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적의 적은 우군 (3)
믿을 수 있나.
그럴 수는 없다.
상대는 라드…….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이 진심이라 해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놈들이었다.
유현도 그러지 않았나?
결국, 저들을 정의하는 단어는 충동이라고.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요. 지금…… 만약 노예까지 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들의 전력이 더 강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렇겠죠. 애초에 지금 우리보다 강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요.”
허나 적은, 그러니까 정부는 강하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심지어 그 힘을 쓰는 데 그리 주저함도 없었다.
얼마 전 있었던 저격만 해도 그렇지 않나?
단지 한강변에서 개간을 하고 있었을 뿐인, 이 집단에서도 상대적인 약자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 후로 빠져나가는 이들이 늘어났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밖이 더 지옥이기에 그리 많은 이들이 빠져나가고 있진 않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놈들이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김태평은 머리를 한동안 더 굴리다가, 이내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대강의 강북의 지도를 그렸다.
괜히 정보 요원이 아니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려는지 대강이라곤 해도 한눈에 이렇게 생겼다는 걸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일단 산의 위치나 주요 시설들, 즉 청와대나 세브란스들의 위치가 정확했다.
“소수…… 저를 비롯한 정예가 놈들과 함께 북한산을 따라 우회해서 접근합니다.”
“소수라면 얼마나?”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갈 거라고 확신을 했는지, 박중이 관심을 보였다.
김태평도 비상한 전투력과 지휘 능력을 보이는 그를 제외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별 망설임 없이 답해 주었다.
“열 명 내외로. 그 정도의 정예면 사실 혼란을 일으키는 정도는 충분합니다. 게다가 세브란스 안에 실험체가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뭐…… 알아서 무너질 겁니다.”
“그럴까요?”
“이론상으로도 그렇지만…… 강변에서 두 눈 똑똑히 봤죠.”
김선태가 강변을 어떻게 무너뜨렸나.
라드와 협력해서 무너뜨렸다.
인과응보라던가.
이제 놈들이 그렇게 무너질 때가 되었다.
“아, 테크노마트…… 하긴, 거기가 정말 허무하게 무너졌다고 했죠.”
“네. 어떤 식으로든 김선태가 관여했을 겁니다. 제대로 방비가 선 상태라면 라드에게 그리 쉽게 무너질 수는 없어요.”
“그렇죠.”
박중도 수원에서 라드와 숱한 전투를 벌여 온 사람이지 않나.
처음에야 라드가 정말 너무 무서웠지만…….
피아가 완전히 구분된 다음부터는 그렇게 무섭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빠르고 강하다 해도 피와 살로 된 몸뚱어리로 이루어진 놈들이니까.
하지만 허를 찔리게 되면 여전히 무섭긴 했다.
일단 방금 전까지 옆에서 웃고 떠들던 놈이 라드가 되어 버린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 방비가 털리게 되면 무너지죠.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있겠지만……. 뭐…… 아시잖습니까.”
“제대로 된 칼로 찌르면 찔리기 마련이죠.”
“뭐……. 그래도 정찰은 필요할 겁니다. 놈들이 확인한 경로가 있다면, 제가 한번 다녀와 보도록 하죠.”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대로 있어도 위험하긴 합니다.”
김태평은 고터 쪽을 돌아보았다.
원래 있던 가게 하나를 통으로 정리해서 만든 숙소.
공간도 공간인데 백화점에 있던 침대들과 침구류를 가지고 와 꾸며 놓은 덕에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도 불만이 쌓이고 있지. 게다가…… 위협이 어디로 가는 게 아냐.’
사상누각.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위에서 치고 내려오는 순간, 무너질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는 불태울 거란 걱정에 망설이고 있었겠지만…….
‘벌써 열 명도 넘게 이탈하고 있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기 남았다.
왜?
어차피 위로 가 봐야 노예 신세가 될 것이 뻔하니까.
아니, 그것도 너무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실험체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몸 건강하고, 경력이 있던 이들 중엔 간혹 가서 수혜 계층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놈들 중에 혹 이곳의 현실을 부는 놈들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소장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놈들은 그대로 잔류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했다.
위험은 밖에 있는 데 반해 이곳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늑하지 않나.
심지어 측근들은 확실히 특권층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탈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허나 하나라도 흘러 들어가게 되면…….
소장의 성향상 불태울 가능성이 적다는 말을 듣게 되거나, 혹 경비의 틈을 뚫고 들어올 방법을 알게 된다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만나 보죠.”
마음이 급해진 김태평이 몸을 일으켰다.
박중은 그런 김태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원으로 가시려고요?”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 따라붙었을 겁니다.”
“따라붙어……?”
“네.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아.”
김태평은 그런 박중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황량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오가는 차량 없이 방치된 도로는 언제 봐도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저 멀리 몇몇 인영이 보인단 점이었다.
“저기. 저것들 같은데.”
김태평은 손가락으로 라드를 가리켰다.
박중은 여전히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히 이 시국에 저기 서 있을 만한 존재는 그들뿐이었다.
멀쩡한 생존자들이 저기 저렇게 있을 거라는 가정은 무의미했다.
“어, 그냥 가시게요?”
“뭐, 어쩌겠습니까. 오 형사님. 엄호해 주시죠.”
“아, 네. 걱정 마세요.”
오예리 형사는 어깨에 걸고 있던 총으로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유현도 나섰다.
“교수님이요……? 위험합니다.”
“여기는 안 위험합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저희 예상이 맞다면 저놈들이 바로 그놈들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유현의 일행을 따라붙었던 놈들.
집요하리만치 공격을 해 왔던 놈들이다.
김태평은 설마 이제 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나 해서 유현을 바라보았다.
복수심은 정당하지만 대체로 합리적이지는 않은 감정이지 않나?
그 때문에 일을 그르친 이들을 대라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눈에 비친 유현은 복수심에 휩싸인 사람과는 좀 달랐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어떤 놈들인지. 1호랑 어떻게 다른지.”
“아…….”
그는 그저 호기심이 인 모양이었다.
김태평으로서는 온전한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근처에 있던 학자들, 그러니까 박원상이나 김조은 등을 생각하면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은 또 아니었다.
학자들이란 새로운 지식 앞에 별 기이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선악의 구분조차 희미한데 위험성이 뭐 대수겠나.
“그래도…… 주의하십쇼. 뭐, 저라고 해서 저 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김태평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주변에 있던 돌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안에서부터 들고 왔던 종이에 뭔가를 끼적거리곤 돌멩이를 쌌다.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해 왔다고 했죠? 머리 좋네요.”
김태평은 그렇게 종이로 감싼 돌멩이를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현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나머지 군인들은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갔다.
모조리 총으로 무장한 채였다.
고터 측 인원들이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서 두리번거릴 지경이었다.
몇몇 붙임성 좋은 이들이 옆에 있던 수원 측 병사들에게 물었지만 그들 또한 영문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박중과 그 측근 그리고 유현 일행만이 아는 일이었으니.
툭그렇게 멀어진 일행은 돌을 던졌다.
김태평이 나름 잘 던져서 김민수 거의 코앞에 떨어졌다.
김민수는 그 돌을 집어 들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구우준만을 대동한 채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박자박 소리를 내면서였다.
그렇게 가까워지는 김민수를 유현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표정은 어떤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옷차림은 어떤지.
‘박기태보다는…… 오히려 순규에 가까운데…….’
그렇게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도 더 인간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물론 생김새는 전혀 달랐다.
호르몬에 의해 변형이 일어난 얼굴은, 확실히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김민수는 예의 그 잔뜩 쉰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김태평과 유현을 번갈아 보면서였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김민수를 마주했던 적이 있지 않던가?
그때 유현은 박원상의 아내, 현정을 잃었고 김태평은 부하가 불구가 되었다.
“그런 것도 같은데…… 오늘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 그래.”
아마 예전 같았으면 김민수는 그가 제일 눈독 들이던 둘이 눈앞에 있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터였다.
사실 지금도 꿈틀대는 욕망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라드로서는 놀랍게도 참아 내고 있었다.
‘그놈이야말로…… 진짜야.’
김선태.
그놈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라고 해야 옳을 터였다.
“그래서 함께할 건가.”
“해야지, 다른 수가 없으니. 한데…….”
“한데?”
“구체적인 계획은 내가 짜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그쪽 상황이 어떤지 직접 봐야 해.”
“으음…….”
여기서 더 참으라고?
김민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러니까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작 김태평과 유현은 그런 김민수 앞에서도 편안히 있었지만 뒤에 있던 오예리는 저도 모르게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빈틈을 노려야지. 우리가 협력한다고 무너지리란 보장이 있나? 수원에서는 운이 지나치게 좋았어.”
“으음…….”
김민수의 얼굴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확실히 그럴싸해서 그랬다.
“5일 후…… 여기서 만나지.”
“5일?”
“그래. 그사이에 일이 틀어지면 할 수 없지만.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내 보장하지.”
“으음…….”
다시금 꿈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김민수는 불만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일 적 수도 없이 떠올렸던 감정을 이제 와 리마인드해야 하니 불만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때 연습을 많이 했던 덕일까?
잠시 물러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휴.”
그렇게 물러나는 김민수를 보다가, 자리에 돌아온 김태평은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유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확실히 눈앞에서 라드를 마주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어서 그랬다.
다만 소득은 있었다.
김태평은 김태평대로.
유현은 유현대로.
‘박기태가 아니라, 저놈을 붙잡아야겠는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확실히 특이한 놈이었다.
저런 놈이 어떻게 자연 상태에서 발생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