁜놈이 되지 않습니까. 러슬라이 너는 헛소리 하지 말고.”
“으하하........”
러슬라이는 어색하게 웃더니 냅다 금화를 챙겼다. 뮬리펜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고집 쎈 여자였다.
“받지 않으신다면, 이 돈은 나중에 기부라도 하도록 하지요.”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제 성형 비용은 필요없다. 쪼잔하게 굴 필요 없겠지.
일행은 고라니를 업고 마을로 돌아갔다. 카르안은 산길을 내려가면서도 책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단 골렘 생성에 관한 실전과 이론이라. 나쁘지는 않아.’
그의 예상대로 대부분의 내용은 골렘에 관한 것이었다. 카르안은 대충 목차를 훑어보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윽?!
”“왜 그러싶니까?”
“잠시 발이 미끄러져서.”
“조심하십시시오 형님.”
미끄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내용은 그를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연금술을 이용한 저주가 걸려있던 것이다.
‘이래서 데스나이트가 근처에 있던 것이로군.’
이 책의 저주. 주인이 아닌자가 책을 집으면 일정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정교한 연금술 기교로 풀어내거나 죽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저 데스나이트는 근처 연금술사의 연구소에서 이 책을 가져온것. 그런데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주변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데스나이트가 무슨 연금술적인 지식이 있겠는가.
'그 전설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것같네.'
라이가 숲에 들어오자마자 한 이야기. 골렘을 연구하던 연금술사. 물론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책에 이정도 저주마법을 걸어놓는것은 어지간한 실력으로 불가능했다.
다행히 데스나이트가 죽으면서 저주는 풀려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카르안도 고생했을 것이다.
‘나중에 전부 읽어 봐야겠어.’
그는 책을 덮었다. 표지가 없는 책. 책 한 구석에는 묘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무르짐의 제자 벨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