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대통령 (3)
TV에서 보는 정치인은 맨날 별것도 아닌 일에 소리나 지르고…….
아니, 소리만 지르면 다행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다가 헛소리를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저 새끼들 알고 보면 순 병신 새끼들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터였다.
허나 정치인들이 괜히 숱하게 많은 정치인 지망생들을 밟고 위로 올라설 수 있던 건 아니라는 걸, 유현은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하긴, 박태식……. 그 사람도 보통은 넘었지.’
당내 중진 의원쯤 되면, 사람 마음 움직이는 건 일단 일도 아니었다.
그에 더해 다른 사람들은 고려할 수 없는 여러 제반 사항들 또한 꿰고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상대가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면…….
아예 인간이기를 벗어던진 사람이라면 다 소용없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박태식 때와는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미 여럿이 인간을 벗어던진 상황이었다.
사태가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고 있었다.
“어, 박 중령. 나 천지평이야.”
-네, 듣고 있습니다.
쿠데타?
염두에 두고 있은 지는 오래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말이 정부지, 모래알 위에 지어진 단체이지 않나.
사태 이전에도 한 단어로 뭉뚱그려 말하기엔 각자의 이해를 위해 싸우고 있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는데 오히려 상황이 나빠진 다음에 더 좋아질 거라 여기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대통령에 의해 여럿이 이미 실각하거나 유배 가거나, 실종된 이들도 많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그 날이 온 거 같은데.”
-아, 내부 병력은……?
“알지 않나? 개인 화기로 무장한 어중이떠중이들뿐이야. 게다가 지금…… 종로 거리를 나돌고 있네. 외부 경계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해.”
-서대문 쪽도 와해되었으니…….
“청와대에서나 올 수 있을 텐데, 오겠나? 온다고 해도 대통령이 지금 여기 있으니, 그 틈을 타서 공격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한 시간 이내로 준비됩니다.
“좋아.”
천지평은 다른 방으로 이동해 통화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모든 경계 병력이 CCTV에 낚여 있지도 않은 이종범을 찾기 위해 종로를 헤매고 있다 보니 오피스텔 안쪽은 그저 무주공산이었다.
원래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자유로이 돌아다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하면 천지가 개벽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좀 그렇긴 했다.
보안실에 있던 인원 전원이 대통령과 그 경호 인력 그리고 총리가 나가자마자 정리되었으니.
“한 시간 이내에 온다고 하는군. 우린 그사이에 시민들을 규합해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일단 이 오피스텔 내부 인원은 어렵지 않을 거 같군.”
보안실에서 방송을 이용해 안심하고 있으라, 대통령에게 이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있다고 떠들면 되지 않겠나?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야 많겠지만, 감히 아니라고 대들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럴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죽거나 유배 갔으니.
여기 남은 인원은 말 그대로 ‘대통령’이 고른 인원들 아닌가.
실제로 재능도 있고 우수한 성과도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협박에 완전히 굴복한 이들이란 얘기였다.
“문제는 이런 오피스텔이 몇 개 더 있다는 건데요.”
“그게 문제지. 전체 방송은 여기서 불가능해. 총리가 쓰는 건물로 가야 할 텐데……. 이 병력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지.”
이종범의 말에 천지평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병력이지 총이라고 해 봐야 유현 일행이 들고 온 열 정이 다였다.
그럼 움직일 수 있는 무장 인원이 열 명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우선 이종범은 창밖에 대고 쏘는 것 말고는 가능한 게 없었다.
천지평 의원이나 의사 또한 비슷한 실정이었다.
김태평이 보기엔 아군이나 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실전은 생각보다도 더 상상이나 훈련 상황과 다르니까.
“강한나 배우가 아마……. 힘을 좀 써 주고 있을 겁니다.”
의사는 총을 집어 든다거나 하는 대신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엔 바깥쪽으로 위치한 건물들만 드문드문 점등했었는데, 지금은 수색 때문에 안쪽도 싹 켜 놔서 그런가. 아주 밝았다.
그 밝은 거리 사이로 더 밝게 빛나는 건물이 있었다.
천지평 의원을 비롯한 이 종로의 실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덕수궁 디팰리스라고 불렸던 곳.
그 펜트하우스에서는 거의 매일 파티가 열렸더랬다.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대통령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그렇죠. 일단 지구 병원 쪽에서도 호응은 할 겁니다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꽤 애들한테 잘했던 모양이야? 아직도 말을 듣는 거 보면?”
“뭐……. 원래 뒤 구린 일 하려면 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죠. 따지고 보면 대통령도 사태 초반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땐 그랬지.”
천지평은…….
아니, 이 안에 있는 인원 중 대다수는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핵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관여한 건 아니더라도, 방관하는 걸 넘어서 적극적으로 덮어 주고 도와준 인원들이란 얘기였다.
천지평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박태식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 의원이었지만 이미 죽은 친구를 위해 복수해 줄 의는 없었다.
아마 박태식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게 천지평의 생각이었다.
해서 그렇게 하는 대신, 대통령에게 적극 협력했다.
지역구부터 아는 인맥 다 끌어다가 입 막는 데 썼다, 이 말이었다.
대가는 달달했다.
‘박 중령도 그래서 여기 남게 된 거지…….’
대통령은 참으로 자기 사람을 잘 챙겨서 그랬다.
그 외의 인물들에게는 무신경하다 못해 혹독하기까지 했지만…….
“아무튼, 잘했군.”
“네.”
유현은 이제는 같은 편이 된, 그러나 여전히 나쁜 놈들인 놈들을 보면서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예리나 김태평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해서 잡은 손이긴 했다.
하지만…….
잡고 싶어서 잡은 손은 아니지 않나.
‘뭐…….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속으로 어쩔 수 없다고 되뇐다고 해도 찝찝함은 도무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타다다다당
그때 길거리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오발일까?
훈련도가 부족한 부대가 상황에 내몰려 실탄 들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지 않나.
충분히 가능한…….
탕탕
허나 공기를 찢는 총성이 연달아 들리기 시작한 이상 그런 기대는 접어 두어야 했다.
“설마 걸렸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구급대원과 조영상이 자청해서 나갈 때 죽음을 각오하고 가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럴 확률이 높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휠체어를 본 이상 모든 사람들이 그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에 그랬다.
둘은 휠체어를 어둠 속에 갈무리해 하수구에 처넣은 후, 아예 종로 밖으로 나갈 계획이었으니 그 전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시간이 지난 이상에야 걸릴 이유가 없었다.
“벌써 들어왔나?”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쳐들어왔나?
해서 천지평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전기를 내려다보는 천지평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었으니까.
“뭐지?”
“일단 최악을 상정해야 합니다. 입구 막아야 합니다.”
“아……. 그래야겠군. 일단 나라도.”
“네.”
물리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이종범과 저격에 능한 오예리를 제외한 인원 모두 총으로 무장한 채, 입구로 향했다.
처음엔 잔뜩 긴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총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어서 그랬다.
종로로 칭해지는 지역이 말로는 손바닥만 하다 해도 아주 좁은 건 아니지 않나?
막상 두 발로 걸으려고 하면 널찍하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인데, 확실히 총소리는 외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탕탕
타다다다다
소리만으로는 뭔 상황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까보단 더 거세지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아니, 그뿐만은 아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은데.”
유현은 그 특유의 예민함으로 무언가 감지해 냈다.
그러자 김태평 또한 경험에 따라 그의 감지가 맞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총소리는 드문드문해지고 있어요.”
“이거…….”
그의 확인에 유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동의라도 구하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아쉽게도 천지평이나 그의 측근들 그리고 의사 등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이 사태가 완전히 남 일이었군.’
유현은 사태를 이겨 내고 간신히 살아남았던 이들은 다 죽고, 어찌 보면 정부에 기대 살아왔던 이들만 남았다는 것에 혀를 찼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탄하고 있진 않았다.
상황은 계속 최악을 향해서만 달려오고 있지 않았나?
동시에 유현은 그렇게 격변하는 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해 온 사람이었다.
이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으니 더 잘해야 했다.
“라드?”
“네,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태평이야 수라장을 겪어 온 사람이니만큼 이 특유의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쏴 대는 총소리.
그 후로 점점 뒤로 밀리면서 드문드문해지는 총소리.
이건 아주 전형적인 라드와의 싸움에서 보이는 소견이었다.
놈들은 총을 쏘지 않고, 근거리로 다가와 달려드니까.
물론 돌을 던지거나 하기도 하지만…….
“공교로운데……. 너무.”
라드는 무서운 적이다.
실제로 유현이나 김태평처럼 전투에 익숙하고 또 체격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근거리에서 마주치면 감염 또는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경계 초소에서 총으로 무장한 상황이라면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비등하다면 더더욱 그랬다.
허나 지금, 이 종로는 외부 경계를 돌아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 안쪽을 돌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요. 내부 상황을…… 지능체가 이걸 지켜보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거라고밖에는…….”
“박기태일까.”
유현은 1호, 박기태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하던 박원상과 현정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같이 연상되었다.
“뭐 제삼의 세력이 있을 수도 있겠죠.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럼 어찌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측은 의미가 없어요. 천 의원님.”
김태평은 천지평을 돌아보았다.
라드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져 있었다.
오히려 아예 싸워 본 적도 아니, 싸우기는커녕 마주한 적도 없는 적이다 보니 더 두려운 모양이었다.
‘한심하구만그래.’
작년 이맘때면 또 모를까…….
이미 사태 터진 지 한참인데 이 지경이라니.
김태평은 애써 속내를 감춘 채 말을 이었다.
“박중령……. 빨리 와야 할 겁니다. 다 모이지 않았더라도 진입하라고 해 주시죠. 여기…… 곧 무너질 겁니다.”
“라드는 총도 못 쏘지 않나?”
“제가 보기엔 여기 있는 부대도 잘 쏘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지능이 있는 라드라면…… 정말 곧이에요.”
“이런 제길,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