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정유현 (2)
‘이 중에서 걸러 내라 이건가……. 너무 많은데.’
유현은 소장이 말했던 것처럼 모두를 일단 둘러보았다.
물경 50명을 헤아릴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최근 들어 유민들이 늘어났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그나마도 분당 쪽에서 넘어오는 이들은 거르고 있음에도 이랬다.
‘그쪽은 뭐……. 장난 아니라고 했지?’
교통이 좋다고는 하지만, 안에 갇혀 있던 인구가 너무 많았던 탓에 반강제적으로 분지처럼 되어서 그런 거라고 김태평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쪽에 창궐하는 라드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형성된 생존자 집단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라 들었다.
식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라드도 잡아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 뭐…….
“번거롭게 느껴지실 텐데……. 저희가 정보를 취합해야 해서요. 잠시 대화만 나눠 주시면 됩니다. 꽤 오래 걸릴 테니, 편히 이쪽에서 쉬고 계십쇼.”
그사이 김태평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맨 앞에 있던 사람 하나를 짚어 냈다.
평소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나 또는 날카로운 인상을 생각해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제스처와 미소였기 때문에, 별 경계심 없는 얼굴로 그를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들 모두 행색 때문에 초라해 보이기는 해도 모조리 바깥을 견뎌 본 사람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유현과 김용일 형사 그리고 소장 측에서 보낸 순경도 방 안에 들어갔다.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것처럼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근에 들어온 사람 하나와 나머지 넷이 마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 태화 의료원 감염내과 과장 정유현입니다.”
“어……? 정유현……? 그 사람이요?”
“네.”
“와……. 여기…….”
“저는 전 국정원 해외 3팀 팀장 김태평입니다.”
“전 전 광수대 형사 김용일입니다.”
“저는 이곳의 운영을 맡고 있는 박대승이라고 합니다.”
박대승 말고는 다 만만한 사람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맨 처음에 소개한 정유현은 실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민간인 집단에서 처음부터 이 사람 말만 들었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거라는 것이 중론일 정도였다.
당시 있었던 정유현에 대한 탄압 때문에라도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걸 감안해 보면 뭐, 정말 대단한 인지도라 할 수 있었다.
‘안도하는군……. 이 사람은 첩자일 가능성이 적다.’
그 반응을 유심히 보는 이가 있었다.
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유심히 보고 있긴 했지만, 딱 보면서 이렇겠다 저렇겠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김태평뿐이지 않겠나.
그만큼 여러 인간 군상을 목도해 온 사람은 아마 없을 터였다.
국정원 요원들 사이에서조차 골든 트라이앵글보다는 마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악의 군상 가운데 있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일부러 저 앞에서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고 일부러 모자도 깊이 쓰고 있던 결과 모든 합류자들은 이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진면목을 확인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전 전 태화 의료원 감염내과 과장……. 정유현입니다.”
“아.”
그렇게 몇이나 흘려보냈을까?
중간쯤 되니까 이 짓거리가 의미가 있나 싶어지기도 했다.
특히 김태평처럼 첩보 활동을 실제로 해 본 적이 없던 이들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일단 위험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친 기색을 티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김태평의 눈에 들어왔다.
‘방금…… 반응이…….’
정유현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놀라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허나,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이는 극히 드물다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차 싶은 마음에 태도를 금세 고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나?
이 일련의 연쇄 반응은 김태평의 요원으로서의 감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곧 김태평은 상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 최근에 한번 깎은 적이 있군. 자기가 깎은 건 아냐. 길이가 상당히 균일해.’
뭐…….
짧은 헤어스타일 자체가 드문 건 아니었다.
머리가 길면 성가시지 않던가.
시골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는 면도기를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허나 뒷머리마저 균일하게 깎여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의 존재를 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옷차림은 낡았군……. 사이즈는 잘 안 맞고……. 그에 비해 신발은 상당히 상태가 좋아. 걸어올 때 보면 나름 사이즈도 잘 맞았던 거 같고…….’
신발과 옷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할까.
생존에 있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건 신발이었다.
맨발보다 장거리 이동에도 유리할뿐더러, 무엇보다 바닥에 있는 여러 장애물로부터 보호도 가능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군화가 아닌 안전화를 신고 있었는데, 저 정도면 이 시점에서 거의 뭐 최고로 좋은 신발을 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이쯤 할까요?”
언제나 그러했든 면접의 종료는 김태평이 알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유현만큼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하고 있었지만, 김태평이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번에도 역시 꽝인가 싶어 하고 있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고생하셨는데, 악수라도 합시다.”
김태평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건너편으로 넘어가 손을 뻗었다.
이전의 면접을 봤었다면야 상대도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가 않지 않나.
그러다 보니 상대는 별 망설임 없이, 혹은 망설임 없는 척을 하며 손을 마주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김태평은 거기에 더해 말을 한마디 덧붙이면서 마주 내민 손을 꽉 잡았다.
‘굳은살……. 중지와 약지. 근데 나머지 부분은 부드럽군그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태반이 그렇긴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용일을 제외한 모두의 손바닥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유현이나 김태평은 딱 중지와 약지가 시작하는 부위 마디 부근만큼은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왜?
운동 때문이었다.
‘노동은 아냐.’
운동과 노동이 다른 점은 비단 마음가짐만은 아니지 않겠나.
노동하면서 고립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단위 시간당 최대한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저기 굳은살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더해 야외에서의 노동은 아무래도 전반적인 손의 손상을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장갑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고터에서조차 작업용 장갑은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런 장갑이 있었다면 부분적인 굳은살도 배기기 어려웠을 터였다.
‘이 자식은 잘 봐야겠군.’
그러나 김태평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그를 배웅해 주었다.
면접도 끊지 않았다.
터럭만큼의 의심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면접이 지속되다가, 또다시 김태평이 일어나 악수를 청하는 때가 있었다.
그제야 유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쌔함 중 몇몇은 유효하다는 것을.
‘확실히 내 이름을 말할 때 보이는 반응 그리고 김태평의 이름에 보이는 반응이 겹쳐지는 인간들이……. 이상해 보이는 모양인데.’
허나 100%는 아니었다.
유현이 의심스럽게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더 많았다.
확실하지 않기에 말을 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긴 검증 시간이 끝나고 나서 일행은 소장에게 가기 전에 잠시 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상한 사람……. 누가 있었습니까?”
주로 김태평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저 당연한 일로만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다 대고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이들에 대한 감시역으로도 들어와 있던 순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상 들어와 보니 이들이 꽤나 진중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그랬다.
무엇보다 그 또한 정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원 측에서 군인들이 오지 않았나?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고터 쪽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병력이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정부 측과 진짜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본대가 와도 힘들 수 있다고 했어.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자격도 없다 할 수 있었다.
해서 그는 그저 마른침이나 꿀꺽 삼키면서 자신이 작성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사람 이름마다 뭐라 메모가 적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별 의견이 없었다.
몇몇에 대해서는 수상쩍다는 말이 쓰여있기도 했지만 근거는 참으로 빈약했다.
“그렇군요. 여기 세 분. 이분 서류는 따로 빼죠.”
김태평이 보기에는 한심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뭐가 되었건 고터는 건재해야 했고, 더 나아가 이용해 먹어야만 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렇다면 괜히 감정이 틀어질 만한 거리를 만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기 싸움을 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급이 아예 다른 존재들끼리는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서열이 정리되곤 하는 법이었다.
“김용일 형사님?”
“아, 저는 여기.”
그나마 형사 쪽은 훨씬 나았다.
근거라고 하는 것이 말투나 표정, 눈빛 그리고 다리를 떨었다거나 하는 것들이긴 했지만…….
일부 김태평과 일치하는 것도 있었다.
확실히 나쁜 놈들을 잡아들였던 경험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양반도 과학 수사가 더해지면 꽤나 날릴 수 있겠지.’
김태평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현의 서류도 받았다.
이쪽이 낸 근거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는데, 김태평과 거의 일치했다.
‘이 사람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랬다.
김태평은 확실히 의대를 갔으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류를 모아, 특이 사항이 적힌 서류를 한쪽으로 밀었다.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확실히 이상한 놈은 셋 정도. 좀 이상한 놈까지 하면 다섯 정도였다.
지금 모인 놈들이 50명 남짓이니 이만하면 꽤 많은 셈이었다.
더 있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
이 안에 괜히 낑겨 들어간 사람도 있을 테고.
점쟁이도 아닌데 어찌 얼굴만 보고 첩자를 알아보겠나.
“겹치는 인원이 모두 넷이군요. 겹치지 않는 인원까지 다 합치면 열 명…….”
“많군요.”
“고터에서 이 정도 되는 인원을 추적할 만한 여력은 되겠죠?”
“네? 아, 네. 뭐……. 근데 몰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몰래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여기서 추려 내지 못한 놈에게 어떤 식으로든 연락 닿는 걸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그게 이들에게 있어 가능한 일인가?
김태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털어 내려다가 간신히 참아 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이렇게 겹치는 넷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고 나머지는 멀리서 관찰하기만 하죠.”
“넷은 어떻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놈을 제가. 이놈은 교수님이, 이놈은 형사님이 그리고 이놈은 순경님이.”
“아……. 음. 그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뭐, 저희끼리 결정하지 말고 우선 소장님께 가 보죠.”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