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생존자 무리 (1)
치지직
새벽 2시.
모두가 고요하게 잠들 무렵이었다.
그건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라 해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고요해졌다.
이제 더 이상 불야성은 없으니.
-병사는……. 모두……. 스무 명가량……. 소총으로 무장……. 총알 여부는 모름…….
그러나 그 시각 김태평의 방에는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완전히 깬 얼굴로 모여 있었다.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박원상이 각종 정보를 보내고, 또 이쪽의 지령을 받아 가는 시간이라 그랬다.
동시에 현경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대개는 온전했던 시절의 녹음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현경은 이순규나 이진호와는 완전히 다른 경과를 밟고 있어서 그랬다.
말하자면 박원상을 완전히 속이고 있다는 얘긴데…….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유현을 비롯한 모두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그들의 비행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감염자 혈액……. 접근……. 가능…….
“좋군.”
물론 일행의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산은 무너져야만 했다.
완전히는 말고.
이쪽의 손에 슥 넘어올 정도로만.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 김선태조차, 남산 기지가 완전히 문을 걸어 잠가 버리면 일반적인 장비만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물론 안에 비축되어 있는 물자가 제한된 만큼, 버티는 쪽도 괴로워지겠지만…….
“연구원들보다는 역시 군인들에게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기회를…… 엿봐야 합…….
남산은 중요한 곳이었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희망이 있다면 남산에 있을 것이라 그러했다.
이미 세종, 오송을 포함한 여러 연구 단지가 박살이 나 버린 이상 제대로 된 연구 시설은 남산이 유일하지 않나.
게다가 남산엔 김조은을 비롯한 이 사태의 원흉이자 동시에 핵심 지식 및 경험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데이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게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유현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또 다른 직관을 이용해 본다면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하기는 한 모양이로구만.”
통화라고 해야 할까, 이걸?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송출하는 것도 단방향 소통이 아니라 쌍방으로 이루어진다면 응당 그렇게 불러야 할 터였다.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전파 하이재킹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으니까.
물론 김태평이 빠진 이상, 저쪽에 그럴 만한 인재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라디오 송수신은 딱히 보안이 없는 것이다 보니 우연히 누군가 듣게 될 수 있었다.
해서 오늘도 1분간만 대화를 하고 장치를 꺼 버린 김태평이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군인들을 무력화시키고…… 안에서 문을 열어 준다면……. 우리가 진입하는 것도 어렵진 않겠어요.”
그 말에 유현이 답했다.
벌써 이 짤막한 통화가 이어진 것도 여러 날이었다.
즉 이들이 남산 기지에 대해 알아낸 정보 또한 적지 않았다.
몇몇 믿을 수 있는 협력자들이 있다는 것도 들었다.
당연하게도, 박원상이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이들이 실제로 신뢰하는 건 완전 별개의 얘기긴 했지만…….
“협력할 만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일단 정유현 교수님은 어디에서건 이름이 알려져 있던 사람이에요. 아주 좋은 방향으로.”
김태평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동의를 표하곤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더더욱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들 또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대체 왜 갑자기 그곳이 무너졌을까. 듣자니 딱히 자세한 설명은 없었던 거 같군요.”
“엄밀히 말하면 김선태가 무너뜨린 건 아니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는 그냥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고……. 1호. 그놈만 있었어도 무너지긴 했을 겁니다.”
“1호……. 1호가 꽤 늙었다고 하는데…….”
유현은 저도 모르게 1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본 1호, 즉 박기태의 얼굴은 여전히 병원에서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로는 그저 전해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었지.’
박기태의 정확한 신원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흑룡강성 출신에 한족이 아닌 조선족 출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나이조차 불명이었다.
하여간, 박원상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의 얼굴엔 노화의 흔적이 역력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유현은 저도 모르게 이순규를 바라보았다.
친구의 얼굴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단순히 늙었다, 어째다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안에서도 변화가 있긴 있었다.
처음…….
첫 변화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랬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무리를 이룬 놈들에게 쫓겨 보건소로 가고, 또다시 쫓아온 놈들을 피해 북으로, 북으로 오는 동안엔 사실 일행 전원이 많이 늙어 보였다.
고생을 하기도 했거니와 행색이 추레해져서 더더욱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난 본부는 모든 것이 풍족한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가까이에 저수지가 있어 물도 풍부하다 보니 다들 깔끔하게 씻을 수 있었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니었던 만큼 대개는 전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순규는 늙었어……. 아직 거동에 변화가 생길 정도는 아니긴 한데…….’
유현은 남몰래 한숨을 쉰 후,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하여간, 군인들 일부만 무력화시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죠?”
지금 중요한 것은 남산 기지이지 않나?
“네. 뭐……. 우리끼리만 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수원 측에서도 박중 대위를 비롯해 사람 붙여 준다고 했으니까요. 얼마든지 될 겁니다. 게다가 전에 확인해 보니까 그쪽 병사들 대인 전투력은 그닥이에요. 전혀 경험이 없습니다.”
“아……. 들었어요.”
유현은 오예리 형사를 돌아보았다.
말로는 괜찮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라고 했지만…….
유현은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그리고 숨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셋을 죽였다고 했지.’
저격으로 처리한 것이고, 제아무리 오예리가 대단한 저격수라 해도 얼마간 시간 차가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대응은커녕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것도 모자라 일부는 다른 생존자 무리에게 당했다고 했다.
거의 무슨 사냥 당하듯 했다고 하던데…….
그 말인즉슨 김태평의 말마따나 그들의 대인 전투 능력이 별로란 얘기였다.
“그보다는 이후가 문제 같은데…….”
김태평의 눈이 김 주무관을 향했다.
김 주무관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것이 어색한 일이었다.
쥐라면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기는 했다.
특히 수원에서 그랬다.
그쪽은 황 대령의 지휘하에 계속해서 주변부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따라서 라드와 마주칠 가능성이 대단히 컸기에 그랬다.
“연구가 가능하겠습니까?”
“아……. 네. 대부분의 연구 장비는 잘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존 연구 인력이 있다면 관리·감독도 할 수 있겠죠.”
“그건 다행이로군.”
그러나 그보다는 남산에서의 역할이 더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남산 기지를 빼앗는 것의 태반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연구 실적도 내면 좋지 않겠나.
“아무튼……. 아직은 먼 얘기입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너무 오래 끌 수도 없는 노릇이기는 한데……. 아직 박원상의 입지가 그쪽에서 그리 높지 않아요.”
“네. 그럼…….”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하죠.”
김태평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해산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일행은 작은 등불에 의지해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그래 봐야 태반은 남자, 여자로 나뉜 다인실이긴 했지만…….
하여간, 본부에도 인원이 나름 있는 만큼 움직이는 인원이 꽤 되었다.
“교수님.”
“응?”
재원은 유현과 같은 숙소에 있었다.
덕분에 종종 이렇게 같이 다닐 일이 있었는데,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근데……. 박원상 교수님이…… 그럼 군인들을 감염시킨다는 거예요?”
“그렇지.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하…….”
“어쩌겠어. 연구를 더 하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어.”
“저쪽도 연구는…… 하고 있지 않을까요?”
“음.”
유현은 이어지는 질문에 재원을 바라보았다.
‘여전하구만, 이놈도.’
아마 딱히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터였다.
다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지나치게 틀린 길이 아니라는 걸.
그러기 위한 문답임을 알기에, 유현은 짜증 내는 대신 답을 해 주었다.
“너는 김조은, 박원상이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있을 거 같냐?”
“그건…….”
“쥐도 못 만들어 써먹는 놈들이야. 아니면, 알더라도 독점하고 있을 놈들이지.”
“독점이라면……?”
“그쪽 역량을 생각했을 때, 그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을 하기 어려워. 근데 그래도 같은 지휘 체계 아래 있던 수원에서조차 전혀 알지 못했어. 정말 몰라서 못 알려 준 거라면 너무 무능한 것이고, 아는데도 안 알려 준 거라면 개새끼들인 거지.”
“아……. 하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전부터 생각하고 있긴 했다.
대통령은 미쳤다고.
그러던 것이 10비의 황 대령 말을 듣고 나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대통령은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완전히 미쳐 버렸다.
권력에 미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놈은 이미 사태가 끝난 이후를 상정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남아 있지도 않은 대한민국을 다스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놈이야. 놈한테 대의는 없어. 김조은도 마찬가지지. 아마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한테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영웅이 될 생각만 하고 있을걸.”
유현의 말에 재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이라는 나지막한 욕설을 덧붙이면서였다.
확실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놈이었다.
“일단 자자. 내일은 우리 나가 봐야 해.”
“아, 네. 가까이 가는 거겠죠?”
“그렇지, 뭐. 이 근처에 뭐 많잖아. 먹을 것도 충분하고……. 게다가 라드 없는 거 확인했잖아. 긴장하지 말고, 자.”
“네, 교수님.”
대통령 생각을 더 이어 나갈 이유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으니까.
일단 잠이 더 중했다.
대의고 나발이고 내일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시절이지 않나?
설마하니 이 근처에서 별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것조차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자……. 갑시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유현은 본부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벌써 몇 주간 계속해 온 일이었고 그사이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때문에 긴장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무장은 하고 있었다.
유현과 재원은 소총을, 나머지는 간단한 돌팔매와 몽둥이 등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짊어지고 있는 빈 가방에 더 힘을 주고 있었다.
“수원에서도 식량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쪽에서 얻어 온 물품이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도 최선을 다해 봅시다.”
“네!”
본부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