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적의 적은 우군 (2)
“별거 없지.”
김민수는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게끔 한번 꺾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이미 세브란스 쪽에 다녀왔어.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따라가다 보니 나오더구만.”
“네. 그건 아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또 갈 수 있다는 거지. 별로 어려운 길도 아냐.”
“그렇…… 습니까? 강북 쪽은 엄청 경비가 삼엄하다고 들었는데요.”
“우리에게는 아냐. 산은 여전히 우리 영역이라.”
“아…….”
이순규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산은 여전히 라드의 영역이라고 봐야 했다.
시야가 좋지 못한 곳일수록 라드가 유리해지지 않겠나.
특히 나무가 많아 총질도 별로 효과가 없을 곳에서는 군인조차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골목길을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 있긴 한데……. 뭐, 엄청 짧아. 대신 엄청나게 돌아가야지.”
“엄청나게 돌아……?”
“북한산.”
“아…….”
북한산…….
경북궁 북쪽으로 해서 위치한 산을 통해 돌아간다면 사실상 강북에 위치한 그 어떤 지역도 바로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물론 그 산을 통과한다는 게…….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일이긴 했다.
생존자들은, 그러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에 남아 문명의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라드들은 그 압도적인 피지컬을 이용해 산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모든 산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구가 몰려 살던 지역 근처의 산속은 일종의 마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정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산과 인접한 곳 모두가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을 지경이었다.
강북에 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확실히…… 그렇게 가면 들키지 않겠군요.”
“전혀 그럴 위험이 없지.”
“하지만 저희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라드가 많아서…….”
“우리랑 같이 가면 돼.”
“같이…… 음.”
이순규는 침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태도를 보면 이놈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믿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속을 같이 걸어?
이만한 무리를 이룬 라드와?
‘살아 있는 도시락통 신세가 될 거 같은데…….’
이순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김민수는 강화된 본능으로 이순규의 생각을 읽어 냈다
“걱정 말지. 어차피 많이 갈 것도 아니고…… 100명 남짓일 텐데……. 그쪽엔 잡혀 있는 민간인만 수천이야.”
“수천……?”
“그래. 우리가 세브란스만 본 줄 아나.”
김민수는 킬킬 웃었다.
누가 이런 짓을 주도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악당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그 위에 있는 산…… 그 옆에 있는 산…… 모조리 개간 중이더군.”
“개간이라. 하긴, 농사를 짓긴 해야겠죠.”
개간이라면 수원에서도 진행 중이지 않나?
버티기에 들어가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지 라드들의 수명이 아무래도 적을 거라는 유현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이순규가 훨씬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명백히.
‘아무튼, 버티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들이치는 비애감을 뒤로하고, 이순규는 김민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민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뭐,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보통 노예를 사용하나?”
“노예?”
“그래. 맞으면서 일을 하고 있더군.”
“아……. 아……. 그렇군요.”
노예라면 얘기가 좀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리고 그 규모가 수천이라면…….
“죽으면 내다 버리는지, 산 구석에서 악취가 진동해.”
“허어…….”
“여러 가지 효과가 있겠지. 우리들도 썩은 건 별로거든.”
“라드를 내쫓는다는 거죠?”
“그렇지. 게다가 총 든 군인도 있지. 많지는 않지만.”
“으음…….”
잡혀 있는 노예 수천.
그리고, 아마도 실험체들로 가득 차 있을 세브란스까지.
확실히 그쪽을 무너뜨리게 되면 라드들도 얻게 되는 게 많을 터였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가는 도중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이제 확인했다.
하지만 다 끝나고 나서는……?
“일단 가서 얘기나 나눠 보지. 우리도 급할 건 없어.”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과연 충동성 때문에라도 성격이 급한 김민수가 이순규를 떠밀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박중은 이게 혹 공격인가 해서 움찔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인사까지 하고 나오는 이순규를 보고 나서야 총구를 내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러곤 재빨리 이순규에게 달려가 물었다.
이순규는 답 대신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별다른 뜻이 담긴 건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지나간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후…….”
박중 대위뿐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들 그저 기다렸다.
아니,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고 뒤를 경계하면서 수원 부대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이순규가 이러저러한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박중 또한 비슷한 걱정이 들었다.
“어쩌죠?”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대령조차 그랬다는 점이었다.
위험하지 않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정부는 더 강해질 겁니다. 노예만 있겠습니까? 군인들도 계속 영입하고 있을 텐데……. 우리랑은 다르게 농사나 이런 잡일에 아예 동원이 되지 않는다면……. 훨씬 잔류 인원이 늘어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우리를…….”
“네. 정면에서 치고 들어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적이니까요.”
“청주나 다른 곳엔 연락이 안 되나?”
“답이 아직…….”
“이런 망할 놈들! 정부랑 척지기 싫은 거야! 내막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대령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리더라는 건 권한도 있는 한편…….
그만큼의 책임도 있기 마련 아니겠나.
문명사회에서의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겠으나, 지금은 아예 생명 그 자체였다.
그들이 져야 할 무게가 다른 이의 생명이 되었을 땐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고터에 사람을 보내지.”
“네? 고터로요?”
“정유현 교수랑…… 김태평. 그 둘에게 알려. 아무래도…… 판단을 더 잘할 거야.”
“아…….”
고터 사람들이 아니라 그 둘과 상의를 한다.
박중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터 쪽에서 본 소장이라는 인간은 직함 말고는 아무것도 달리 볼 게 없던 놈이지 않나.
그에 비해 방금 언급한 둘은…….
좀 달랐다.
“알겠습니다. 누굴 보낼까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이 얘기가 새어 나가면 안 돼.”
“아. 그럼…….”
“아무래도 자네가 다녀오는 게 좋겠군.”
정부 측이 강대한 세력이라는 건, 애써 막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집단이 거대해지면 거대해질수록 정보 통제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건 기정사실이지 않나.
특히 수원은 바깥에서 유입되는 인원을 적게나마 지속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애초에 지도부 측에서도 그들을 통해 바깥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만큼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아니, 그 꼴을 봤는데도 이런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나도 그렇네. 하지만…… 더 이상 옳고 그름이 중요한 세상은 아니지 않나.”
“거……. 참……. 시발……. 아, 죄송합니다.”
충직한 군인인 박중이 저도 모르게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원 내부에 도는 소문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중에서도 김선태 그 악마 같은 놈과 싸워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정부 측에 붙으면 고기가 나온다더라.
-심지어 종로에 가면 이쁜 여자들도 많다더라.
-술도 주말마다 준다더라. 그것도 양주로.
이따위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실제로 탈영하는 인원들이 많지는 않아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이거야 뭐 사태 발생하고 쭉 있기는 했다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수원 자체의 상황은 훨씬 더 좋아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정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네. 그럴 만한 상황이지.”
“어휴……. 어떻게 사람이.”
“아무튼, 가 보게. 가서 얘기를 나눠 봐.”
“별 뾰족한 수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 둘도 긴가민가한 상황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나을 거 같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해주게.”
“네, 대령님.”
아무튼, 박중은 그 길로 부대를 꾸려 고터 쪽으로 출발했다.
원래도 황량했던 길이었는데 오늘따라 더 그랬다.
라드고 사람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고터 가까이 와서 알 수 있었다.
“그 자식들인가?”
시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딱 봐도 라드의 시신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머리나 몸통 혹은 팔다리가 박살 나 있었다.
인간의 솜씨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힘이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라드를 상대로 이딴 식의 싸움을 벌이는 건 불가했으니.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박중 대위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군그래.”
어쩐지 어디선가 보고 있을 거 같다는 느낌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무리 상대가 정부라고 해도, 라드와 손을 잡아야 한다니.
게다가 들어 보면 정유현 일행을 줄기차게 따라붙었던 놈들이지 않나?
허나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중은 그저 고개를 가로젓고는 고터로 향했다.
그러자 곧 제대로 된 소총으로 무장한 경계 인원들이 보였다.
저게 정말 발사나 될까 싶은 파이프 소총을 쥐고 있던, 어설픈 놈들은 더 이상 없었다.
수원에서 예비군 용으로 쓰던 M16을 대량 지원해 준 까닭이었다.
“아……. 수원 분들?”
“네. 보급입니다.”
“오.”
“탄약이랑 수류탄이요.”
“오오. 안으로 오시죠!”
벌써 한두 번 준 게 아니다 보니 그들은 군복만 보고도 반가움을 표했다.
경계?
소장 측에서 보낸 이들 중에는 일부 뭐 그런 인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놓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윗대가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이미 아래쪽에서는 수원과 고터가 피를 나눈 혈맹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고터가 그랬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박중 대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현과 김태평과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네?”
“뭐라고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둘 다 크게 놀랐다.
남산 측에서 드디어 여러 바이러스를 가지고 실험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다.
라드가 협력을 제안해 오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정말로 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진지해져야만 했다.
“북한산을…… 확실히…… 그럴싸하군. 흐음…….”
“어찌해야겠습니까?”
“잠시만. 저도 머리 좀 굴려 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