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션으로 무한성장 (15)화 (1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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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용의 성채

카르안은 사이프카르에게 새 옷을 한 벌 받았다. 흑룡회의 간부를 상징하는 옷. 코트처럼 넉넉한 옷이었다.

전체적으로 흰 색에 금실로 장식되어 있었고, 등쪽과 가슴에는 검은색으로 용이 멋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카르안은 그 옷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일단 저희가 관리하는 가게부터 돌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주황머리.”

“제, 제 이름은 제이크 입니다.........”

주황머리, 제이크가 힘없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큰소리치지 못하는 게, 카르안에게 까불어대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카르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네. 주황이. 빨리 가보지.”

제이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근육질이 중얼거렸다.

“쯧쯧. 저놈은 항상 경박해서 문제입니다. 무릇 흑룡회의 일원이라면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카르안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놈의 본명은 러슬라이. 굉장히 묵직하고 충직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아부를 기똥차게 잘하는 놈이었다.

카르안이 ‘시험’에 통과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도, 그의 초능력 같은 눈치 덕분이다. 막상 확인해보니 부하에게 하는 짓은, 저놈이나 주황머리나 비슷비슷했다.

카르안이 자기 상관이 될 것을 예상했기에 깍듯이 대한 것. 카르안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딜 가나 사회생활은 잘하겠구만.’

셋은 나란히 걸어갔다. 보통 셋 중 가장 높은 사람이 앞장서서 걷지만, 카르안이 길을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조금 걷기 시작하자 무기점, 식당, 잡화상 등이 모여 있는 거리가 나왔다.

"중고 무기 삽니다! 녹슨 것도 상관없어요!"

"몬스터 가죽 구합니다! 종류 상관없이!"

"건조식량 팝니다~ 싸요, 싸! 딴대서 사면 호구입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시장 한복판에 온 것 같다. 상인들은 활기 넘치게 물건을 팔고 있다. 음식집은 목소리 대신 고소한 향기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러슬라이가 흐뭇하게 말했다.

“형님. 이쪽이랑 저쪽라인 쫘악 다 저희가 관리합니다.”

“이 많은 곳을?”

고작 한두 곳이 아니었다. 제이크는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대로 손가락을 쭉쭉 그어대었다. 전부 흑룡회가 보호하는 가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제이크와 러슬라이의 안내는 두 시간도 넘게 계속되었다. 카르안은 흑룡회의 규모를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알페라츠 백작령의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척 보기에도 이곳은 백작령의 노른자 땅. 와글와글한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상업지대 대부분을 관리하는 것이다. 백 개도 넘는 가게에서 받아내는 보호비만 해도 얼마나 엄청날지 .......감도 안 잡혔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군.”

“에이. 뭐. 이건 그냥 프롤로그 아닙니까. 보호비라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고. 저희의 진짜 돈벌이는 밤장사죠. 밤장사.”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돈을 받아내면 영주 입장에서는 난처하지 않을까.”

“영주 놈이 제대로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으니까요.”

제이크가 눈가를 찌푸렸다.

“용병이나 거친 여행객들, 다른 조직의 조직원들까지. 행패를 부릴 놈들은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영주가 병사를 풀어서 여기 시민들을 지켜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뭐, 그거 제대로 하는 귀족 놈들이 얼마나 있겠나만.”

“치안이 좋지 않군.”

카르안이 끄덕였다. 여기는 CCTV도 없고 체계가 잡힌 경찰도 없다. 밤에 길거리에서 칼침을 놓고 가도 제대로 된 수사가 불가능하다. 치안 관리는 전부 영주의 재량이다.

하지만 이 알페라츠 백작령은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한참을 돌아 다녔는데, 순찰을 도는 경비병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병사를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흑룡회. 깡패한테 치안을 맡길 정도라니. 얼마나 알페라츠 백작령이 막장인지 알 것 같다. 제이크가 싹싹거리며 말했다.

“또 저희 조직이 보통 조직입니까. 눈치가 보여서라도 함부로 못하죠.”

카르안은 이런 커다란 곳에 부 지부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귀족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대조직. 이곳이 흑룡회였다.

“그나저나 슬슬 점심이군. 밥이나 먹지.”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러슬라이가 말했다. 미리 식당까지 예약해 둔 것. 과연 아첨의 프로페셔널 다웠다. 이제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 카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기서 국수 먹고 싶은데.......”

“아, 그렇다면 취소해야겠군요.”

러슬라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카르안은 한숨을 쉬었다.

“기황 예약 했으니 거기로 가. 그리고 다음부터는 식당 같은 거 예약 안 해놔도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여기에 전화도 없지 않은가. 물론 마법적인 통신도구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고가의 물품을 식당마다 갖추고 있을 리가 없다. 누군가가 땀나게 뛰어가서 말해야 한다.

저 국수를 안 먹으면 죽는 것도 아닌데, 그런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다. 카르안은 러슬라이의 안내에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러슬라이가 중얼거렸다.

“저희가 하는 첫 식사 아닙니까. 이런 날은 좋은 것을 먹어줘야 앞으로 일이 잘 풀립니다.”

“별 쓰잘데기 없는 미신을 종교마냥 믿고 있냐.”

제이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대장을 모시게 된 첫날, 이런 역사적 순간에 길거리 막국수같은 서민 음식이라니. 너 같은 망나니는 모르겠지만........”

‘내가 먹고 싶다고 새끼야.’

날씨도 좋은데 칼칼한 국수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러슬라이가 하도 열심히 그를 치켜세워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카르안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약한 편이었다. 저렇게 정성껏 준비했는데 화를 내기도 뭣하지 않은가.

카르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갔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를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 않군.”

셋은 그들이 보호하는 가게에 잠깐씩 들렸었다. 인사 정도는 나눠야 했으니까.

가게의 주인들도 러슬라이와 제이크, 그리고 검은 용무늬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은 새로운 흑룡회의 간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카르안을 보는 그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보호를 해준다지만, 그래도 돈을 때가니 별로 좋아할 일은 아닐텐데. 오히려 과장스럽게 반기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야 저희가 보호 비를 많이 안 때니까요. 저희 대장의 방침입니다.”

“지부장 님의?”

예상 외였다. 그런 무시무시해 보이는 여자가 보호 비를 적게 걷다니. 어째 이미지와 정 반대였다.

“대신 그만큼 많은 가게들이 저희 밑으로 들어왔죠. 다른 조직에서는 보호 비라면서 수입의 절반씩 가져가는 놈들도 있으니까.”

"거 참 지저분한 놈들이군"

'흑룡회도 깨끗하지는 않지만.'

수입의 절반을 뜯어간다니. 그러면 그 가게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당장은 황금알은 낳는 거위가 되더라도. 얼마 못가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보호 비를 적게 걷는다면, 황금이 아닌 은덩이라도 꾸준히 낳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소문을 들은 다른 가게들이 흑룡회에게 보호를 부탁할 것이다.

이런 험난한 세계에서는 보호를 받기는 해야 하니까. 결국 관리하는 가게의 수가 많아지는 만큼 돈도 불어난다.

조직에 죽치고 있는 조직원들도 일을 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보호받는 평민들의 여론도 나쁘지 않다. 가게를 빼앗긴 다른 조직도 흑룡회같은 큰 조직을 건드리지 못한다........

‘나름대로 훌륭하군. 폭력 조직이라고 무식하게 설치다가는 도태된다.’

단순히 힘만 강한게 아니라,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할줄 안다. 흑룡회는 맹수일 뿐 아니라, 아주 영악한 맹수였다.

“이렇게 한번 얼굴을 비췄으니, 이제 부대장을 함부로 대할 놈은 없을 것입니다.”

첫인상. 카르안은 말없이 끄덕였다. 이정도 대형조직은 처음이지만, 자신의 위치가 태산같이 단단한 위엄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경박하지도 않고 너무 심각하지도 않게. 마치 이게 당연한 것처럼 인사한다. 새로운 흑룡회의 부 지부장. 그런 사람이 경박해 보인다면, 조직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절대로 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간단한 일이지만, 의외로 어렵기도 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래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카르안은 그에게 인사하는 상인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으아아앗! 조심해요!”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동시에 뜨거운 육수가 카르안의 가슴팍에 쫙 쏟아졌다. 여유롭던 제이크와 러슬리아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2.

“죄,죄, 죄송해요. 발이 미끄러져서.......”

소녀였다. 이제 12살쯤 되어 보이는. 국수를 옮기다가 그만 돌덩이에 걸려 넘어진 것. 덕분에 국수가 담긴 그릇은 부웅 떠서 한 남자를 덮쳤다.

사과해야 한다. 그녀는 넘어져 다친 무릎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주변이 묘하게 조용했다. 이상한 분위기. 왁자지껄 떠들던 상인도, 검을 두드리던 대장장이의 망치도, 모두 침묵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게.........”

소녀는 말을 잊지 못했다. 두 명의 남자. 그리고 중간에 흰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들의 옷에는 처음 보는 괴물의 얼굴이 수놓아져 있었다.

검은 용

흑룡회의 상징.

그녀는 어머니에게 수도 없이 들은 경고가 있었다. '검은색 용을 조심하거라.' 이곳 상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바로 저 옷. 저 문양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흑룡회가 시민들을 건드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조직과 전혀 관련 없을 때 이야기다. 흑룡회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조직을 기사단에 신고하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쓴 맛을 보았다.

돈을 갚지 않으면 속옷까지 전부 벗겨진 채 노예로 팔려간다. 그 정도는 애교 수준이고, 흑룡회가 관리하는 도박장에서 손장난을 치다가, 대낮에 광장에서 '인체의 신비전' 의 주인공이 된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다른 경우지만. 대낮에 흑룡회의 간부가 국수를 뒤집어썼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카르안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더욱 불안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새로운 간부다. 하지만 외모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오크도 산채로 씹어 먹을 것 같이 생겼다.

카르안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녀는 죽음을 직감하며 와들와들 떨었다.

“으으으...... 죄송해요오....... 살려주세요오.......”

“쯧. 앞좀 잘 보고 다니지. 많이 다쳤냐?”

카르안이 소녀의 무릎을 보았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쓸려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히극, 다치면 팔려갈때 몸값이 떨어지나요?”

“뭔 소리야. 그보다 네가 부딪힌거라 국수 값은 못준다? 아, 새 옷 다 배렸네.”

카르안이 투덜거렸다. 목욕탕부터 가야하나. 다행히 국수가 아주 뜨겁지는 않았지만, 몸에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그때 러슬라이가 나서며 소리쳤다.

“흠. 형님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하시니 지금 당장은 넘어가마. 그리고 국수집을 하는가본데. 가게 주소 불러.”

주소를 부르라는 말에 소녀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발 가게만은....... 저희 어머니가 힘들게 꾸려 나가시는 곳이란 말이에요!”

“하. 애가 잘못하면 어른이 책임을 져야지.”

제이크도 거들었다. 험악해진 분위기. 물론 러슬라이나 제이크도 어린애한테 분풀이를 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의 형님이 용서했으면 그만인 것. 하지만 흑룡회의 조직원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흑룡회의 알페라츠 백작령 지점. 부 지부장이 길거리에서 국수사발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그냥 넘어간다?

만약 귀족이 그랬다면 대범해 보이고 자비로움을 칭송 받을 것이다. 다만 흑룡회는 그냥 귀족이 아니라 암흑가의 귀족.

자비롭다기보다는 만만해 보인다는 인식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는 흑룡회와 카르안, 둘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대충 겁만 주고 말아야지.’

러슬라이가 생각했다. 여기서 분위기만 잡는거지, 나중에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카르안도 그들의 뜻을 눈치 채고 말리지 않았다. 저 꼬마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저기, 수건 하나만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부하 둘이 으름장을 놓는 사이, 카르안은 상인을 붙잡고 말했다. 과일을 파는 남자였다. 그는 말을 듣자마자 귀신같은 속도로 수건을 준비해왔다. 젖은 수건과 마른 수건 한 장씩.

그는 대충 국물을 닦았다. 특유의 끈적함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소녀 쪽을 보자 그녀는 훌쩍거리며 주소를 말하고 있었다. 카르안은 미안함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나중에 가서 사과해야겠군.’

지금은 모른 척 해야 한다. 카르안은 금화 한 장을 꺼내서 수건을 건넨 사내에게 건넸다. 그는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 정도까지는.........”

수건 두 장 빌리고 금화라니. 터무니없는 가격. 주변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인도 잠시 망설였지만, 카르안의 마음이 변할세라 얼른 받아먹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주변 사람들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 찼다. 일반 시민은 꿈도 못 꿀 사치. 당연히 이것도 보여주기 용이다. 한번 망신을 당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금화를 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으로 ‘국수를 뒤집어쓴 부대장’에서 ‘역시 암흑가의 간부’로 이미지가 조금은 바뀔 것이다.

“이제 슬슬 가지.”

“네!”

부하들이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돌발 상황이 터졌지만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 더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 그들은 자리를 뜨려했다.

“잠깐, 당신들! 지금 무슨짓을 하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본 카르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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