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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220화 (220/323)

220화 탈주 (5)

“무섭게도 퍼붓네…….”

이순규는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뒤로 불을 지펴 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기가 가득했다.

연기 때문에 문을 열어 두기도 했고, 애초에 창들이 죄 깨져 있어서 그렇기도 했다.

“몸은 좀 어때요?”

그는 고개를 돌려 불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요원을 돌아보았다.

총에 맞은 데다가 총알이 박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지키고 있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 봐야 제대로 된 활동이 가능할 만한 상태는 아니긴 했는데, 저만해도 용하다는 걸 의사인 이순규는 알고 있었다.

확실히 훈련받은 사람들은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주변으로 뭐 보이는 건 없군요.”

그때 오예리 형사와 짝을 이루어 휴게소 건물 안을 한 바퀴 돌고 온 김태평이 입을 열었다.

총을 들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전투에 시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옆에 있는 오예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훈련받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뭔가 대단한 점이 있다고 보는 게 옳아 보였다.

“쥐들이 많더라고요. 이 근방에 그런 곳이 별로 없죠.”

“버려진 공간이다 이건데……. 그래서 그런가 쓸 만한 것도 없어요.”

김태평은 돌아와서도 바로 앉는 대신 총 든 채로 다가와 섰다.

“밖은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이순규는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쏴아아아

이제 워낙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단지 빗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뒤에 놓인 불길이라고 해 봐야 한 줌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것도 빛이라고 밝은 데서 어두운 곳을 보게 된 마당이다 보니 더더욱 시야가 좋지 않았다.

“그냥 비만 내리고 있어요. 이래서야 뭐가 나다니긴…… 음?”

후각도 흐려지고 있기는 했다.

실제로 김태평은 예민하다 자평할 만한 능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퀴퀴한 곰팡냄새와 비 냄새 말고는 맡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그것도 아까까지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저 연기 냄새만 날 뿐이었다.

그러나 이순규는 좀 달랐다.

“왜 그러십니까.”

이순규의 말에 김태평은 물론, 오예리와 다른 요원까지도 총을 집어 들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뭔가 다른 낌새를 느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규를 믿었다.

지금껏 이순규의 직감 또는 냄새에 의지해 위기를 타개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랬다.

“라드 냄새가…… 착각은 아닙니다.”

“이런 미친……. 이 비에? 아. 그놈들……. 그놈들인가?”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어요?”

“우리 쫓고 있다는 놈들. 그놈들이 총 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준 사격을 할 정도로 이성이 있는 놈들이에요. 또 모를 일이죠, 우산이라도 쓰고 따라오고 있을 수도…….”

“상상하기 싫은 일인데…….”

2미터에 가까운 거한이 우산을 쓰고 기습을 해 오고 있다라…….

말 그대로 끔찍한 일이지 않나.

그러나 그런 끔찍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게 된 세상이었다.

해서 일행은 투덜대는 것과는 별개로 총을 겨누고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변을 먼저 눈으로 알아챈 것은 당연하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어두운 곳에 있던 김민수와 구우준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소리……? 모르겠습니다.”

“맨 앞에 저거…… 라드지? 그럼 냄새로 알았을 수도 있어.”

“라드……. 그러고 보니 너무 크긴 하네요. 근데 다른 놈들 중에서도 큰 놈이 있긴 하던데.”

“그놈은 커 봐야 인간이야. 백인이나 흑인도 아니고……. 운동선수가 아닌데 저만큼 큰 일반인이 있을 수가 있나.”

“대체 어떻게 라드가…….”

“모를 일이지. 모를 일이야.”

원래는 100미터 거리까지만 가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서 본 상대는 반대편 휴게소에서 봤던 것들하고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일단 수가 적었다.

해서 가까이, 더 가까이 가다 보니 어느새 20여 미터만을 남기고 있었는데…….

그때 돌연 상대의 경계 태세가 팍 올라가 버렸다.

이렇게 되면 기습은 불가했다.

“총……. 음.”

눈먼 총이라 해도 그 앞을 뛰어가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저기 서 있는 놈, 목표로 했던 놈이지 않나?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사격을 하던 놈이기도 했다.

김민수보다는 구우준 쪽이 김태평의 위력을 사무치게 느껴 봤다.

“어려울 거 같습니다. 몇 잃는다는 생각으로 돌진하면 뭐……. 다 쓸기는 할 텐데.”

“저 반대편에서 총소리 들으면 오겠지?”

“네, 아무래도. 그냥 있을 만한 병력은 아닙니다.”

둘은 이제 반대편을 돌아보고 있었다.

수십에 달하는 무장 병력이 있는 곳이었다.

사태 초기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라드를 눈앞에 두고 망설이는 이가 있을까?

그런 이는 다 죽었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저기 있는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구우준은 돌아가길 바라며 물었다.

아니, 아까와는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름 모를 저 라드.

저 라드는 뭔가 다르지 않나?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는 라드라니, 저게 라드라 할 수 있나?

“흐음.”

흥미가 인 것은 김민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비슷한 것을 넘어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보이니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군부대로 가겠지.”

“네.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김민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수풀 뒤에 몸을 숨긴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안에 있던 이들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기다려 볼까도 싶었지만…….

지금껏 살아남은 놈들, 그중에서도 가장 독종으로 보이는 놈들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경계를 풀까?

하룻밤 새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놈들임이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저놈이 죽기라도 하면…….’

저 이름 모를 라드.

김민수는 이순규의 얼굴을 눈에 한 번 더 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가지. 군부대 위치 파악해 둔 거지?”

“네.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뭐, 많이 변했을 거 같진 않습니다.”

“그 주변에 자리 잡으려면…… 일단 본부 주변에서 재정비를 해야 할 거 같군…….”

“네,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그래. 돌아가지.”

“네.”

그러곤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행선지를 알고 있는데, 이 야밤에 비까지 맞으면서 따라다니는 건 무용한 일이라 여겨서 그랬다.

무엇보다 같이 온 놈들도 문제였다.

구우준은 이성이 있어 오히려 돌발 행동, 그러니까 반역을 저지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초거대 개체가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어찌 되겠나.

헛 지른 주먹에 한 대 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 뻔했다.

“음…….”

김민수와 구우준이 물러가는 움직임이 눈에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순규는 냄새가 흐려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코가 냄새에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지.”

“왜 그럽니까?”

“가는 거 같은데. 냄새가 옅어졌어요.”

“음…….”

“라드 놈들 냄새는 그럴 수가 없거든요.”

“그렇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아예 늦추는 건 위험할 거 같습니다.”

“그렇죠.”

이순규는 혹시 모른단 생각에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다고 눈에 뭐가 보이진 않았다.

다만 냄새의 흔적은 보였다.

확실히 옅어져 가고 있었다.

이곳을 기웃거리다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놈들이었다면…… 우리 무장을 보고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겠어요.”

“하지만 일행이 많던데…….”

“이 날씨에 다 끌고 오진 못했을 겁니다. 잠깐 나갔다 온 건데도 얼어 죽을 거 같아요.”

이순규는 이제 갔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간 주변을 더 본 후 돌아왔다.

말한 대로 날씨는 진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실제 온도야…… 영하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대로면 밖에 있는 이들은 꽤 죽어 나가지 않겠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잠자긴 글렀군요.”

“그렇긴 하죠.”

일행은 투덜대면서도 물 흐르는 듯 자연스레 당번을 정해 경계를 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나마 비가 새벽녘에는 그쳐서 해 뜰 무렵에는 맑은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갈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애초에 문제 생기면 바로 튈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그렇게 날이 밝자마자 차에 올랐다.

드드드드드

오랫동안 정비 되지 않은 픽업트럭 특유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시동을 건 당사자인 요원이 놀라서 주변을 돌아볼 정도였다.

뒤에 타고 있던 오예리와 이순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그거 이제 버려야 되는 거 아니냐?”

옆에 모닝에 탄, 상태로만 따지면 더 후진 차에 타고 있는 김태평도 이렇게 물었다.

“방금…….”

“차 소리입니다. 귀에 익은데.”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유현에게도 들려왔을 지경이었다.

경계를 서느라 밤에 거의 잠도 못 잔 박중 대위도 마찬가지였다.

“귀에 익다고요?”

“네. 이거…….”

“김태평?”

“네, 아마도. 아니면 오예리 형사거나요.”

“그……. 좀 차분히…….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이 소리.

요란한 시동 소리.

들을 때마다 저게 과연 달리긴 하냐고…….

농담을 주고받았던, 그 소리였다.

유현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아니, 교수님! 갑자기 이게 뭔…….”

유현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지만, 다른 이들이야 알 게 뭐란 말인가.

박중이나 대원들 그리고 우식을 비롯한 모두는 크게 놀라 유현을 따랐다.

저 양반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였다.

다른 놈이었다면 뒤통수라도 후렸을 텐데 유현은 조직 내에서의 위치도 그렇고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그 월등한 신체 조건을 활용해 겅중겅중 뛰어나가고 있는 통에 잡을 수도 없었다.

“저기!”

하여간, 도로 위로 뛰어든 유현은 이제 막 휴게소에서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한 픽업트럭을 가리켰다.

“아이 시발 깜짝이야. 저 미친놈이.”

“쏠 뻔했어요.”

픽업트럭 뒤에 타고 있던 오예리와 이순규는 간신히 방아쇠에 올렸던 손가락을 치울 수 있었다.

이런 세상에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헬기 타고 간 놈이 왜…….”

“모르겠어요. 하여간, 살아 계시네요.”

물론 그건 그거고 반가운 건 반가운 것이었다.

한번 헤어지면 다음을 절대 기약할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 남은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나.

“교수님!”

그러나 그보다 더 반가움을 표출한 것은 오예리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유현도 이순규가 아니라, 오예리 형사를 보며 달리고 있었다.

정작 둘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아무래도 남들보다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순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둘……. 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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