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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르나라
“휴가?”
“네. 이번 달에 안 쓴 휴가가 3일이나 있더군요.”
“허.”
한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카르안이 휴가를 신청한 것.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이 휴가라는 것은 그냥 형식적으로 있는 것이다.
물론 쉬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스의 눈치를 보느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특이한 정신병이 하나 있었는데, 자기보다 아랫사람이 자기가 일하는 날 쉬는 것을 참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횡포. 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런데 카르안이 뜬금없이 휴가를 쓰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 그럼 일은 어쩌고. 어? 할게 쌓이고 쌓였어!”
“그럼 제가 없는만큼 천천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돈 받으면서 쉬겠다는 것도 아니고.”
카르안이 따박 따박 따지고 들었다. 한스의 이마에 핏줄이 빡 섰다.
꽝!
뭔가 무너지는 소리. 술집에 갈 생각으로 히히덕대던 인부들도, 깜짝 놀라 둘을 쳐다봤다.
한스가 발로 쌓아둔 목재를 걷어찬 것.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 새끼가 어제부터 보자보자 하니까........ 야. 미쳤냐?”
“하, 휴가 쓰면 미친놈이 됩니까?"
“이게 계속 기어오르네?”
일촉즉발의 상황. 조금만 지나면 멱살잡이까지 할 것 같다. 주변 인부들도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저놈이 어제부터 왜 저래?’
한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옛날 같았으면 당장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당하고 난 뒤로 선 듯 손이 나가질 않았다.
게다가 일로 트집을 잡으려해도, 카르안이 일을 너무 잘했다. 몇 일 전만해도 기침으로 골골 거리던 녀석. 지금처럼 일할사람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진작 잘랐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남들보다 일도 잘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데, 카르안이 빠진다면 일정이 더 늦춰지리라.
“자자. 그만들 하십쇼.”
잭. 그의 동료였다. 그는 능숙하게 한스와 카르안의 사이에 끼었다.
“카르안도 말 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끼어들지 마, 새끼야.”
한스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없다. 잠시 카르안을 노려보던 한스는 가래침을 뱉으며 말했다.
“휴가는........ 이번은 넘어 가겠지만, 다음부터는 택도 없을 줄 알아.”
한스가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덕분에 싸했던 분위기도 어느정도 풀렸다. 동료들이 카르안에게 몰려들었다.
“카르안. 너 갑자기 왜그러냐.”
“맞아. 저 양반 성질 건드려봐야 좋을거 없어.”
걱정스러운 얼굴들. 하지만 카르안은 태연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말하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나중에 이야기 해주지.”
“네가 그렇다면 뭐.”
동료들은 걱정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칙칙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선지, 동료 잭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휴가인가? 기념으로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네놈은 하루하루가 기념일이냐. 술을 항상 퍼마시니.”
다른 동료들도 맞장구를 쳤다. 말이 나오자마자 그들은 술집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카르안도 끼어 있었다. 딱히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끼어 버렸다.
“뭐. 한잔쯤은 괜찮겠지.”
“한잔쯤? 이것봐라? 평소에 밥집보다 술집을 더 찾던 놈이. 진짜 뭔 일 있나보네?”
“내가 그렇게 술을 좋아했나?”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일만 끝나면 술 마시러 다녔잖아.”
‘그랬군.’
씁쓸했다. 카르안은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추한 얼굴과 병까지 있다. 배운 것도 없고 돈도 몇푼 없다. 그런 그에게는 술집이 유일한 안식처겠지.
이렇게 술로 하루하루를 소비하다 죽는 삶. 그게 원래 그의 운명이었다.
이 연금술사의 힘이 없었다면.
‘오늘은 늦었으니.’
이제 해가 졌다. 깜깜한 밤. 그가 계획한 일은 어차피 아침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리저리 떠드는 사이, 그들은 술집 앞에 도착했다. 허름한 술집은 늙은 반딧불마냥 침침한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2.
“어서옵쇼!”
안에 들어가자 술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안과 동료들은 식탁 하나를 잡고 앉았다.
“여기 맥주 5잔하고 기본 안주!”
“예이!”
왁자지껄한 분위기. 술집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모두 그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 뿐.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주로 찾는 술집이었다.
카르안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술집이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소한 고기냄새를 맡자 군침이 고였다. 주변이 어떻던, 배가 고팠으니까.
그때 한 여자가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다가왔다.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평범했지만, 인부들은 그녀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애초부터 그들은 젊은 여자 자체가 좋은 것이다.
“맥주 나왔어요.”
“고맙네.”
맥주잔이 하나 둘 식탁 위에 올라갔다. 카르안이 잔을 만져보았다. 미지근했다.
‘맥주는 차게 먹어야 제맛인데.’
“그나저나 카르안. 자네 휴가때 뭘 할건가?”
“그러게. 조금말 알려줘.”
“혹시 레나양이랑 밥이라도 먹으러가나?”
“크하하하!”
유쾌한 웃음소리. 하지만 카르안는 어색하게 따라웃을 수밖에 없었다.
‘레나? 나랑 아는 사인가?’
“하.”
그때 술을 들고온 여자가 콧웃음을 쳤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카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표정.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좀 하지 말아요.”
“이 녀석이 욕까지 먹어가며 휴가신청을 했다니까. 별일이다 싶어서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제가 알 바 아니잖아요.”
술집여자가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카르안은 맥주잔을 만지며 생각했다.
‘레나양이 저 여자였군.’
카르안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미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매력있게 생겼다.
그리고 그 레나양이 자신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도, 카르안은 눈치 챌 수 있었다.
‘하긴. 얼굴이 이 모양이니.’
못생겼고 능력도 없다. 과거에 살던 한국에서는, 노동자라도 기술을 익히면 돈을 어느 정도 만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자는 정말 최하위 계급. 여자들에게 인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크흐.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팁도 엄청 줬잖아. 밥 한끼쯤은 같이 하라고.”
“됐어요. 그리고 안주는 바로 나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쌩 하니 가버렸다. 동료들은 입맛만 다졌다.
“얼굴은 예쁘장한데 좀 싸가지가 없어.”
“돈까지 퍼줬다고?”
“어. 너 맨날 서비스라면서 1,2 실버씩 줬잖아.”
“이런 젠장.”
카르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가진 돈이 너무 적었다. 번 돈을 전부 술집에서 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치병이라니 정말 살 맛이 안 나기는 하겠지만. 입맛이 썼다.
‘돈이 좀 더 풍족했으면 계획을 짜기도 수월했을 텐데.’
잠시 후. 안주로 튀긴 감자가 나왔다. 노릇하게 튀겨진 감자가 고소한 향을 뿌리고 있다.
“다음에는 고기 안주도 먹어보자고.”
“그럴 돈이 어디 있나.”
“내기에서 이기면.”
“그 내기로 날린 돈이면 한달 내내 고기만 먹었겠다.”
싱거운 농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료들의 웃음 섞인 대화를 뒤로하고, 카르안은 조용이 술을 마셨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계획이 천천히 세워지고 있었다.
3.
다음날 아침. 카르안은 일찍 눈을 떴다. 저번처럼 독주를 마신 것도 아니다. 머리가 상쾌했다. 그의 동료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카르안은 조용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상쾌한 봄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각자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연금술 길드가 저쪽이라고 했지.”
그가 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이 영지는 제법 크다. 숙소와 연금술 길드까지 조금 걸어야 했다. 그래서 카르안도 일부러 아침 일찍 나온 것이다.
그는 걸으며 다시 지갑을 확인했다. 가죽 주머니. 그 안에는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화 60개. 자잘한 동화 몇 개......’
그의 전 재산. 은화 한 닢의 경우 그가 살던 한국의 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
금화의 경우 은화 100닢을 조금 넘는 가격. 반면 동화는 하나에 천원 정도였다.
즉, 카르안의 전 재산은 60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돈을 좀 불려야겠다.”
그가 멈춘곳은 연금술 길드 앞. 카르안은 문을 열었다.
짤랑-
귀여운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여러 가지 약초 냄새로 가득했다.
“어서오세요.”
그가 들어가자 젊은 청년이 인사했다. 길드의 직원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카르안은 그에게 걸어갔다.
연금술 길드. 주로 연금술사들이 포션이나 마법도구를 만들어 제공한다.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은 포션.
모험가부터 일반인까지 모두에게 포션은 필수품이다.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데 꼭 필요하니까.
연금술사들이 직접 재료를 구하러 다니지는 않는다. 보통 약재를 구하는 것은 채집꾼들. 그리고 연금술사들이 그 약재를 조합해 포션을 만든다.
그런 채집꾼들을 위한 도구를 파는 것도 연금술 길드. 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었다.
“약초 지도하고, 빈병 열 개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빈병은 연금술을 위한 물건이다. 포션을 담기 위한 병. 약초 지도는 말 그대로 포션의 재료가 되는 약초가 자라는 곳을 표시한 지도다. 약초 채집꾼들의 필수품 중 하나.
카르안은 지도를 살펴봤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약초들이 잘 자라는 위치가 나와있다.
‘정말 귀한재료는 표시되어있지 않겠지.’
당연히 귀한 재료의 위치를 안다면 바로 연금술사들이 달려갔을 것이다.
저가의 재료는 채집꾼에게, 고가의 물건을 발견하면 자기들이 챙긴다. 이게 대략적인 연금술 길드의 방침이었다.
“여기. 지도하고 빈병입니다. 그리고 이건 시세표인데, 여기 나온대로 구해주세요.”
과연 시세표를 보자 그것도 알 수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약초들중 비싼 것은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카르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달맞이 풀과 용암버섯. 여기에 있군.’
달맞이풀, 용암버섯. 그 둘은 나무 밑에서 자라는 평범한 약초와 버섯이다.
당연히 가격도 바닥.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최하급에 가까운 E급 포션의 재료였으니까. 물론 평범한 연금술사들에게는 말이다.
저가의 약초로 큰 효율을 내는 방법. 그 모든 방법이 그의 머릿속에 있다. 이 두재료를 이용한것도 그 중 하나. 두 약초를 메인으로하면, 중,상급으로 취급받는 B급 포션을 잔득 만들 수 있다.
‘무르짐이 진짜로 대단한 놈 이었군.’
연금술이라는 게 조합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의 마법처럼 마나와 연산능력, 계산식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무르짐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카르안에게 전달했다. 지금 그는 극도의 효율성으로 포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 카르안의 마나는 10.
연금술사 치고는 낮은 수치다. 하지만 B급 포션을 만드는 일은, 지금의 마나로도 아슬아슬하게 가능했다.
“으흠. 저기.”
“예.”
“혹시 여기서 포션도 매입하나요?”
“아. 물론입니다. 하지만........”
청년은 말끝을 흐렸다. 포션을 만드는 것은 연금술사. 파는것도 연금술사다. 저 남자가 무슨수로 포션을 구한다는 말인가.
‘연금술사일리는 없지.’
청년은 그를 약초 채집꾼이라고 생각했다. 허름한 차림새만 봐도 알 수 있다. 채집꾼이 사지않는 빈 병을 사는게 조금 특이했지만, 절대 연금술사는 아닐 것이다.
연금술은 재능과 수련이 모두 필요한만큼, 일단 되기만 하면 상당한 엘리트로 인정받는다. 연금술 길드는 항상 연금술사가 부족해 인력난을 격고 있다.
연금술사라면 아무 연금술 길드만 들어가도 부유한 상인만큼 풍족하게 살 수 있다. 저렇게 거지꼴을 하며 다닐 이유가 없다.
“혹시 포션 가격이.”
“아. 제가 표를 드리겠습니다.”
생각과는 별개로, 청년은 친절하게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최근의 포션 시세가 적인 표. 카르안은 그 표도 한번 확인했다. 그러다가 한 중간에서 시선이 멈췄다.
달의 눈물. B급 포션. 가격 100mL당 20실버.
‘역시 B급이군. 이것으로 한다.’
두 재료로 만들 수 있는 포션들. B급 포션답게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걸 잔득 만든다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카르안은 지도와 빈 병의 값을 치렀다.
“그럼 수고하시길.”
카르안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지도와 포션 병 값으로 은화 2닢. 그는 남은 돈과 지도를 확인했다.
“어?”
약초들의 위치를 체크하던 중.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달맞이 풀이 자라는 위치. 그 곳에 이상한 표시가 하나 있었다.
“위험지대?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