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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269화 (269/323)

269화 결국, 위로 (2)

수원 근처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안 좋은 뜻일 텐데, 지금 세상에서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특히 대령은 그런 보고를 들을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네.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리를 내 봐도 그렇다 이거지?”

“어떤 자극을 주려고 해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텅 비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잘되었군그래.”

주변에 위험 요소가 사라졌다는 뜻이라 그랬다.

비단 이게 라드만을 만하는 게 아니었다.

생존자들 또한 골칫거리였다.

꼭 식인종이나 약탈자 무리들만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생존자가 주변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부담이었다.

대령이 표방하고 있는 부대 원칙이 군인에 입각해서 만든 거라서 그랬다.

“그럼 위로 올라가 보는 것도 괜찮겠군.”

“부대를 너무 비우진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이제 여기 사는 민간인들도 굉장히 많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근처에 생존자들이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적어도 대령은 고통스러웠다.

뻔히 상호 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뭐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뜯어 갈 놈들이 보여서 그랬다.

문제는 그때 단호하게 나서다간 병사들이 동요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강변이 무너졌을 당시, 그리고 정부 측에서 사람들을 잡아가는 통에 도망 오던 이들 중 일부를 받아 주지 않거나, 물자를 압류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 병사들이 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래도 그건 어찌어찌 봉합이 됐어.’

하지만 정부라는 큰 적이 등장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결속이 단단해진 마당이었다.

외부의 적이 협동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참이라는 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더랬다.

‘고터라…… 고터는……. 흠.’

그래서 고터는 의외였다.

아니, 정부라는 적이 있는데 왜 뜬금없이 여기로 와서 정찰을 한단 말인가?

힘을 합쳐서 막아야지.

이게 무슨 억지를 부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놈들은 진짜 악이었다.

그것도 거악.

‘세상에 라드를 생산해서 공격할 생각을 한다니……. 미친 새끼들.’

그런 놈들이 있는데 후방을 신경 쓸 여지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군 장교로 어느 정도 공부도 했고 또 팔자에 없는 사령관 노릇을 하면서 이런저런 별 엿 같은 경험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이해 불가능의 영역이 버젓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끼익

그는 답한 것처럼 씩씩하게 밖으로 나서는 박중을 보다가, 이내 창밖을 내다보았다.

부대 한켠에 조그만하게 개간이 되어 가고 있던 밭이 이제는 상당히 커졌다.

저기서 소출이 과연 얼마나 나올는지는 몰라도…….

반만이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해진다면 몇 년은 족히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인류는 풍족했었는지 아직도 여기저기 털면 뭐가 많이 나와서 그랬다.

동시에 유통 기한이라는 게 말 그대로 유통 기한이고 보관만 잘하면 어지간해서는 썩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걸 떠나서 조금 썩은 것 정도는 먹어도 괜찮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별로 그런 거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지…….’

대령은 푹 하고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껴 두었던 위스키를 꺼냈다.

아껴 두었다고 해 봐야 군납용이다 보니 맛은 그닥이었다.

다행인 건 대령이 사태가 터지기 전이라고 해도 좋은 술을 마셔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아…….”

대령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안주 삼아서 위스키를 마신 후, 정유현 일행을 떠올렸다.

‘올려 보내야 한다, 이 말이지?’

아직 권력 다툼이라고 할 건 없었다.

지금까지 받아 온 생존자 무리들하고 다르긴 했다.

심지어 본부에서 온 인원들하고도 달랐다.

그들은 대우를 좀 더 잘 받는 노동 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지 않았나?

허나 정유현, 김태평 일행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별동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유현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닌 명성은,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했으니.

‘자꾸 활약을 하게 만드는데……. 이게 또 어쩔 수가 없군.’

그 명성이 대령에게는 부담이었다.

수원 부대에 대한 장악력이 욕심이 나지 않아서라고 한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제아무리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찌 사소한 욕심조차 없을 수 있겠나.

하지만 그보다 더한 걱정은, 이제 겨우 뭔가 돌아가는 느낌이 나는데 여기에 혼란이 있게 되면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 나갈까에 대한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정유현. 그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악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 세상의 이치가 그랬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어떻게 보면, 정유현이 북상하는 길에 있던 모든 곳은 다 파괴되고 버려졌다.

혹 수원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닌가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 대령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삼켰다.

부우웅

대령이 홀로 불안과 고독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는 동안, 박중 대위와 김태평 그리고 유현 일행은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전투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엄밀히 따져 봤을 때 딱히 전투 요원은 아닌 유현이 여기 끼게 된 것은 역시나 그의 명성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상대로 적대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무리가 접근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부터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소수가 접근하면 뭐가 다를까?

그냥 잡혀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유현이 가게 되었다.

-교수님이라면 얼굴이나 이름 아는 사람이 적어도 몇 명은 될 겁니다. 어쩌면 꽤 많을 수도 있고요. 고속터미널 쪽이라면 통신이 그래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김태평의 주장 때문이었다.

박중 대위는 군인도 요원 출신도 아닌 민간인이 그런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유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 버렸다.

‘그러죠, 라고 했지.’

유현은 차에 탄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황폐화되었다는 보고가 과장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있던 소음이 사라진 도시는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을 넘어 죽어 있다는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과장은 아니었다.

이곳에 가득한 것은 온통 죽음뿐이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어. 여전히 정부는 강하고……. 위로 향하려면 고속터미널은 필수야.’

잠실 쪽을 우회해서 가는 방법도 있다고 하지만, 강변이 무너지면서 그 여파로 인해 그쪽은 라드가 창궐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태평의 말이었으니 틀림없다고 봐야 했다.

거기에 더해 그쪽 생존자 무리들도 문제였다.

하나의 거대 집합체로 발전한 고속터미널과는 달리 잠실 쪽은 잘게 쪼개져 있었다.

성향은 다들 달랐는데, 보통 호전적이라고 보면 맞았다.

애초에 구우준이 이끌던 무리도 그쪽 출신이었고.

“교수님, 걱정되세요?”

“네? 아, 뭐……. 어쩔 수 없죠. 저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리고 뭐. 이상하면 형사님이 쏘겠죠.”

“아니, 제가 아무리 잘 쏴도 한 번에 한 명이에요.”

“그게 어딥니까.”

“그…….”

유현은 오예리 형사를 향해 웃어 보인 후, 이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은 여전히 폐허였다.

아니, 이제 본격적인 폐허였다.

폭격에 의해 박살이 난 도로를 차량이 덜컹거리며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고속터미널 쪽에서 지난 후 아무도 지난 적이 없는지 그저 바퀴 자국만 덜렁 나 있었다.

“아무도 없군.”

앞서가는 차량에 타고 있던 김태평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여기 그래도 민간인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도 남아 있질 않았다.

아마 분당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세력 다툼에서 밀리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넘어오기라도 할 텐데…….

통신이라고는 다 사라져 버렸으니 아마 한참 걸릴 터였다.

“개자식들.”

같은 광경을 보면서 박중 대위는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정부 때문 아니던가.

하여간, 각자의 생각을 폐허에 흩어 두고, 이내 일행은 고속터미널 쪽에 다다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부고속도로에서 사평 쪽으로 빠지는 구간에 다다랐다.

“건물이 너무 높으니까 쫄리는데.”

박중 대위는 전에도 와 봐 놓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지나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쪽은 수원 군부대하고는 아예 상황이 달랐다.

애초에 고도 제한이 있어 높은 건물이라고는 없었던 데다가 폭격까지 있었던 곳과 반포의 아파트 지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찰이 있을까요?”

유현의 말에 김태평이 고개를 저었다.

“이 근방은 완전히 고속터미널 무리가 장악한 곳입니다. 뭐, 작은 생존자 무리나 라드 무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고속터미널 쪽에서 굳이 여기에 정찰을, 그것도 저 높이 보내 놨을 거 같진 않습니다. 고립된 쪽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런데……. 그 라드 놈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유현이 언급한 정찰엔 라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간과했던 김태평이 그제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놈들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상대적으로 운신이 훨씬 자유로우니…….”

포식자 놈들이 뭐 조심하면서 다니겠나.

어지간한 적은 깔아뭉개면 될 텐데.

심지어 총 든 이들도 그 정도 무리를 지은 라드를 마주하게 되면 도망을 가지 맞서 싸울 생각은 절대로 못할 터였다.

“그럼 우리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굉장히…… 무서운데.”

“요원님도 무서운 게 있습니까?”

“제가 겁이 많아서 요원이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무섭죠.”

“하하.”

유현은 마른 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터 쪽을 바라보았다.

전에 왔을 땐 엄청 생경하게만 느껴지더니 그래도 한번 봤다고 이제는 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이쪽은 폭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찬찬히 뜯어보면 이전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다.

청소 같은 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니 좀 더 낡아 보일 뿐이었다.

“그 라드도 협상의 무기가 될 겁니다.”

“좋게 생각하면 그렇죠.”

“그럼 가시죠.”

“네.”

유현은 그렇게 내다보고 있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요원인 김태평과 박중 대위 그리고 김용일 형사가 함께였다.

여차하면 대응도 가능할 그룹이었고 거기에 더해 설득력도 있는 조합이란 판단에서였다.

대학교수에 이만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 어떤 집단에서도 확보하긴 어려운 인재들이지 않겠나.

“저희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후방에는 이순규, 오예리, 김현철을 포함한 요원들과 병사들이 남았다.

저격병으로 활약할 수 있는 이들과 더불어 역시나 급습에 대응할 수 있는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수원의 정예 중의 정예가 총출동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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