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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용의 성채
“얼굴은 마음에 드는데.”
“네?”
“너, 얼굴, 내 마음에 든다고.”
사이프카르가 입을 열었다. 카르안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마음에 든다니. 얼굴이?
그는 자신이 추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기 전에는 몰라도, 이 몸은 말할 것도 없이 못생겼다.
그런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다니. 서글프게도 기쁨보다는 의심이 먼저 생겼다.
‘혹시 취향이 굉장히 독특한 게 아닐까.’
카르안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사이프카르가 그에게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부츠의 굽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녀는 카르안 앞에서 멈춰 섰다.
“이정도 얼굴이면 상대가 싸우기도 전에 도망가겠어.”
“.......”
“확실히 저 녀석이 남자답게 생기긴 했지. 기생오라비 같은 놈들은 말이야. 중요할 때 힘을 못써.”
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안은 김빠진 소리를 냈다. 마음에 든다는 게 그런 쪽 이었나. 머리가 띵했다. 그녀는 카르안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냥 못생겼으면 자르려고 했는데, 이렇게 화끈하게 못생기니 박력 있고 좋네. 으흠. 으흠.”
그녀는 카르안을 품평하듯 한 바퀴 둘러봤다. 그러더니 그의 가슴팍을 장난스럽게 툭툭 쳤다.
“좋아. 합격.”
“아, 네. 감사합니다.”
카르안은 피식 웃어버렸다. 놀려대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너무 솔직하다 보니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 카르안에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사이프카르. 흑룡회 알페라츠 백작령의 지부장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카르안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장갑의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분 좋게 손에 감겨왔다.
“저는 카르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이프카르님.”
2.
그날부터 카르안은 흑룡회의 부 지부장이 되었다. 흑룡회가 큰 조직임을 느낀 것은, 그가 자리를 얻은 직후였다.
카르안은 그 자리에서 집 한 채를 받았다.
“편할 대로 쓰게.”
보스가 직접 준 것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카르안은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집 열쇠를 받았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지만, 그래도 집이 무슨 장난감인가. 과연 커다란 조직답게 선물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거기에 직속 부하까지 2명 붙었다. 주황머리와 근육질. 그들이 부하가 된 것. 오러를 쓰는 기사급 두 명이 부하라면 그 위치를 알만했다. 무엇보다 주황머리의 당황한 표정이 일품이었다.
“우리는 월급이 성과제야. 일한만큼 받는거지.”
“그렇군요.”
“뭐 열심히만 하라고. 그래도 기본급은 나가. 한달에 600실버.”
“600실버.......”
사이프카르의 말에 카르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적지 않은 돈이다. 만약 연금술 길드에 들어간다 해도 600실버보다 조금 덜 받을 것이다.
“대신 일만 잘하면 그거의 열배는 더 받으니까. 기본급은 그냥 굶어죽지 말라고 주는 거야.”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곳에 오기를 잘했다. 적어도 돈을 중심으로 봤을 때는.
카르안은 여관에서 짐을 가지고 새 집에 풀었다. 크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게다가 집에는 몇 가지 마법까지 걸려있었다.
그 마법 덕분에 카르안과 직속상관인 사이프카르, 보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문을 열 수 없었다.
보스가 카르안에게 이 집을 준 것도 그 보안마법이 핵심. 일이 일인 만큼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작지만 안전 하나는 금고에 버금가는 집이니까.
카르안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잘 말려저 바삭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상당히 좋았다. 그는 사이프카르를 떠올렸다.
“인간과 악마의 혼혈이라.”
황금빛 눈. 역시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마계의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이상 자세한 말은 듣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시무시할 만큼 강하다는 것. 알페라츠 백작령의 지부장인데도, 그녀에게는 경호원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무력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조직원들을 동원하지만. 평소에는 혼자 다녔다. 두 명의 직속부하를 경호원으로 둔 카르안과 대조적이다.
그 외에도 조직의 대략적인 정보를 얻었다. 카르안은 새로 받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카르안은 사무실에 출근했다.
집과 멀지 않은 거리. 걸어서 15분 정도 걸어가자 건물 하나가 보였다.
용병길드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다. 정문에 커다랗게 흑룡회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기 앞에는 검을 찬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가 오늘부터 일할 사무실이다. 카르안이 앞에 서자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무슨 일이냐.”
카르안이 말없이 작은 명패(名牌)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명패. 그가 흑룡회의 간부임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각에는 여러 마법적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지기의 눈이 커졌다. 그가 몸을 쫙 펴고 차렷 자세로 소리쳤다.
“실례했습니다! 카르안 부 지점장님! 어서 오십시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너무 큰 소리라 카르안까지 놀랄 정도.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침부터 기운차고 좋네.”
“감사합니다!”
문지기도 처음 반말을 한 것을 무마하기 위해 크게 소리친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의 처세술.
문지기가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어젯밤 새로 온 상관을 알아보겠는가. 정작 카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다. 건물 안에는 아직 조직원 몇 명밖에 없었다. 출근하기는 이른 시간.
원래 이런 조직원들은 대부분 밤에 출근해서 밤에 일한다. 그는 사이프카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불법 조직 맞지?’
일찍 와서 정리라도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너무 깨끗했다. 마치 이 방만 별개의 공간인 것처럼.
책상에는 서류들이 각을 맞춰 정리되어 있었고, 방을 꾸밀 장식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깔끔한 사업가의 방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할 일이 없어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사이프카르가 올 시간. 문이 열리며 양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일찍 나왔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녀는 방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짧은 치마, 답답한 듯 단추 몇 개를 푼 와이셔츠.
양복을 입었지만 단정하기는커녕 색기가 넘쳐흐른다.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이고 머리야. 어제 너무 마셨어.”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차가운 물이나 한잔 줘.”
카르안이 물을 따라주었다. 제법 많은 양이었는데, 그녀는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이제 좀 살것같네."
“으흠. 그런데 저는 이제 뭘 해야 될지........”
“네가 할 일은 뻔 하잖아. 포션제조. 아 그리고 괜찮으면 마약도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사이프카르는 시원하게 말했다. 딱히 돌려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인가.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여기 만들 수 있는 약이랑 필요한 재료 쫘악~ 다 적어. 아, 포션은 체력 회복 포션이랑 해독 포션만 만들면 돼. 마나포션 이딴 건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카르안은 종이를 받았다. 마약이라. 의외로 만들기 쉬운 물건이다.
다른 포션은 대부분 몸을 회복시키거나, 강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마약은 다르다. 사람의 몸을 파괴시키는 물질.
연금술사가 할 일은 독성을 최대한 줄이고 효과를 늘이는 것이다. 강화포션이나 회복 포션처럼 많은 마나를 주입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섬세한 연금술 기교가 필요하지만. 카르안에게는 문제없었다.
카르안은 새하얀 종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글자로 가득 찼다. 잠시후, 카르안은 종이를 사이프카르에게 건넸다.
“음? 이건 뭐야.”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카르안이 건네준 종이 한쪽을 가리켰다.
“제가 개인적으로 구매하고 싶은 것들입니다. 이것도 구해주실 수 있나 싶어서요.”
“돈만 지불한다면 문제될 것은 없지. 뭐, 그다지 비싼 재료들은 아니네......... 이것 하나만 빼고.”
그녀가 종이 위를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는 ‘숲의 심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르안은 단순히 돈만 벌려고 흑룡회에 들어온 게 아니다. 조직의 정보력과 힘. 귀한 연금술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 재료로 포션을 만들어 강해져야 한다.
포션 중에서도 강화포션은 구하기 힘들기로 유명하다. 일시적으로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증폭포션. 상처를 치료하고 마나를 회복시켜주는 회복 포션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적은 양이지만, 힘이나 마나를 영구적으로 올려주는 것이다. 검사 마법사 할 것 없이 모두가 탐내는 물건. 그만큼 만들기도 까다롭다.
‘그 물건을 여기서 만든다.’
마약을 팔아 큰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강화 포션의 재료를 구한다. 땀나게 재료를 구할 필요도 없고, 그저 연금술만 하면 된다.
연금술 길드에서도 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버는 돈이 비교가 안 될 만큼 차이가 난다. 당연히 그만큼 재료의 질과 양도 떨어질 수밖에.
“뭐 솔직해서 좋네.”
사이프카르가 씨익 웃었다. 마음에 든다는 듯이. 그녀는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만약에 네가 속여서 적었어도 눈치 못 챘을 텐데 말이야. 지금 여기에는 연금술사가 없으니까.”
“신뢰는 중요하니까요.”
카르안은 처음부터 두 종류의 리스트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약이나 회복포션에 필요한 재료인 척, 강화포션의 재료를 중간 중간 섞어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비로 강화포션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
어차피 카르안이 사용하는 것은 특수한 연금술. 재료를 알아볼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강화포션의 재료를 따로 적었다. 조직의 사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흐흐흠. 신뢰가 중요하다라.”
사이프카르는 카르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하며 중얼거렸다.
“너. 왜 네가 부 지부장이 됐는지 알아?”
“마침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자리가 비워졌냐는 말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카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놈, 전 부 지부장이 말이야. 우리 조직 마약에 손을 댔어. 지가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몰래 조금씩 훔치면 모를 줄 알았나보지. 당연히 나한테 들키고 잘렸지만.”
“하하.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나요.”
“뭘 하냐니....... 아, 직급이 아니라 목이 잘린 거야 바보야. 그런데 뭘 하겠어. 저승길에서 질질 짜고 있겠지.”
사이프카르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실은 목이 잘리기 전에 손가락부터 팔다리까지 다 잘렸거든. 그렇게 조직을 배신하면 뭐든 다 잘리는 거야.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토막 나기는 싫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 하는 거야. 너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사이프카르가 가볍게 말했다. 농담하듯. 자연스럽게. 순간 그녀와 카르안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아서 처신하라는 것이군.’
그녀 나름대로의 경고일까. 카르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조직에 물건에 손을 대면 저렇게 작살난다는 뜻이다.
“좋아. 그나저나 숲의 심장은 구하기 어려운데.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최대한 열심히 구해보지.”
“감사합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사이프카르가 말했다.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풀어졌다.
사이프카르는 그가 건 낸 서류를 옆에 두고 만년필을 꺼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딱히 할 일은 없는데. 적어도 연금술 재료가 와야 일을 시키지.”
그녀는 고민하듯 만년필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 오늘은 주변에 얼굴이나 비추라고. 애들 데리고 우리가 관리하는 가게랑 일하는 곳 한번 쭉 돌아봐. 걔들도 널 알아야 되고, 너도 걔들을 알아야 되니까.”
“그러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카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사이프카르의 방에서 나간 직후,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실 카르안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조직에서 주문한 마약과 회복, 해독 포션을 위한 재료목록. 거기에 고가의 재료 몇 개가 섞여있다.
카르안이 먹을 강화포션의 재료였다. 단지 일부러 목록을 2개 만들어 의심을 피했을 뿐.
밖에 나가자 주황머리와 근육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카르안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를 받았다.
‘들킨 줄 알았잖아. 조심해야겠다.’
포션 목록을 건네자마자 목이 잘리네, 팔이 잘리네 이야기를 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역시나 기우일 뿐. 절대로 조직에서 눈치 챌 일은 없다.
무르짐, 카르안의 연금술은 다르다. 같은 포션을 만들어도 다른 연금술사와 재료부터 차이가 난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알아볼 수 없다.
카르안은 서서 건물 밖으로 걸어갔다. 조직원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카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뵙겠습니다. 형님!”
카르안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조직이건 뭐건, 겁먹지만 않으면 사람을 속이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