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동맹 (3)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놈을……!”
“정 순경이 애들 끌고 갔습니다.”
“그놈 하나만 갔어?”
“일단…… 경계는 서야 하니까요.”
“이런 멍청한! 방금 못 들었어? 빨리 추격해!”
“네, 네!”
이어지는 말에 초조해진 소장은 길길이 날뛰면서 안에 들어와 있던 심복들 중 무려 절반을 밖으로 내몰았다.
김태평은 그런 소장을 보면서, 역시나 여긴 이자에게 너무 과분한 곳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생존자가, 그리고 모든 무리의 리더가 다 비범하지는 않겠구나 싶기도 했고.
‘하긴……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
따지고 보면 박원상도 그렇지 않나.
벌써 나가리 되었어도 오래일 사람인데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것도 남산에서만큼은 나름 주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죄라면 그런 남편을 둔 것밖에 없던 현경은 이제 라드가 되어 저 바깥세상을 배회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기를 집어삼킬 수 있다면…… 교수의 명망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수원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만 그쪽은 군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어려워 보였다.
대령이 뭐 아주 모자란 사람이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이미 사령관이 자살함으로써 발생한 공백을 훌륭히 메우고 있는 인간 아닌가.
그런 집단에서 별다른 사유 없이 또 리더의 변경을 요하게 되면 피로감을 느끼지, 결코 필요성을 느끼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여긴 어떻게 봐도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이제 와서 가 봐야 잡을 수 있겠나?’
김태평은 그렇게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김선태를 떠올렸다.
그는 그야말로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원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어느 정도 과소평가하고 있던 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상황에서 도망쳤다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아까?
아까도 사실 썩 괜찮았다.
그 순간에 그렇게 무력화시키고 도망갈 수 있었다는 건…….
이미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비하고 있던 인간을 준비 없이 있다가 당한 놈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김태평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간신히 안정을 되찾게 된 소장이 돌아왔다.
밖에서 한동안 소리를 지르더니만 여전히 얼굴은 붉었다.
유현은 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궁금해진 김태평은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유현은 미미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확실히 속내를 숨길 줄 아는 인간이었다.
저런 인간은 상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운이 나빴다고 해야겠지?’
그냥 보통의 감염내과 교수였다면 대체 어떻게 걸림돌이 될 수 있었겠나.
이런 인간이라 일이 어려웠던 것일 터였다.
물론…….
대한민국 전체로 확대해서 보면 당연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했다.
윗놈들의 본모습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이나 적나라하게 보게 된 김태평으로서는 다시 놈들이 복권해서 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아랫것들이 일을 똑바로 못 해서. 하여간, 제가 나서지 않으면 작은 일 하나 굴러가는 게 없다니까요.”
소장은 너스레를 떨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정부에서 우리를 노리게 될 거다, 이 말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회유를 시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회유라…… 강변이 그렇게 넘어갔었죠?”
“아.”
“거기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고속터미널과 강변 테크노 마트는 상당히 가까운 곳이지 않나.
물론 지금 세상에, 이런 도심에서의 몇 킬로는 거의 수백 킬로 이상 떨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거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생존자들은 어떻게든 도망쳐 왔다.
그렇게 고터 쪽에서도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절대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아요. 회유에 넘어가시려면, 지금 이 지위는 다 포기해야 할 겁니다.”
“이건 제가 여기서 확보한 자원인데요?”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막말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여긴…… 하루도 못 버틸걸요.”
“그렇게 힘이 있다면 왜 안 쳐들어옵니까?”
김태평은 이렇게 되묻는 소장을 보면서, 정말로 운이 좋았구나 싶었다.
정부 측에 남은 놈들이 다들 악랄한 놈들이라 오히려 살아남은 셈이라 할 수 있었다.
“뻔하죠. 불리해지면 여기에 있는 걸 싹 불태울까 봐 안 오는 겁니다.”
“아.”
반응을 보니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냥 다 없애 버리겠다는 발상을 누구나 할 수 있겠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품어 볼 수는 있겠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이 생기면 마지막까지 아쉬움이 생기게 되기 마련이었다.
당장 이 주변이 이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각료들이 강남을 파괴하는 데 심리적인 주저함이 있어서이지 않나.
“이런 망할…….”
“이렇게 하죠.”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그러나 분노보다는 공포가 느껴지는 소장을 보면서 유현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수원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이 거의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김선태가 한 짓일 텐데……. 덕분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아무튼, 서로 교류하기가 좋아졌어요.”
“그건…… 그렇…… 그렇군요.”
소장은 정찰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말끝을 흐렸다.
유현은 그 어색한 얼버무림을 간신히 별거 아니라는 투로 넘긴 후, 말을 이었다.
“저희 수원은 전투 인원이 많습니다. 그에 반해 이쪽은 자원이 많죠.”
자원 중 대다수가 사치품에 해당한다는 것이 문제긴 한데…….
이게 딱히 당장의 생존에는 영향이 없을지 몰라도, 저쪽.
그러니까 정부와의 협상에 있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었다.
김태평이 그러지 않았나?
명동 쪽은 아예 군대도 진입시키지 않았었다고.
후에 가스탄을 터뜨리고 들어가 라드 놈들을 육탄전으로 죽였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이 일반 병사들이 죽어 나갔지만, 위쪽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도 했고.
그저 그곳 백화점 등지에 즐비하게 놓여 있던 사치품을 획득한 것에만 만족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 협상에 있어서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 않나.
“둘이 힘을 합치게 되면 정부라는 큰 적에 대항해서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을 겁니다.”
“하아…….”
소장은 싸운다는 선택지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스스로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세상에서 자원과 무력은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기껏해야 파이프 소총으로 무장한 이쪽 인원들은 총알받이 대용이지 않겠나?
“대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소장님과 심복들의 지위가 꼭 이어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저희도 도울 거고요.”
“아…….”
이번에도 역시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약간 소극적이었다.
뭐가 되었건 지위가 이어진다는 말은 매력적이어서 그랬다.
어쩌면 지금 이들이 보유한 무장 집단으로 이곳을 통제하는 것보다 수원의 도움을 받아 통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 저.”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굉장히 난처해하는 기색이었는데, 소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현 일행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정 순경이라는 사람인가.’
실패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소장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됐어!”
“이미 다리를 건넜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뭐 날아가? 가서 잡아야지! 고물 오토바이 하나 달랑 타고 튀었다며! 우리는 스포츠카가 몇 댄데!”
“그게. 그쪽에 군인들이…….”
“군인?”
“네. 오토바이 하나만 들어갈 때는 그래도 경계가…… 그랬는데. 저희가 가니까 바로 발포 방송이 나왔습니다.”
“이런 망할.”
강북으로 갈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예 안 가 본 것은 아니었다.
정찰의 목적도 목적이지만, 하여간 물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반포대교만 건너면 바로 이태원, 한남이다 보니 그쪽도 뭐가 아주 많았다.
심지어 왜인지는 몰라도 라드 숫자도 굉장히 적은 편이라 나다니기가 좋았었는데…….
“규모는. 많아?”
“네? 네. 사실 정확히 보진 못했는데……. 일단 제대로 된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드르륵 갈기는데…….”
“이런 멍청한 놈이.”
김선태 같은 놈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는데.
하필 그놈이 첩자…… 아니, 정부의 수괴 중 하나였다니.
소장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김태평이 끼어들었다.
“남산 쪽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정부군 관할이었을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하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 계기가 있었을 터였다.
북쪽을 다 정리해서여서도 있을 테지만, 수원을 크나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김선태가 끌고 간 부대와 통신이 끊겼을 테니…….
또 뭐 완전히 전멸했겠나.
왔다 갔다 하는 놈들 중 생존자가 있었다면 그들을 통해서도 궤멸당했다는 것 정도는 들었을 터였다.
“일차 목표는 고터겠죠.”
아마 지나가는 길목 정도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격렬한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항복을 받아 줄 가능성이 컸다.
저들로서도 병력이나 탄약을 낭비하고픈 생각이 없을 테니.
허나 굳이 그렇게 말해 줄 필요가 있을까.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비록 좀 모자란 우군이라고 해도 있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런…… 지금 병력이 있습니까?”
확실히 반포 대교 바로 너머에 군인들이 있다는 말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소장이 억지로 갖추고 있던 여유라는 가면이 스르륵 벗겨져 버렸다.
그는 이제 간절한 얼굴이 되어 이쪽에 읍소했다.
그런다고 해서 굳이 뻗댈 필요는 없었다.
“요청해야죠. 지금 당장은 저희만 왔습니다.”
“지금 넘어오면…….”
“넘어오진 않겠죠, 설마.”
“그놈이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보고가 우선일 겁니다. 대통령이 있는 한 부대를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그쪽의 의사 결정 과정이 있을 테니…….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김태평의 말에 소장은 다시 여유를 아니,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 온 사람이라니 어느 정도 프로세스를 알고 있지 않겠나.
게다가 들어 보니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군 통수권자가 대통령인데 그 사람 말도 없이 군을 움직일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그렇…… 그렇군요. 그럼 꼭 좀 부탁드립니다.”
“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저희도 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수원과 저희는 결국, 한 몸이군요.”
“그렇죠.”
유현은 김태평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동맹은 체결되었다.
적은 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