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정유현 (1)
유현은 고터에 남았다.
원래 그러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수원에서도 인정한 바 있지 않겠나?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텐데 사용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저기, 교수님?”
물론 매 순간 그 영향력을 고려하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냥 여기서 나온 음식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훌륭해서 감탄하고 있던 참이었다.
옆에 있던 김태평, 김용일 또한 비슷했다.
“아, 네.”
다가온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뭐 고터에 있는 사람 중 얼굴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딱히 유현에게는 이제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은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네.”
“식사하는 데 방해한 것은 아닌지…….”
“아, 아닙니다. 마침 다 먹어서요.”
“다행이군요. 다름이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든지요.”
유현은 최대한 좋은 사람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고터와는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하지 않던가.
정부와는 달리 수원에서는 딱히 이 고터를 차지하고픈 야욕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용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어차피 적인 정부와 같이 싸울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름 순수한 마음으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네. 그…… 라드 전문가 아니십니까?”
“나름 그렇죠.”
“혹시 이 사태가 언제쯤 끝날는지요.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런데 사실 제가 잘나가던 사업가거든요. 그러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참 답답합니다.”
사업가라는 말에 유현은 다시 한번 눈앞에 선 사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사태 전이었다면 특별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여기에 있는 여느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다른 곳보다는 잘 먹고 지내는 데다가 나름 파출소장의 배려를 받았는지 살은 그리 빠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사태는 끝날 겁니다. 라드의 수명은 인간에 비해 아주 짧아요.”
“아!”
“그리고 정상적인 생식 활동도 어려울 겁니다.”
유현은 도망치던 길에 보았던 마을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 마을에서 확인한, 어린 라드를 떠올리고 있었다.
흉포했지만 그에 비해 성장 자체는 인간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호르몬이 날뛴다 해도 종의 특성을 넘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뭐……. 개중에는 모성애가 있는 개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라드가 아기를 보살필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생식이 가능할까?
호르몬이란 것은 아주 적은 양도 인체에 있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법이었다.
제대로 된 임신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 그럼?”
“적어도 10년 내에는 끝날 겁니다.”
“10년은…….”
유현의 말에 따라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져 가던 자칭 사업가의 얼굴이 툭 어두워졌다.
10년은 너무 길다는 것일 터였다.
유현이 보기에도 그랬다.
사태가 터진 지 영겁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 같지만 냉정히 되돌아보면 이제 고작해야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지 않나?
이만한 세월을 적어도 열 번을 반복해야 한다는 건데…….
“길죠. 그 전에 끝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 그건 다행입니다. 어떤……?”
“자세한 사안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결국, 라드도 감염 질환이라는 걸 유념하셔야 합니다. 저것들은 좀비가 된 게 아니에요.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결국엔 질병의 결과입니다. 어떻게든 치료와 예방이 가능할 거란 얘기죠.”
“아…….”
물론 유현이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기에 끝은 좋게좋게 끝내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유현을 향해 김태평이 말을 걸어왔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저러는데.”
“뭐……. 이게 제 일 아닙니까?”
“그건 맞죠.”
“호감도가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이곳을 우리의 방패로 써야죠.”
“흐흐.”
방패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는 김태평과는 별개로 김용일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경찰이다 보니, 또 경찰 중에서도 유별난 게 정의감이 투철하던 사람이다 보니 이곳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 여기가 오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이 사람들 이거…….”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주변에 뭐가 워낙 많은 곳이었어서 그렇겠지만…….
정말 유현의 말대로 이 사태가 1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면 무조건 비축을 해 두어야만 했다.
수원도 그러고 있지 않나?
벌써 근처에 있던 농가에서 끌어온 닭과 소를 키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령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달걀과 우유 외의 소비를 하고 있진 않았다.
허나 이곳은…….
“소장의 방침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요. 그리고 정부만 무너뜨리고 나면…… 확실히 나아질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저쪽이 확보한 물자의 양은 여기보다 많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나라 무너뜨린 놈이 그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걸 믿기 어렵습니다.”
김용일은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소장을 떠올렸다.
그는 사실상 졸부의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졸부였다.
각종 사치품으로 치장한 그의 모습을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그보다도 더 잘살고 있을 거라고?
“대통령이지 않습니까. 명분이 있죠. 아마 대부분의 국가수반이나 기업들…… 근처에 힘 있던 생존자들 모두가 밑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안 들어가기 어려웠겠죠. 대통령이니까.”
“망한 나라에 대통령이…….”
“역사서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망국의 왕족이라고 해도 있기만 하면 일단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기 십상이었죠.”
“거참. 그럼 우리는…….”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만…… 그래도 서울 남부에 있는 사람들은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까…… 잠실 쪽은 어때요?”
이제 둘의 시선이 김태평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김태평이 지속적으로 그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그랬다.
물론 지금 고터에 머물고 있는 만큼 그 주체는 이쪽의 순경이 맡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김태평은 잠실에 벌써 세 번이나 다녀왔다.
“거기 생존자들이 꽤 많은 거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인구 밀집 지역이었으니까요. 너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아파트별로도 그렇고, 저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수십 개가 넘어요.”
“아……. 각 그룹의 크기는 어떤가요?”
“그것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뭐 기껏해야 100명 안팎이겠죠. 제대로 된 라드의 습격을 받으면 단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시시각각 바뀌고 있겠네요.”
“그렇죠.”
라드.
정부를 최대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라드는 무서운 존재였다.
명실공히 이 시대의 포식자들 아니던가.
실제로 김태평이 빠진 채 생존자들을 포섭하러 갔던 일행 20명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분당 쪽으로 향했던 만큼 아마도 라드에 당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수색에 나섰던 이들이 발견한 흔적 또한 인간보다는 라드가 범인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만한 규모의 그룹에서도 그러할진대 더 작은 그룹에서는 어떻겠나.
“교수님. 소장님이 부르십니다.”
이후로는 잡담에 가까운 담소를 나누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비를 맡고 있던 인원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이곳에서 소장은 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만 했다.
“저만요?”
“아뇨. 다 오시라고 합니다.”
“그러죠.”
무슨 꿍꿍이속인지에 대한 걱정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이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기에 그랬다.
소장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부라는 적을.
그리고 그게 맞는 일이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대비도 하지 못할 테니.
그러니 지금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두려워만 하고 있지 않게 만드는 일일 터였다.
“소장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아, 덕분에…….”
안으로 들어서자 소장이 있었다.
덕분에 잘 지냈다고는 하는데 눈 밑이 퀭한 것이 잠은 잘 못 잔 모양이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불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니만 소장이 딱 그짝이었다.
“아무튼, 계속 생존자들을 받고는 있습니다. 북쪽에서 오는 놈들은 억류해 두고 동쪽에서 오는 사람들 위주로요.”
소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대강 인사말을 끝내곤 바삐 아예 화제가 다른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어 전염병의 가능성마저 걱정이 되던 곳이지 않던가?
그런 와중에 사람들이 더 늘어나다 보니 슬슬 지하만이 아니라 위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하상가보다는 안전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편이었지만 워낙에 덩어리가 큰 집단이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주변에 있던 라드는 쓸어버린 지 오래다 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근데 사실…… 이게 정말 첩자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한번 전체적으로 봐주실 수 있습니까? 받아 줬다고는 해도 인적 사항도 따로 적어 놓고 있습니다. 지내는 곳도 숙소 문제라고 하고……. 1층에서 지내도록 하고 있고요. 여기 팀장님이 조언해 주신 대로요.”
당연하지만 생각 없이 받고 있는 건 아니었다.
유현 일행의 조언이 있기 전에도 그랬다.
김선태에게 호되게 당한 바 있지 않던가.
그 누구보다 소장이 제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만큼 김선태라는 인간을 욕심냈었던 탓이었다.
“아. 보죠.”
“좋습니다.”
“원래 나쁜 놈 잡는 게 일이라.”
하여간, 소장의 말에 유현뿐만 아니라 김태평, 김용일 모두 눈을 빛냈다.
특히 김용일이 그랬는데 그는 수원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대부분의 시간을 소일거리나 하면서 죽이고 있지 않았나.
그러던 차에 드디어 자신의 장기를 보여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신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개하는 시간으로 일러두기는 했습니다.”
“네.”
“그러면서 자연스레 보시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장님.”
그렇게 셋은 소장과 그를 호위하는 인원들과 함께 1층으로 향했다.
이전에는 고속터미널로 쓰였던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방에 작은 가게 터들이 널려 있었는데 새로이 들어온 이들은 그곳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침구류가 부족할 만한 일은 없었다.
백화점도 백화점이지만 이 안에 수없이 많이 있던 상가나 창고 도처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여러분. 소장입니다.”
물론 지금은 숙소가 아닌 대합실에 모여 있었다.
무기 따위는 없이, 맨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 오는 이들에게 무기를 들려 주는 부주의한 집단이라면 당장 이 사람들부터가 불안해서 못 살지 않겠나.
물론 다들 그렇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애써 두려움을 삭히고 있었다.
대통령이 보낸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