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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치료하지 못했나요?”
“나도 당연히 이리저리 알아봤지. 그런데.......”
예드프리어도 당연히 여러 방법을 알아봤다. 뮤프리드교가 자랑하는 성기사. 돈도 명성도 충분했으니까. 그는 연금술사와 백마법사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의 빠져버린 머리를 고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들 내 머리카락의 근본이 사라졌다고 하더군. 가지나 몸뚱이가 잘린 나무는 살릴 수 있지만, 뿌리가 잘린 나무는 살릴 수 없다면서. 나의 뿌리는 어디로 갔는가?”
“그거 참........”
카르안이 안타까움에 차서 말했다. 탈모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슬픔만은 공감할 수 있었다.
“차라리 가발이라도.”
“나는 기사였네. 말을 타고 검을 휘둘러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쓰고 싸우겠나.”
말을 조금만 타고 달려도, 가발은 쑥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는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아.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존경보다는 비웃음부터 짓더군. 황금 사자라는 칭호도, 이제는 수치스러운 별명이 되었네. 전투에 나가면 적들은 나를 보고 털 빠진 사자라고 놀려대었지.”
카르안은 괜스레 머리를 만지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힘써보도록 하지요.”
“할 수 있겠는가?”
“가능은 합니다.”
카르안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포션의 제조법이 떠올랐다. 초강력 발모제. 그리고 머리의 독을 해독할 해독제.
그린 드래곤의 브레스에 맞았다면, 일종의 저주가 따라붙는다. 생명력을 억제하는 저주. 물론 예드프리어도 치료를 받으면서 저주를 풀었겠지만.
연금술사 카르안이 보기에는 아직 그 잔해가 망령처럼 남아있었다.
물론 워낙 희미해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지만, 모낭 재생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는 저주를 완벽하게 해주할 포션,
“필요한 게 무엇인가? 재료를 구해주겠네.”
예드프리어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의 눈에 약간의 희망이 감돌았다.
“일단 발모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거기 필요한 재료가 처녀를 보면 달려드는.......”
“유니콘이란 말인가.”
예드프리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처녀를 보면 따라온다는 전설속의 환수.
하지만 괜히 전설은 괜히 전설이 아니었다. 그만큼 보기가 더럽게 힘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들다.
설령 본다고 해도, 지혜롭고 마법적인 능력이 뛰어나서 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공격하려 들면 각종 원소마법을 날려대고,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텔레포트로 도망가 버린다.
게다가 육체적인 능력도 대단해서, 그냥 발로 도망가기만 해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덕분에 유니콘의 뿔이나 심장 같은 부위는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황금 고라니의 심장입니다.”
“황금 고라니!”
유니콘과 비슷하게 처녀만 보면 달려든다. 반면 유니콘처럼 희귀한 동물은 아니다. 황금이라는 것도 그냥 털색이 금색이라 그렇게 불리고 있던 것.
딱히 마법적인 능력도 없다. 대신에 힘이 워낙 좋아서 쉽게 잡을 동물은 아니었지만. 유니콘과 비교할 만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이라면 지금 당장 줄 수 있는데.........”
“잡은 지 2일 이내여야 합니다. 생명력이 풍부할때여야 하니까요.”
“그러면 새로 잡아야겠군.”
그 넘치는 힘 때문인지, 황금 고라니가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중년 남자들은 고라니의 고기를 즐겨 먹었다.
발모제도 그 고라니의 폭발적인 활기를 이용한다. 카르안은 그 다음 재료를 말했다.
“그리고 포이즌 오우거의 독주머니입니다.”
“독주머니?”
예드프리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탈모치료에 독이라니.
“교주님 머리에 남아있는 독. 그것을 완전히 제독할 것입니다.”
“응? 내 머리에 아직도 독이 남아있나?”
“거의 없습니다만. 그래도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믿어 보겠네. 흠. 포이즌 오우거라니.”
오우거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유명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것이 포이즌 오우거. 강렬한 독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기조차 힘든 놈이다.
이독제독. 머리에 붙은 저주를 풀어내려면 그 독이 필요하다. 물론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러면 독주머니는 매물을 찾아보지. 그리고 고라니를 잡는 것은 내가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겠네.”
“네. 그러면 시간이 얼마정도 필요할까요.”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일 정도 기다리라는 말인가.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틀 뒤에 여기로........”
“아니, 두 시간만 기다려보게.”
교주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름대로 급한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향했다.
“느긋하게 차나 즐기고 있게나. 지금 당장 유능한 사냥꾼들을 구해오지.”
“아니 뭘 그리 급하게..........”
카르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꽝 닫혀버렸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것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2.
“자! 지금 당장이라도 그 고라니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일세.”
예드프리어는 두 명의 사람을 데리고 왔다. 한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
“이 자는 우리 뮤프리드 기사단 최고의 활잡이라네. 사냥이 특기지.”
“반갑습니다. 라이 라고 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한눈에 봐도 날렵해 보이는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은 아무리 작은 사냥감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안에 눈에는 라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옆의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도 카르안과 마찬가지였는지, 살짝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분은, 교류차원으로 알샤인 교단에서 오신 성녀님이네. 워낙 귀하신 분이라 다른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계속 돕고싶다고 하셔서.......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아, 그게........”
카르안은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여자도 굳어진 표정. 교주도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챘지만,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흠. 뮬리펜 성녀일세."
두 사람은 딱딱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동시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
“당신이 여기는 왜 또 오셨나요.”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카르안과 뮬리펜 그리고 러슬라이와 라이는 숲을 향하고 있었다. 황금 고라니가 자주 출몰한다는 지역. 그곳에서 사냥을 할 계획이었다.
“저는 알샤인 교단과 뮤프리드 교단의 교류를 위해 온 것이에요.”
서로 적대하는 교단이 아닌 이상, 각 교단은 주기적으로 적당한 위치의 인물들을 대신전으로 보냈다. 서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
보통 일주일정도 지내게 되며, 대신전을 둘러보거나 서로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뮬리펜이 선택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있는 알페라츠 백작령과 뮤프리드 대신전이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녀쯤 되면 ‘적당한 위치’에도 어울렸다.
“그래서 카르안 씨는?”
“얼굴 고치러 왔습니다.”
“.........”
뮬리펜이 눈썹을 찌푸렸다.
“후, 아무튼 이번일은 예드프리어 교주님과 약속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이제 다 와갑니다.”
라이가 소리쳤다. 그는 뮤프리드 기사단이 자랑하는 사냥꾼. 대신전 근처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황금 고라니가 많이 나오더군요.”
“혹시 황금 고라니도 사냥해보신적 있습니까?”
카르안이 물었다. 아무래도 순결한 처녀를 미끼로 삼아야 하는 만큼, 흔한 사냥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사실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사냥이 황금 고라니 사냥이지요.”
“하필 왜 고라니죠?”
“교주님이 즐겨 드셔서 말입니다. 이번 달에도 3마리나 잡았거든요.”
고라니 전문가 라이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황금 고라니는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역시 중년이 되면 교단의 교주나 동네 아저씨나 고민은 비슷비슷한 것일까.
‘대체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카르안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 그 동물이 그렇게 맛있나요?”
오직 뮬리펜 성녀만이 순진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남자들은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몇 분 더 걷자 커다란 호수가 나왔다. 산속 깊은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 호수 주변에는 이름 모를 꽃들로 알록달록 채색되어 있었다.
“경치가 죽입니다. 형님.”
카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동화속 한 장면 같았으니까. 라이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정말 멋진 곳이죠. 그런데 이곳에도 어떤 전설이 있습니다.”
“전설 말씀입니까.”
“이곳에 뛰어난 연금술사가 숨어서 연구를 했다더군요. 백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무슨 연구를 했는데요?”
“썩 좋은 연구는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힘에 취해서 여러 가지 골램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전투용이었다고 합니다.”
라이는 ‘그냥 전설일 뿐이니까요.’ 라고 덧붙인 후, 뮬리펜에게 말했다.
“그러면 뮬리펜 성녀님이 저 호숫가에 앉아계셔 주시면 됩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괜찮나요?”
“네. 마침 저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네요. 길어봐야 30분에서 1시간?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라이가 바위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뮬리펜을 고개를 끄덕인 후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다니 바위 위에 폭 앉았다.
“자, 저희는 저쪽 풀숲 안에서 기다립시다.”
“주변에 있으면 안 되나요?”
“주변에 남자 여러 명이 있으면 도통 다가오질 않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몸을 숨겨야 해요.”
전문가가 진지하게 말하자 들을 수밖에. 그들은 적당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라이는 커다란 석궁과 볼트를 꺼냈다. 사냥용 석궁. 반면 카르안과 러슬라이는 단검을 꺼냈다.
둘 다 석궁이나 활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 분명 황금 고라니 근처에는 성녀도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활을 쏘다가는 뮬리펜이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숙련된 사냥꾼인 라이만이 석궁을 챙긴 것.
“그나저나 성녀님은 정말........”
라이가 뮬리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뒷말을 삼켰지만, 카르안과 러슬라이 모두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위에 앉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다행히 강하지 않은 햇빛. 따뜻한 오후의 태양이 그녀의 금발을 비추고 있다.
하얀 피부, 허리까지 오는 금발, 조금 처진 눈꼬리 덕에 순한 양같이 선량해 보이는 얼굴. 반면 금단의 과실을 떠올리게 할 만큼 붉고 탐스러운 입술이 묘한 부조화를 일으켰다.
주변 풍경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녀가 풍경에 어울리는 게 아니라, 풍경이 뮬리펜에게 어울린다고 해도 됐을 정도. 그녀가 호수 근처에 앉자, 뭔가 허전하던 명화가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뭐. 예쁘기는 하지요.”
“흠흠.”
라이는 고개를 저으며 주위에 집중했다. 그는 사냥을 하러 온 것이지 성녀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굴이 자꾸 붉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뮬리펜을 쳐다보던 러슬라이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시간이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뮬리펜은 조금 지루한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엇! 사냥꾼양반!”
“쉿.”
라이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뮬리펜 근처로, 사슴처럼 생긴 동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는 동물이었다.
“저 녀석이 황금 고라니?”
“맞습니다.”
라이의 눈이 고라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지되어 있는 눈과 정 반대로, 그의 손은 능숙하게 석궁을 장전했다. 석궁을 보지도 않고 순식간에 볼트를 먹인 그는 천천히 조준을 시작했다.
“성녀님과 조금 떨어지면 쏘겠습니다. 두분은 바로 달려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카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수풀속 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황금 고라니는 성녀의 주변을 느린 걸음으로 돌고 있었다.
“후우.......”
라이가 숨을 고르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고라니가 성녀와 조금 떨어진 순간.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끄아아아아아악!”
“제길! 빚나갔습니다!”
괴상한 고라니의 울음소리. 석궁을 쏜 순간 고라니가 몸을 움직였다. 우연의 일치. 지독한 불운이었다. 볼트는 고라니의 뒷다리를 쓸고 지나가버렸다.
“젠장!”
“그래도 크게 다쳤습니다! 쫒아요!”
“가자!”
세명의 남자는 동시에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끄아아아악!”
고라니의 슬픈 울음소리를 신호탄삼아, 한 낮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