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라드 무리 (1)
겨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혹독했다.
유현이나 수원 비행장 등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들은 뭐가 되었건 추위와 배고픔 모두를 면할 수 있었으니.
“형, 이게 맞아요?”
하지만 대개의 생존자들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준비가 되어 있던 이들은 극소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쪽은 좀 낫겠지. 서울부터는 뻑났잖아. 그리고 부산엔 눈도 안 온다며. 따뜻한 거 아냐?”
“그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벌써 나왔는데 뭐 인마. 그래서, 다시 돌아가?”
연명하던 이들 중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지금껏 서울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보통이 아니란 점이었다.
본능이 뛰어나건, 경험에서 배웠건 간에 생존 능력이 어느 정도 탑재되어 있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일행 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처 백화점을 털어 장만한 점퍼를 입은 채였다.
안에 가죽 재킷까지 껴입은 터라 보기엔 볼품이 없었지만, 더없이 실용적이었다.
따뜻한 것은 기본이었고, 어느 정도의 방호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 가자고. 일단 운이 좋았어.”
“그건 그래.”
무리의 숫자는 총 다섯.
모두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 싸움도 있었고, 한 번은 아예 근거지를 두고 도망쳐야 했던 적도 있었다.
대부분 라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사람에 의해 벌어진 일도 있었다.
오히려 그때가 제일 많이 죽기도 했고.
“후……. 웬 노인들이 이렇게 물자가 많지?”
그때 배웠다.
살기 위해선, 때론 다른 이들을 해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는 걸.
특히 상대가 약하다는 것이 확실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여기 뭐 다 노인들이지.”
“서울에서 얼마나 내려왔다고, 동네가 이래요?”
“나도 몰라. 나라고 너보다 아는 게 있겠냐? 백날 천날 서울에서 일하다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
“하긴. 형 선생님이었지? 선생님이 사람 죽이고 이래도 되나?”
“지랄. 그러는 너는 경찰 아니었어?”
“뭐 그건 그렇지.”
그들은 지금 막 경기도 남부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마을 하나를 턴 마당이었다.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한 표현이었다.
실상 그들이 턴 것은 집 하나였으니.
이 안에 있던 이들도 나름 주의를 했던 모양인데…….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연기가 습격의 단서가 되고야 말았다.
불과 다섯 명의 사내가 열 명도 넘는 노인을 도살하는 데 걸린 시간은 15분가량이었다.
“오면서 봤던 거기, 거기는 대체 뭐가 얼마나 있을까요?”
경찰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강도가 되어 버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차를 타고 내려왔다손 치더라도 추위와 배고픔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기에 양손에는 노인들이 모아 놨던 술과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입가에는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아껴 먹던 노인들과는 달리,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
“아, 거기……. 모르지.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다 젊고. 괜히 건드렸다가 털린다.”
“귀순하는 척해도 되지 않나?”
“귀순? 너 뭐 북에서 왔어?”
“그런 얘기가 아니라…….”
“뭔 말인지는 대강 아는데, 너 같으면 생판 모르는 새끼들이 받아 달라고 하면 받아 줄 거야?”
“아뇨. 미쳤어요?”
“그렇지.”
“하긴.”
선생이었던 작자 또한 모양이 그리 다르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노인들에게서 빼앗은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까 넘어오면서 봤던 건물, 재난 본부를 떠올렸다.
‘수십 명이 있는 거 같던데……. 그 정도면 진짜 대박이긴 할 거야?’
노인 열이 있던 이곳도 이렇게 뭐가 많은데, 거긴 어떻겠나.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허덕이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옥상에 사람들이 올라 경계를 설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총도 있는 놈들에게 덤비는 건 미친 짓이지.’
총이라니.
군인들인가?
평소라면 말이 되나 했겠지만, 지금 세상엔 가능한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을 공격했던 이들이 바로 군인들이지 않았나.
세상에 동료가 총에 맞아 죽을 줄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그때 생각만 하면 오금이 저려 올 지경이었다.
“뭐……. 내려가다 보면 그만한 곳이 또 없으리란 법도 없지.”
“그것도 그래요.”
“야, 근데……. 저 새끼 저거 뭐 하는 거야?”
“고기 굽잖아요?”
“밤에? 너무 눈에 띌 텐데?”
“에헤이……. 노인들만 있어도 버티고 있었잖아요. 여기 뭐 있겠어요? 근방에 라드라고는 씨가 말랐더만.”
“아까 본부. 거기가 있잖아.”
총 든 놈들.
놈들이 오면 어쩌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고기 구워지는 냄새에 군침이 도는 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하여간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리더를 맡게 된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형. 그 새끼들이 이 밤에 여기까지 오겠어요?”
“하긴……. 그럴 만큼 여유가 없어 보이진 않았어?”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저 새끼도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게, 보세요. 연기 거의 안 나, 지금.”
“그렇긴 해. 냄새는 엄청 좋네.”
“노인네들이 어떻게 보관을 했는지, 삼겹살이 다 있네. 그거나 물어보고 죽일 걸 그랬나.”
“겨울인데 뭐. 아무 데나 놔둬도 되지 않았겠어?”
물론 모든 리더들이 유현이나 김태평처럼 철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떠밀려서 된 사람들 아니던가.
게다가 이곳은 안일해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애초에 적었던 곳은 라드도 적다는 것 정도는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 데다가, 실제로 노인들의 전력은 형편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마 제대로 된 습격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합리화 회로를 돌리다 보니, 어느새 리더 또한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진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말이다.”
“미쳤네.”
“이거지. 이 맛에 살았는데, 시발!”
노인들이 꿍쳐 놓았던 술도 있겠다, 몇 개월 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고기도 있겠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겠다…….
술판이 벌어지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잔에 조심성도 차차 옅어져만 가고 있었다.
어느새 숨겨 굽던 고기도 대놓고 마당에서 구워 대고 있었다.
차오르는 연기가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저기.”
그리고 그것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유현을 따라 올라오다가, 다른 라드 무리에게 막혀 잠시 멈추었던 라드들이었다.
그중에서 덩치가 유독 큰 놈 하나가 솟아오르는 연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올라가는 흰 연기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것처럼 선명했다.
“그 새끼들은 아니겠지.”
그 말에 좀 더 덩치가 작은 놈이,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하기 짝이 없는 개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두 번 다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했나?
그건 아니지 않았나.
조심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언제 어느 때고 싸움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던 놈들이었다.
“아무래도 좋아. 일단 한두 놈은 살려 두도록 하지.”
“지금?”
그의 말에 덩치 큰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빛이 형형한 놈은 그 꼴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가까이서 확인한 결과, 무장이 꽤 좋아서 그랬다.
그래 봐야 이것저것 던져 대기 시작하면 반쯤은 죽어 나가긴 하겠지만…….
기다리다 보면 더 약해질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이지 않나?
두엇이라도 살려 두고 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면 그게 맞았다.
“으음.”
물론 다른 놈들은 참기가 어려운지 불만을 표했지만.
괜찮았다.
말하는 것만 보면 멍청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귀를 아예 못 알아먹고 있는 건 또 아니지 않나.
예상했던 대로 덩치 큰 놈들을 비롯한 모든 수하들은 그의 명대로 기다렸다.
아주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하하하! 그렇다니까! 형 말대로 내려오길 잘했지?”
“그러네요. 하하하!”
저들이 훨씬 시끄럽지 않나.
심지어 몇몇은 슬슬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숙면도 아니고,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니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일어나지도 못할 터였다.
“둘 정도는 물고. 나머지는 잡아먹지.”
“음!”
그걸 지켜보던 라드의 대장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덩치 큰 놈들이 뛰기 시작했다.
초거대 개체로 분류될 만한 놈들인데, 물경 셋이나 되었다.
나머지 것들까지 다 하면 20개체도 넘을 지경이었다.
맨손으로 달려들어도 사람 5명 정도는 찢어발길 수 있다는 얘긴데…….
이것들은 심지어 모두 무장한 상태였고, 옷도 두꺼운 것을 입고 있어 방호력도 올라간 상황이었다.
쐐애액
건물 안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동시에 끝을 삐죽하게 깎아 만든 쇠 파이프 창이 창가로 날아들었다.
마당에서 고기 굽던 이는 이미 취해 널브러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와장창
창문은 단숨에 박살이 났다.
“커억.”
동시에 창가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이던 이의 가슴 또한 박살이 나 버렸다.
“뭐, 뭐야!”
“이런 시발!”
선생이었던 이와 경찰이었던 이가 뒤늦게 일어나 봤지만, 이미 때는 늦은 지 한참이었다.
부웅
어느새 부서진 창가를 통해 난입한 거대 개체가 휘두른 봉이 경찰이었던 이의 허리를 꺾어 버린 지 오래였다.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으면 아마 죽었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제압에 그치긴 했지만…….
의미가 있겠나.
“끄…… 끄윽…….”
엎어진 그는 곧 거대 개체의 발에 깔린 채 신음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선생이었던 이는 운이 좀 좋았는지 아니면 순발력이 남달랐는지 도망을 꾀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시도에 그쳤을 뿐이었다.
문가에도 대장의 지시로 인해 다른 개체들이 있어서 그랬다.
“꺼억…….”
단 한 방에 무력화된 그는 곧 바닥에 널브러진 채 동생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죽었거나 곧 죽을 몰골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놈들이 제일 낫기는 하네.”
그들 앞에 나타난 대장은, 유현과 마주했을 때보다도 또 그 한참 전에 이순규를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해진 언어를 구사하며 둘을 내려다보았다.
“물기 전에 물어나 볼까.”
그는 단숨에 물지 않았다.
‘내가 물어도…… 멍청한 놈은 멍청하단 말이지?’
시간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걸 나머지 놈들을 보면서 배웠기에 그랬다.
그러니 무언가 알아내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이렇게 생긴 놈을 본 적이 있나?”
하여간 그는 전에 쳐들어갔던 곳에서 입수했던 폰에 있는 사진을 들이밀었다.
거기엔 유현의 얼굴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