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염탐 (4)
1시간쯤 지났을까.
그러니까 눈앞의 병사들이 경계를 서기 시작한 지는 3시간쯤 흐른 무렵이었다.
절대적인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12시가 슬슬 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게까지 졸려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태가 터진 후의 12시는 그야말로 잘 시간이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생활이 점점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이 근방은 완연한 정부의 영역이고, 따라서 전기도 들어오는 지역이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다.
“졸기 시작하는군요.”
“경계를 서면서 졸다니, 수원과는 분위기가 다르군요?”
“아무래도…… 거긴 적이 코앞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여긴 완전 안전한 곳이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죠.”
산을 타고 넘어오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라드를 거의 볼 수 없었더랬다.
길거리?
길거리에선 아예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한 것은 아니다 보니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안전해 보였다.
실제로 안전하냐는 건 아예 다른 문제지만.
“가죠.”
김태평의 지시에 의해 산개해 있던 이들이 움직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단도를 들고서였다.
누군가는 목을 찔렸고 또 누군가는 폐를 찔렸다.
그와 동시에 색색 소리와 함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정면에 있던 둘은 김태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요원이 그냥 눈앞에서 달려들어서 처리했다.
“어, 어.”
“뭐, 뭐야!”
졸다가 완전히 코앞에 와서야 눈치를 챈 둘이 마지막으로 낸 소리는 대체로 이러했다.
유현은 그렇게 쓰러져 버린 병사들을 지나친 채, 급히 건물 안으로 향했다.
‘어둡군…….’
1층은 무척 어두웠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엘리베이터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꺼져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는 건, 어디엔가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곧 김민수와 그 일당이 따라 들어와 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현은 그사이에 벌써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찾아낸 지 오래였다.
“저기. 빛이 보이는데.”
닫힌 철문 밑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절대적인 광량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빛이 보였다.
“일단 바로 가지 말고 다른 곳도 찾아보죠.”
성미 급한 김민수와 구우준이 바로 그리로 향하려는 것을 김태평이 말렸다.
그러곤 천천히, 적은 광량에 의존하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게 맞을 것 같았다.
괜히 저기 후볐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어쩐단 말인가.
병사들이 있거나 하면 소란이 일 텐데 그렇게 되면 별 소득도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엘리베이터는 다 꺼져 있군요.”
나름 병원 구조에 익숙한 유현이 일행을 이끌었다.
세브란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학회 때문에라도 여러 번 온 적이 있었더랬다.
거기에 더해 팬데믹 사태가 한창일 때는 유현이 이 병원 저 병원 돌면서 실사 비슷한 것도 했기 때문에 구석구석 훑어볼 기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 년은 된 일이다 보니 다 잊어야 정상이겠지만 유현은 기억력이 비상한 편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이게 다 돈 겁니까?”
“네. 교수 연구실까지 다 봤어요.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다 꺼져 있습니다.”
“흐음…….”
“밖에서 보면 위에는 오히려 불이 켜져 있었는데요.”
“아예 원천 차단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뭐가 되었건 간에 위층…… 거기 몇 층이었죠?”
“17, 18층에 불이 들어와 있었어요.”
유현의 말에 김태평은 코 밑을 슥 훑었다.
‘그사이에는 불이 안 들어와 있었지? 아무래도…… 거기 아니면 그 위로 주요 인물이나 뭔가가 있을 공산이 큰데…….’
고민을 이어 나가면서 김민수와 구우준을 비롯한 라드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지속해서 철문을 살피고 있었다.
밑으로 새어 나오는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소음이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사람 말소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놈들이 밑으로 가고 우리가 위로 간다면…… 좀 위험한데…….’
원래는 이놈들을 위로 보내고, 일행은 아래를 살필 작정이었다.
보통은 지하실에 잭팟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철문 뒤에 주요 인물들이 있다면…… 무조건 앞에 경비가 있었을 거야.’
괜히 단도를 빼 들고 다녔겠나?
여차하면 던지거나 해서 제압할 생각이었다.
허나 1층은 그냥 비어 있었다.
그렇다고 안쪽에 누가 바로 서 있을까?
‘그런 거 같지도 않은데.’
유현을 비롯해 요원들과 김태평은 거의 소음을 내지 않고 있었다.
쿵
그러나 라드들은 어떤가.
일단 발걸음 소리부터가 컸다.
딱 들어오는 순간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 뒤로 전혀 뭔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위에 뭐가 더 있을 가능성이 있어. 흐음……. 그렇다고 밑을 같이 정리하자니…….’
헬기가 없다면, 어차피 위에 놈들이 아래로 내려와야 할 터였다.
하지만 헬기가 있다면?
아니, 그냥 위로 도망가면서 응전한다면?
구원군이 오는 동안 위를 정리할 수 있을까?
조용히 기습할 수 있을 때 해야 하지 않나?
‘시발.’
김태평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제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김민수를 마주하게 되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놈은 그야말로 야수였다.
여기서 더 끌었다가는, 자중지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결국, 김태평은 결단을 내렸다.
“너네가 이 안으로. 우리는 위로 간다.”
“좋다! 간다!”
그의 지시가 아니,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터져 나갔다.
쾅
굳이 요란하다는 표현을 더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단히 시끄러웠다.
“뭐, 뭐야!”
밑에서 비명 같은 소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진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끄, 끄아악!”
“이, 이것들…… 이거 다 뭐야!”
될 수 있으면 어떤 말들을 하나 잠자코 서서 듣고 싶었지만, 김태평은 그저 전송기만 남겨 놓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
“전력으로 뛰어 올라간다! 다들 운동 게을리하지 않았지?”
“토할 만큼 뜁니다!”
“좋아! 교수님은?”
“저도 괜찮을 겁니다, 17층 정도는.”
그러곤 빠르게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해 본 사람은 알 텐데, 10층까지는 그럭저럭 뛰어 올라가기에 적당한 높이라 할 수 있었다.
평소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야 걸어 올라가는 것도 힘들 만한 높이긴 하지만, 운동을 했다면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허나 17층, 18층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이걸 당연하다는 듯 해내려면 운동 좀 했다는 수준으로는 안 되었다.
‘괴물인가.’
땀도 거의 안 흘린다?
타고났다고 봐야 했다.
김태평은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을 슥 밀어 닦으며 유현을 비롯한 모두를 살폈다.
완전히 멀쩡해 보이는 건 유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머지가 정신이 나갈 정도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 뒤…… 산 쪽으로 그래도 200명 정도의 군부대가 있어. 서대문에는 김선태가 있지. 연락이 가면 준비하고 오는 데 15분 정도 걸릴 거야.”
잠시 브리핑하는 동안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김태평은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시간 안에 이 문 뒤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거나 확보해야 해.”
“네.”
“네, 팀장님.”
이제 넷밖에 남지 않은 요원들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거의 이 두 배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죽거나 다쳐서 사라졌다.
허나 김태평은 상념에 빠지는 대신, 미래를 생각하기로 했다.
‘김조은……. 그 새끼만 죽여도 대통령은 큰 거 잃는 셈이겠지. 물론 잡아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김태평은 후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정유현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직접 전투도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유현도 그에 따라 한숨을 쉬었다.
‘의사인데 사람을 죽여도 좋은가?’에 대한 고민은 이미 끝낸 지 오래였다.
벌써 여럿 죽이지 않았나.
아니, 실험도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해 보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알았다.
나도 이미 선을 넘은 지 오래라는 걸.
“그럼……. 들어간다.”
안에 있는 놈들이 정예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밖에 세워 둔 경계병 수준만 봐도 전체 수준을 알 수 있는 법이니.
끼익
김태평은 잠겨 있지도 않은 문을 살짝 열고 안쪽을 살폈다.
드문드문 경계 인원이 서 있었으나 그 수가 무척 적었다.
그보다 인상적인 건, 소리에 있었다.
“이거 봐. 일어나 봐.”
잔뜩 쉰 목소리.
그리고 지나치게 두꺼운 목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웅얼거린다고만 느껴질 만큼 낮기도 했다.
‘라드…… 라드가 있다.’
김태평은 좌우로 있는 두 경계병 중 한쪽을 향해 달려들면서 생각했다.
“어, 컥.”
“뭐…….”
반대편으로는 다른 요원이 달려들었다.
요행이었다.
마침 라드가 말을 하는 바람에 병사가 고개를 돌려서 아예 들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원이 적다.
“이런…….”
피를 흘리며 쓰러진 병사 뒤로, 창살로 대체된 문 뒤에 있던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했더니, 김태평 요원이시로군.”
아는 얼굴이었다.
박기태.
1호.
“그쪽은…… 교수? 반가운 얼굴 다 보는구만그래.”
김태평 뒤로 유현이 바로 따라붙었기 때문에, 그는 유현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새끼…….”
“살아 있었군요, 역시.”
“그래, 살아는 있지. 붙잡혀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대화를 하면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만약 이놈이 소리라도 지르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제압해?
철문 안에 있는 놈을 제압하려면…… 총이라도 쏴야 할 텐데 소리를 지르게 두나 쏘나 그게 그거였다.
“어쩌죠?”
“일단…… 다른 놈들을 찾아보죠.”
“어디 가나.”
“어디 가!”
“야!”
해서 물었고, 김태평은 일단 다른 요인들을 확보하려는 심산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둑한 다른 병실에 있던 몸들도 입구로 달려들었다.
창살에 몸 부딪치는 소리가 이리저리 울렸다.
들켰나 했지만, 이 정도 소음은 일상인지 아니면 이 층에 있던 것이 아까 그 둘이 다였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우선 이따가 오죠.”
“그, 그러죠.”
해서 김태평은 요원 하나만 남겨 둔 채, 위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불이 켜져 있던 곳이었는데 문을 딱 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쪽이 아래층보다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그래 봐야 셋?
아니, 넷?
‘경비가 적군요.’
‘뭐……. 안전지대인 데다가, 개인 사병 같은 존재들일 테니까요. 밤인 걸 감안하면 이것도 많은 겁니다. 돌아가면서 설 테니까.’
‘아, 하긴 그렇군요.’
유현이 말을 마치자 김태평이 신호를 내렸다.
이번에는 유현에게도 지시가 떨어졌다.
“저놈입니까?”
“네. 하실 수 있겠죠?”
“소리가 좀 날 텐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 소음에도 별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아닌 게 아니라 밑에서 지속적으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틈 새로 보이는 병사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뭐야, 또?”
“지랄하는 거겠지……. 저 새끼들 하루 이틀인가.”
“왜 여기다 붙잡아 두는 거야? 싹 지하실로 보내지.”
“실험의 일환이라잖아. 우리가 뭘 알아. 까라면 까는 거지.”
그저 투덜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