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분열 (5)
‘엉망이군…….’
유현은 아니, 그뿐만 아니라 일행은 전부 그리 어려움 없이 철조망을 넘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이 일대 통제력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아마 제대로 된 기관총 사수 아니, 그저 초소에 사람만 있었다 해도 담 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그 이후로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명동의 화려한 조명 아래 닿을 때까지도 일행은 병사는커녕 길가는 행인 하나 마주할 수 없었다.
“으음…….”
“이제부터는 조심하긴 해야겠습니다.”
“근데 경계 병력은 없는 거 같죠?”
“없는 거 같긴 합니다. 하지만 너무 밝으니까요.”
조명 아래 선 후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나 느낌은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었다.
“만약 인원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면…….”
유현의 말에 김태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다니는 사람 모두 적으로 간주하겠죠.”
“설마 계엄령인가?”
“계엄령이라…….”
“허…….”
유현뿐 아니라 뒤에서 듣고 있던 인원 모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계엄령이라니.
이미 나라는 망했다.
조영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인인 그만은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속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프라가 무너지긴 했지만…….
사상 최악의 전염병, 즉 재난이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나라는 태생부터 위기지 않았나.
간신히 독립했더니만 한국전쟁이 터졌으니.
허나 대한민국은 그 모든 위기를 극복해 결국,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을 이룩했던 바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는 위기이리라 간주하는 것도 지나친 억측은 아닐 터였다.
‘한심한 지도자들은 늘 있었지…….’
조선 말?
아니, 구한말이라고 할까.
학교에서는 그때 역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 커서 왜 그랬나 하고 살피니 그럴 만했다.
그 이후?
왜 없었겠나.
그럼에도 그의 조국은 다 이겨 냈다.
허나…….
‘이렇게까지 악랄했던 놈은 없었어.’
나라 전체를 이미 한번 망가뜨렸다.
전쟁도 아니고…….
그냥 테러로.
처음엔 위구르의 테러 집단이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더랬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든 건 정부였다.
‘근데 한 번 더…….’
이 위기마저 이겨 내 나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좀비보다도 더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통제 때문에 많이 당하기도 했지만, 얼마 남지 못한 생존자들은 라드와 식량 경쟁에 내몰리기까지 해야 했다.
좀비와 달리 이것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놈들이었으니.
‘이렇게…….’
인기척 하나 없는 밝은 밤거리를 일행은 바로 옆에 끼고 걷고 있었다.
딱히 경계등을 켜 놓은 것이 아니라 그저 몇몇 건물의 불을 켜서 거리를 밝힌 수준에 불과하다 보니 중간중간 비는 곳이 많아 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여기도 뭐가 터진 건 아니겠죠?”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시작이 정부 측이었으니, 그럴 리는 없겠죠.”
“하긴, 그 샘플 통들……. 건드린 흔적은 있었어도 이동한 흔적은 없었어요.”
“네. 박기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적어도 여기서는.”
“으음, 그럼 진짜 그냥 통제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어려울 거 같습니다.”
“망할 새끼.”
그 중간 어딘가, 어둑한 골목에 일행은 잠시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은 하루가 사태 터지고 나서 하루라도 있었나 싶었지만, 오늘은 유독 힘든 하루였더랬다.
전투를 틈타 다리를 건너 새로운 보금자리인 한글 박물관까지 가는 길도 험했다.
이 일행은 그걸 넘어 숫제 명동까지 온 상황이고.
걸은 시간만 따져 봐도 길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 자체도 문제였다.
언제 어떻게 들킬지 모르고, 들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 하나하나가 일행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쩌죠?”
“일단 가 보긴 해야죠.”
하지만 지금 일행을 무엇보다 괴롭히고 있는 건, 기껏 그 공생을 해 가며 왔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을…….
만약 종로에 도착했는데도 단 하나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갔는데 여전히 아무도 없으면?”
“그때는 그때 가서……. 일단 밤이지 않습니까. 아마…… 정상 상황에서도 통제를 하긴 했을 겁니다.”
“하긴, 그건 그렇겠군요.”
“아침이 왔을 때, 뭔가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 보죠.”
김태평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시.
곧 해가 떠 올 터였다.
그 전에 우선 종로에 도착은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지금이 북적한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럼 가죠.”
“네.”
일행은, 그러니까 가만히 있던 이들도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던 건 아니었다.
허나 태반은 쓸데없는 푸념이었다.
이미 힘 빠지는 상황에서 그 한마디 보탠다고 뿌듯해지겠나.
적어도 여기까지 오기로 작정한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정예화된 인력들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종로에 닿을 때까지, 그리고 해가 떠올라 천지 사방을 비출 때까지도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또다시 하루가 밝았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난데없이 커다란 스피커에서 방송이 시작되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니 8시였다.
-오늘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신 대통령 각하에게 감사의 경례를 올리면서,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방송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 그런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긴 했다.
-어젯밤 서쪽 방면에 불이 나 많이들 놀라셨을 걸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다 진압되었고, 상황은 완벽하게 통제 중이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오늘 하루도 보람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름 세브란스 쪽 일도 언급하긴 했다.
순 거짓말이긴 했다.
저 불은……
불은 그래, 어쩌면 다 꺼졌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개간한답시고 주변 나무를 싹 다 베어 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이 통제 중일까?
타다다당
어제 명동에서 종로로 오면서도 중간중간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서쪽에서 도망치던 사람들 혹은 도망치던 중간에 감염이 되어 라드가 된 이들을 사살하는 것이었을 터였다.
대개는 더 서쪽 또는 남쪽 혹은 북쪽으로 도망갔겠지만 갇혀 있다가 깜깜한 가운데 갑자기 풀려나 인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동쪽으로 도망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동쪽에 닿은 이들 중 더 운이 없는 이들은 다시 붙잡혀 대기 중일 것이고.
“다행히 계엄령은 아니군요.”
“이쪽 시민들만 진짜 시민일 테니까요.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쓰긴 하겠죠.”
방송의 내용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사태 이후엔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는 걸 감안하면 또 그렇게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존재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에 유현은 다행이라는 단어를 언급했고, 김태평 또한 동조했다.
“근데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오예리 형사도 그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망가진, 소수의 집단에서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는 중요한 일 아니겠나.
뭐 그런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보다 궁금한 건 이 기묘한 형태의 시민 사회였다.
딱 방송이 나오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종로 길바닥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건물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잘 보면 간판에 병원, 철물 등 뭔가 하는 건물들이었다.
허나 그보다 많은 수는…….
“대통령을 만족시키는 거죠.”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요?”
“잘생기고, 이쁜 사람들을 괜히 데려다 놓은 게 아닙니다. 저렇게 길거리를 채워서 여전히 대한민국은 살아 있는 사람이 많고, 그중에서도 잘난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에요.”
“누구에게요?”
“서로에게. 저렇게 돌아다니다가 오후엔 아마 자기 할 일 하러 갈 겁니다.”
“그럼…… 저 길거리는?”
“오전에 일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채우는 거죠.”
그 말에 김태평이 답을 해 주었다.
지침이 바뀌었을 수도 있긴 했다.
그가 여기서 나온 게 이제 벌써 근 1년이니.
하지만…….
전체적인 틀은 그대로인 듯했다.
대통령을 우상화하면서 동시에 전시 행정을 목표로 하는 정책.
“미친……. 근데 시민들이 그냥 다 납득한대요?”
“안전하니까요. 게다가…… 거리를 보세요. 엄청 깨끗하잖아요. 뭐 버리면 처벌이 너무 강해서이긴 하지만……. 시켜서 걷는 사람도 걷다 보면 나름 만족도가 있습니다.”
“만족이라…….”
“네. 아마 여기 이 사람들의 만족도는 사태 이전의 부유층하고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걸요. 밖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으니까.”
“아…….”
“게다가 매일 방송국에서 외부 전경을 찍어요. 그걸 연예계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이 편집도 하고 직접 체험하는 콘텐츠도 만들어서 송출하는 거죠.”
오예리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서 입을 다물었으나 대화가 끊어지진 않았다.
“프로파간다로군.”
유현이 끼어들어서 그랬다.
프로파간다.
낯설지만 그 뜻은 다들 알지 않나.
나치의 괴벨스가 이걸 참 잘했더랬다.
“네, 그렇죠. 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으음, 맞는 말이긴 하죠. 근데 이런 식이면 우리는 어떻게 하죠. 다 짜여진 대로만 움직이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요. 옮기거나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김태평은 딴소리를 하다가 이내 본론을 꺼냈다.
일부러 지금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혹 누구 하나 잡히거나 해도 일에 지장이 없도록.
여기 있는 이들 중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도 없거니와 알아차리더라도 섭섭해할 사람도 하나도 없었기에 김태평은 그저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마침 의사입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 잘됐군요. 뭐 말은 통할 거 같네요.”
“그렇죠. 게다가 저한텐 빚도 있어요.”
“빚이라. 잘됐군요.”
“일단 가죠.”
“지금?”
“네,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겁니다.”
김태평은 당황하는 일행을 보다가 이내 턱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간판에 병원이라고 쓰여 있던…….
아까 오예리 형사가 본 바로 그곳이었다.
거의 뭐 코앞이었다.
“아.”
“저기라면……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네, 그렇죠. 어떻게 하죠. 다들 동선이…….”
“네, 뭐. 그래도 병원이다 보니 비번인 사람들이 그냥 이용하러 갑니다. 나름…… 옷도 지금 꾸미셨잖아요.”
“으음.”
김태평의 말에 나머지가 자신들의 꼬락서니를 돌아보았다.
꾸몄다라기엔…… 거지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옷을 입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입은 옷이 낡았다는 느낌이지.
“그럼 가 보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네, 제 신호에 따라 5분 간격으로 오십쇼.”
“네.”
아무튼, 일행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