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생존자 무리 (2)
수도 없이 걷던 길이었다.
본부 자체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본부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마을로 진입하려면 동 아니면 서로 난 길로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김태평처럼 산을 오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예견되는 위험이 적은 상황에서 굳이 그러한 수고를 감수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자박자박
앞장선 이는 본부에서 근무하던 소방대원이었다.
이름은 박해상.
얼굴은 깡패처럼 생겼지만 알고 보면 건실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다.
기존에 본부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유현의 일행 또한 알게 모르게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유현마저 그랬다.
“교수님.”
“응?”
“살아 있는 가축 같은 거 있을까요?”
유현조차 그럴 정도니 재원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수색 나오기 위해 좀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부담되었을 뿐, 정작 수색 자체에는 딱히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영 엉뚱한 질문이나 튀어나오고 있었다.
유현도 딱히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있겠냐? 있으면 다 도망갔겠지. 주변에 맨 산인데……. 이 추운 날에 집에 있겠어?”
“하긴……. 아, 닭고기 먹고 싶다. 소나 돼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소나 돼지는 여기 있지도 않을 거 같은데.”
“주변에 농장이 있다고는 하던데…….”
“있었으면 벌써 다 잡아 왔겠지. 본부 옆에 작은 농장 시설도 있더만.”
“그냥 해 보는 소리예요. 지금 이만큼이라도 먹고사는 게……. 어딥니까?”
“그렇지. 김태평 요원이 하는 말 들었지? 서울은 지옥이래.”
유현은 큰 키를 이용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서울과는 달리 높은 건물이 없는 데다가, 산도 본부 있는 쪽 말고는 가까이에 없다 보니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제때 수확하지 못해 얼어 죽은 채 갈빛으로 물들어 버린 농작물로 그득한 밭들까지.
아마 세상이 이따위가 되기 전에도 비슷한 분위기이지 않았을까?
풍경이야 조금 다를지 몰라도…… 느낌이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아, 저도 깜짝 놀랐어요. 사람 잡아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죠? 혹시…… 지능을 갖춘 라드 무리는 아닐까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했어. 김태평 요원 눈썰미에 그것도 모를 거 같진 않은데.”
“하긴……. 보통 사람은 아니죠.”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뭐…… 괜찮지.”
둘은 지금껏 오갔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박해상 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산보 나온 듯 여유롭던 걸음이 조금 바뀌게 된 것은, 아직까지 수색 대상에 끼지 못했던 마을 초입에 들어서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감이 일행을 메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낯선 곳에 왔으니 주변을 둘러보는 정도에 그쳤다.
다른 이들은 그러했다.
“가만. 좀 이상한데.”
“네?”
그러나 유현만은 예외였다.
그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도 비교적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능력자였다.
마을 초입에 이르러서 들어가기 전 웅성대는 동안 유현은 마을 어귀에 묻어 있는 자국 하나를 발견했다.
핏자국이었다.
“이거…….”
“색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어어…….”
재원은 저도 모르게 총을 쥐었다.
오는 내내 괜히 매고 왔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던 총이 지금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자국……. 드문드문 있네. 박해상 대원님.”
유현은 바짝 얼어 버린 재원을 뒤로하고 박해상에게 변고를 알렸다.
뭐가 되었건 현재 일행을 이끌고 있는 건 대원이지 않나.
“어……. 피……. 피 맞겠죠?”
“네. 확실합니다. 저야 주로 빨간 피를 보지만,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간혹 오래된 핏자국도 보기 마련이죠.”
주로는 옷이나 가운에 묻은 형태긴 하지만…….
그런 얘기는 굳이 보태지 않았다.
대신 길을 따라 나 있는 핏자국을 가리켰다.
“안쪽으로 보세요. 저쪽으로…… 핏자국이 있습니다.”
“이런 망할……. 그럼 어쩌죠? 돌아갈까요?”
“흐음.”
박해상의 말에 유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열 명이나 되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유현, 재원 그리고 박해상 대원을 제외한 숫자니 총 열셋이나 되었다.
적은 숫자는 결코 아니지 않나?
이 정도 인원이라면 이 시골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터였다.
딱히 오면서 주변을 경계하지도 않았으니……. 안에 누군가 있다면 눈치채고도 남았을 터였다.
“아니, 일단…… 보죠.”
“네?”
“피의 양이 적지 않아요. 여기 뭐 제대로 치료할 만한 곳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지금이라고 상태가 좋아지진 않았을 겁니다.”
“어……. 무슨 뜻이신지……?”
“위협이 되지 않을 거란 거죠. 무시해도 되겠지만, 확인이 가능하다면 확인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물론 일행이 더 있을 가능성이 크긴 해요. 다만 일행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데리고 왔다면 라드보다는 인간이겠죠.”
“아, 생존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네.”
원래 세상에서 인간은 그리 커다란 위협이 아니었다.
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인데 위협이 되면 쓰나?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인간은 반드시 우호적인 대상이라 하기 어려웠다.
“김태평 팀장에게 들은 것도 있고……. 오히려 인간들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해서 유현은 총을 고쳐 쥐고는 말을 이었다.
뒤에 모여든 인원을 돌아보면서였다.
본부 특성상 젊은 사람들이 꽤 많았고, 또 노약자들에게는 딱히 일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있는 인원은 죄다 청년들이었다.
무장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상대에게 총이 없다면 그리 무리가 되진 않을 터였다.
“혹여 우리를 따라오기라도 하면, 더더욱 그렇겠죠.”
“음…….”
“물론 이건 제 의견일 뿐입니다.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뇨, 지당하신 의견입니다. 살피는 것이 좋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김태평 그분도 같이 올 것을 그랬네요.”
“그렇죠.”
하다못해 오예리 형사라도 있었다면 훨씬 나았을 터였다.
그녀의 저격은 언제 어디서건 의지가 되었으니까.
심지어 김태평도 호평을 아끼지 않았더랬다.
오예리 형사가 없었다면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게까지 수월하지 못했을 거라고.
‘이제 와 다 소용없는 일이지.’
유현은 고개를 털어 쓸데없는 생각을 덜어 내고는 앞으로 나섰다.
재원의 어깨를 치면서였다.
“교수님……?”
“총 든 게 우리 둘이잖아. 앞으로 가야지.”
“교수님……. 안 그래도 여기 오시지 않으셔도 되는 분 아닙니까?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재원은 더없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박해상 대원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유현은 워낙에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랬다.
수원에서도 VIP 대우를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본부장도 유현을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투 상황 발생하면 뒤로 빠질 겁니다.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
“총이 문제면 저희에게 주시죠. 저희도 다 군대 갔다 왔습니다.”
“최근까지 총을 쏜 건 우리죠. 일단 가시죠. 그리 많을 거 같진 않아요.”
유현은 핏자국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신발 자국을 살폈다.
솔직히 추적술을 배우기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배운 적이 없지만 뭔가 느낌이 왔다.
‘적어. 도망쳐 온 거 같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빨리하진 않았다.
앞장선다고 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이나 천천히 걸었다.
환자 보는 것도 똑같지 않던가.
의사 혼자 성급하게 확신에 차 행동하다 보면 환자 잃게 되는 경우가 흔하디흔했다.
끼이익
그렇게 걷고 있다 보니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오래된 경첩의 비명이지 않나.
“어쩌죠?”
유현만 들은 게 아니었다.
다 붙어서 걷고 있었기에 일행은 누구랄 것 없이 걸음을 멈추고 유현과 박해상 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
“알리는 게 좋을까요? 확실히 라드는 아닌 듯한데요.”
아마 유현의 일행만 있었다면 라드가 아닐 거라고 섣불리 판단하진 못했을 터였다.
그러기에 일행은 지능적인 라드를 너무 많이 겪었다.
그러나 수도권 일대에는 오히려 아직 그런 라드가 많이 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1호, 박기태가 좀 더 오래 건재했다면 모르겠지만…….
‘라드라 해도 달려들지 못한다는 건 좋은 일이긴 해.’
물론 라드라 해도 괜찮았다.
놈들은 인간들보다 더 발달한 본능을 이용해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놈들이지 않나?
인간들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다는 건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단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사람들이라 해도 원거리 무기는 없거나 별거 아닐 가능성이 커.’
게다가 말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사실 최고였다.
특히 지금처럼 여차하면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알리죠. 그리고 반응을 봅시다.”
“아…… 네. 그럼 제가……?”
“목소리가 더 크실 거 같군요. 나머지는 경계하죠.”
“네, 알겠습니다.”
유현의 말에 박해상 대원은 방금 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향해 목을 가다듬고는 곧장 외쳤다.
“저희는 소방 재난 본부 소속 대원들입니다! 생존자가 계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 의사도 있으니 충분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유현의 존재를 굳이 알리진 않았다.
호감을 살 수도 있지만, 혹 정부 측 사람들이라면 큰일 아닌가.
유현의 연구 때문에 정부 측, 그중에서도 김선태가 쫓고 있다는 걸 듣게 된 본부 사람들은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끼긱
답은 없었다.
대신 또 다른 경첩 비명이 들렸다.
방향은 같았다.
확실히 이곳에 있던 사람인지 라드인지 모를 이들은 파란 대문을 가진 집 안에 있었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어요.”
고개를 젖혀 안을 둘러본 대원 하나가 상황을 알렸다.
그사이 유현은 집 안의 전체적인 정경을 살폈다.
마당도 있고 한 집이긴 한데, 집 자체가 크진 않았다.
대청까지 있다 보니, 실내라 할 수 있는 공간은 기껏해야 몇 평 되지 못할 터였다.
‘낑겨 들어가 있다고 해도 열 명……? 최소 하나라도 누워 있다고 상정하면 더 적어.’
유현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마친 후, 박해상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어느새 주변에서 판자때기 같은 걸 주워 온 대원들이 활짝 열린 대문 쪽을 어설프게나마 가렸다.
“다시 알려 드립니다! 저희는 재난 본부 소속입니다! 생존자께서…….”
안에서 뭐가 날아오면 원시적인 방어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박해상 대원이 말을 이어 나가던 찰나 대청마루에서 이어지는 방문이 왈칵 열렸다.
“그, 그만! 그만 소리쳐! 조용히 해!”
안에서 나온 이는 머리가 풀어 헤쳐진 여자였다.
얼굴에 공포가 그득했는데, 망한 세상에서조차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얼굴은 아니었다.
한때 현경의 얼굴이 저랬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함부로 다가가는 건 위험합니다. 뒤쪽 경계 철저히 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 보죠.”
유현은 차분한 얼굴로 뒤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야 봤네. 차가 있어. 완전히 망가진…….’
그제야 마을 어귀의 벽을 들이박은 채 서 있는 차가 눈에 들어왔다.
저 차 하나만으로 왔다면 기껏해야 다섯, 여섯이나 될까?
어느새 유현은 마당 안으로 좀 더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