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정찰 (1)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시간을 조금 되돌려, 해가 떠오를 무렵 수원.
김태평은 본인이 이룩한 업적을 돌이켜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본래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해서 하는 편인 그로서는 어부지리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의 결과를 일궈 낸 새벽의 일이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잘된 일 아닙니까? 저 망할 새끼들.”
박중 대위는 마냥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코앞까지 드리워져 있던 위협이 그냥 치워진 것도 아니고 별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그에 비해 김선태가 이끄는 정예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맥주나 한 캔 하게.”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대령조차 오늘만은 마냥 웃고만 있을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면세 창고에 쌓여 있던, 언젠가 식량이 모자라졌을 때를 대비해 숨겨 두었던 술까지 풀었다.
말이 맥주지 테이블 위에는 양주도 있었다.
그래 봐야 군납용 양주다 보니 아주 고급품이 있는 건 아니긴 했지만, 평소와 비교하면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네, 대령님.”
“이쯤 되었으면 한동안은 엄두도 못내겠구만그래.”
“네. 하하하. 아까 그 꼬락서니를 보셨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령의 말에 박중도, 김태평도 껄껄 웃었다.
나머지, 그러니까 정유현이나 이순규, 오예리 등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원래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유현과 술을 마시고 났을 때 자제력을 완전히 잃을까 봐 못 먹게 된 이순규조차 한 모금씩은 홀짝이고 있을 지경이었다.
오예리야 뭐 벌써 한 캔을 족히 비우고 양주로 달리고 있었다.
워낙에 긴장한 채로 며칠을 버텼으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까…….’
그 와중에도 유현은 어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라드 놈들……. 우리만 이득을 본 게 아니야…….’
정확한 상황은 모른다.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독한 우연이 겹쳐서 일궈 낸 결과라는 건 잘 알았다.
민간인을 하필 어젯밤 습격한 것이 라드 놈들이지 않나.
그렇다면 그 민간인들이 다 어찌 되었겠나.
몇 죽어 나갔을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수가 어마어마하게 불었을 거야. 마지막에 병사들도 당했을 테니…… 상상하기도 싫군…….’
물론 이 수원 비행장이 고작해야 라드 따위에 무너질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총으로 무장한 놈들도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장한 채 기다리는 부대인데 하물며 라드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지만, 뭐가 되었건 근처에 그런 무장 집단이 있다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근처에 아직 남아 있을 생존자들이나 식량도 쓸어 갈 것이 뻔했다.
‘뭐, 일단은 조용히 있을까.’
유현은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일을 고려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대령이나 김태평은 그럴 터였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속없이 낄낄거리고 있지 않나?
눈치 없이 이 분위기를 깨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후. 저도 그것 좀 한잔 주시죠.”
해서 유현은 맥주를 내려놓고 양주를 청했다.
맛이야 뭐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싼 양주겠지만 뭐가 되었건 독주 아니겠나.
이 지경이 된 세상에서 아침부터 술 먹고 취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유현도 이 느슨한 분위기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아, 교수님. 하하. 이거 별일이로군그래.”
대령은 그런 유현의 청이 마음에 드는지 양주를 가득 부어서 주었다.
유현은 그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막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지독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뜩이나 미세 먼지도 없는 나날인데 오늘따라 구름도 없어서 그런가…….
과장 좀 더 보태면 저 멀리 우뚝 선 L 타워까지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거기, 누구냐!”
수원 측 인사들이 아침부터 이어진 술판을 무려 해가 지도록 이어 나가는 동안, 김선태는 마침내 고속 터미널 즈음에 닿았다.
좌측으로는 과거 대단한 집값을 자랑했던 래미안 퍼스티지나 아크로리버파크 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메리어트 호텔과 신세계 백화점이 놓인, 그야말로 금싸라기 땅이었다.
‘여길…… 폭격했어야 했는데.’
그렇다 보니 이 망할 놈의 정치인들이 자기 집 및 건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쪽은 죄다 폭격에서 벗어났다.
빽빽이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데다가 백화점과 뉴코아 등의 마트까지 있는 곳이 온전히 남았다, 이 말이었다.
때문에 이 근방은 라드와 생존자가 그야말로 넘치고 있었다.
“사람이요!”
하여간, 김선태는 다급히 손을 들었다.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인지도 명확히 모르는 상황임에도 그랬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라면, 심지어 이 알짜 땅에 자리 잡은 놈들이라면 무기가 있어도 보통 많이 있는 게 아닐 거란 계산에서였다.
“이쪽으로.”
그 계산조차 조금 넘어가는 무장을 갖춘 생존자 둘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둘 중 한 놈은 손전등을 들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김선태는 둘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군인……?”
“이 새끼 이거. 우리 잡으러 온 거 아냐?”
둘은 그렇게 시야를 잃은 김선태를 두고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팔이 없는데?”
“뭐야. 이거. 왜 이렇게 후줄근해?”
“나이도 많아. 군인은…… 아닌 거 같은데.”
“흠…….”
수틀리면 뒤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모습을 드러낸 이상, 유리한 것은 김선태였다.
허리춤에 숨겨 둔 권총만으로도 이 둘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처리할 수 있었다.
아까 바로 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제는 김선태도 바닥을 주시한 채, 그림자의 위치를 가늠하게 된 지 오래였다.
“일단…… 뭐, 데려갈까?”
“그래. 뭐……. 별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김선태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였다.
혹 누군가 쫓아온다는 걸 들키게 되면 이놈들이 또 어찌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손 든 상태 그대로…… 일로와.”
“네.”
“하, 권총도 있네. 뭐지?”
“군인 놈들한테 잡혔다가 도망치면서 챙겼습니다.”
“군인 놈들? 그놈들이 이쪽으로……?”
김선태의 말에 둘의 표정이 확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인 놈들이 누굴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던가.
애초에 구반포를 지나 흑석, 노량진까지 정찰 나가서, 쓸 만한 생존자 또는 식량이나 물자를 가져오고 있다가 툭 끊기게 된 것이 바로 놈들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목격한 것은 민간인들을 끌고 가는 군인들이었다.
혹 다른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멀쩡히 잘 지내던 사람들을 냉동 트럭같이 생긴 곳에 몰아넣는 걸 본 이상 다른 상황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 간신히…… 간신히 도망친 겁니다. 다행히 제가 타 있던 트럭이 라드에게 습격을 받아서요.”
“아, 그런가.”
“운이 좋았군그래.”
김선태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해 가면서, 걸음을 따라 옮겼다.
잠깐 사이에 고터 지하상가에 닿았는데, 안쪽엔 무려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지점도 있었다.
워낙에 물품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발전기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도 많이 모일 수밖에 없는 곳이니 개량을 했거나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병원에 백화점에 호텔에 지하상가에 버스 터미널, 그러니까 큼직한 버스까지 그득한 곳이지 않나.
‘아마 강남 쪽에서 가장 융성한 무리가 여기 있을 거란 추측이 있었지…….’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쪽은 어찌 다룰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가능하다면, 회유해서 아예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냥 부수고 뺏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좀 아깝지 않겠나?
‘와 보니 그게 억측이 아니로구만, 그래. 확실히…… 이건 어떻게든 회유를 해야겠어.’
김선태는 둘을 따라가면서, 주변을 티나지 않게 두리번거렸다.
사람도 많고, 물자도 풍부해 보였다.
무엇보다 군데군데 깔려 있는 의료 물품 박스들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강남 성모를 제대로 털어 온 모양이었다.
“뭐야?”
좀 걷다 보니, 또다시 무장한 이들이 나왔다.
상태는 뭐 밖에 있던 이들과 별 차이는 없었다.
돌아가면서 경계를 서는 모양이었다.
“밖에 오더라고. 꼴이 말이 아니고, 뭔가 아는 게 있는 거 같아서.”
“근데 군복을 입고 있는데?”
“잡혔다가 도망친 거래.”
“그래? 흐음…….”
상대는 잠시 턱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비켜섰다.
‘책임자는 아닌가 보군.’
김선태는 겁먹은 얼굴을 한 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팔이 잘려서 그런가 결박도 없이 걷고 있다 보니 마음은 편안했다.
식인을 하는 놈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이쪽은 규모도 너무 크고 또 물자가 워낙에 풍부하다 보니 훨씬 온건한 모양이었다.
하긴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욕심이 지나치다면, 그러니까 대통령과 같은 이들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으나 일반적인 이들은 이렇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똑똑
아무튼, 걷고 또 걷다 보니 우측으로 꺾이는 곳이 나왔다.
군데군데 다른 출구도 보였는데 그쪽은 모조리 막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출구가 적은 편이 방어에 유리할 테니까.
다만 9호선 쪽 출구는 열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쪽을 통해서도 탐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알 수 없는 일이긴 한데…….
“들어와.”
그 우측으로 꺾인 곳엔 한때 꽤 유명했던 뷔페가 있던 건물이 있었다.
안쪽은 꽤나 밝았다.
전기가 잘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뭐지?”
“밖에서 발견한 생존자입니다. 뭔가 알고 있는 거 같길래.”
“그래? 여기 앉히지. 무장은 없겠지?”
“권총이 있길래, 그건 뺏었습니다.”
“권총이 있어……?”
“군대에 잡혔다가 도망쳤다고 합니다.”
“아. 그놈들인가.”
눈 앞에 있는 사내는 딱 봐도 비범해 보였다.
외모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만 보면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음 직한, 평범한 중년 사내였다.
허나 눈빛만은 달랐다.
수라장을 헤쳐 온, 그리고 수많은 생명을 사지로 몰아 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공허한 듯하지만 고집이 느껴지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이름은?”
의자에 앉자, 질문부터 날아왔다.
본래 이런 질문을 하려면 자기 소속이나 이름부터 밝혀야 하는 것이 예의겠으나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이런 식으로 위아래를 명확히 하는 건가?’
김선태는 눈앞의 사내에게서 대통령을 떠올릴 수 있었다.
뭔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허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주변인들의 태도가 달랐다.
이들은 사내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대통령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지.’
김선태는 간신히 새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집어삼킨 후, 입을 열었다.
“김선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