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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182화 (182/323)

182화 수원 (3)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황 대령은 아까처럼 데스크 앞에 앉는 대신, 회의실로 보이는 곳으로 향해 거기에 앉았다.

딱히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가 없었다.

군은 의전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집단인 만큼, 이것만 해도 대단한 예의를 차리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유현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군인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보니 당연한 일도 사라진 지 오래 아닌가.

‘일단 보이는 것만 놓고 보면……. 황 대령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인데…….’

유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 대령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고, 분위기가 그래야만 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꼭 솔직하게만 말하라는 법이 있을까?

유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모르겠지만…….

‘이 세상은 한번 망했지.’

그는 저도 모르게 회의실에 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사령부는 4층 건물이었고, 당연히 그리 높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명색이 전투 비행단이지 않나.

다른 비행기도 아니고 전투기가 쉼 없이 오르내리는 곳에 높은 건물이 있겠나.

물론 전망은 빈말로도 좋다고 하긴 어려웠다.

세류역 근방은 깨끗해도 그 너머론 온통 폐허였으니까.

게다가 유현은 저 자리에 단지 폐허만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네, 대령님. 숨길 만한 일은 없습니다.”

“네. 그럼…… 저희에게 왜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이건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군요.”

황 대령의 말에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군인들 모두가 눈을 빛냈다.

무언가를 노린다기보다는 그저 순수한 궁금증으로 보였다.

하긴 그럴 만했다.

이 사태는 그야말로 미증유의 사태이지 않나?

좀비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군부대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대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좀비……? 총이 있는데 말이 되나?

근데 세상은 좀비도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아, 그래. 박기태. 그 환자를 처음 본 날부터 시작을 해야겠군요.”

“박……기태?”

“네. 박기태. 제가 처음으로 본…… 죽었다 살아난 환자……. 아니, 라드라고 해야겠죠.”

유현은 담담하게 그가 경험했던 사실을 읊어 내려갔다.

박기태를 진단하고 질본에 가서 발표했던 일,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아마도 김선태 측 군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박기태를 빼돌린 일, 수락 마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함께했던 경찰들 중 태반이 사망한 일까지.

“아니……. 이런 미친……. 그런 일이? 그런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능하다고요?”

“네. 증거가 없으니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고…….”

“제가 개인적으로…… 하리꼬미라고 하죠? 저 신입일 때 옆에서 쪽잠 자던 기자랑 엄청 친해졌었는데, 그분한테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했었는데…….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얘기는 저도 처음 듣는군요.”

“저도 경황이 없어서…….”

“뭐…….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 저희도 미행이 따라붙고 별짓 다 당했어요. 아무튼.”

유현은 회한에 찬 얼굴로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황 대령을 비롯한 모두는 그런 유현의 말을 인생에 다시 없을 만큼 집중하여 들었다.

김효상 국장의 죽음과 박태식 의원의 죽음뿐 아니라…….

“이순규라고 있어요. 정신과 교수고, 제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이순규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부터 변이가 일어났던 일, 그리고 정부 요원이 탈취하려고 했던 일까지.

‘그래, 그랬던 적이 있지.’

김태평은 내부 정치로 인해 직접 관여하지 못했던, 그래서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했던 일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하여간 이야기의 결론은 이순규가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데에 있었다.

“네?”

당연히 황 대령은 놀랐다.

아니, 다른 군인들도 그랬다.

군기 삼엄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필요치 않은 소리를 낼 정도로.

“돌아왔어요. 순규는. 순규가 없었으면 저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뭐랄까……. 그래, 라드에 보낼 수 있는 첩자죠. 라드는 순규가 사람이라는 걸 잘 모르거든요.”

유현은 요새는 좀 다른 놈들도 있지만이라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뭐가 되었건 순규를 보면 어떤 놈들이라도 멈칫거리긴 하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상대적으로 살아남은 구 라드가 많은 수도권에서는 더더욱 순규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유현은 그렇게만 이야기를 끝맺진 않았다.

이것도 당연히 꽤 놀라운 이야기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런다고 군을 내줄까?

‘보아하니……. 여기도 간신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유 있게 굴러가고 있는 곳은 아냐.’

군인들의 상당수가 개간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근처에 살아남은 라드가 많다 보니 침입이 끊이지 않아, 군부대를 둘러싸고 있던 철조망의 보수 작업도 한창이었다.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아마도 탁자나 의자에서 뜯어 온 것으로 보이는 나무 판때기 같은 것을 덧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식량이나 다른 기타 물질들의 확보 그리고 군의 존재 이유 증명을 위한 민간인 구조를 위해 주변부 수색까지 나서고 있지 않나?

거기서 이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원일 전투 부대를 일부라도 빌린다…….

‘쉬운 일은 아니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여기가 여유가 넘쳐흐르는 곳이라 해도 군을 빌려주는 건 또 별개의 일 아니겠나.

너무 각박하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사람은 알 터였다.

원래 세상도 각박했다는 것을.

‘어차피 뭐…….’

유현은 김태평과 눈을 마주친 후, 말을 이었다.

“저는 라드 중 일부는 순규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교수님.”

“네.”

“그…… 이순규라는 사람……. 현존하는 게 맞습니까?”

이 반응도 예상했더랬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순규를 데려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

“네.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네……? 제가 가야 합니까?”

“아뇨. 차 안에 있어요.”

“네? 라드가 이 부대 안에 들어왔다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라드가 아닙니다. 절대……. 절대 쏘시면 안 됩니다. 겨누는 건 괜찮아요. 제 친구는 그런 걸로 흥분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겁이야 먹겠지만…… 뭐,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아니……. 이게…….”

황 대령은 황당해했다.

처음엔 거짓말이라고도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진지해 보이는 유현의 얼굴을 보며 차츰 정신을 차렸다.

“진짜로…… 데리고 오셨군요.”

“네. 친구고, 사람이니까요. 생김새만 좀…… 그럴 뿐입니다.”

“거……. 일단 가서 볼까요?”

“네. 안 될 건 없죠. 다만 쏘지 마세요. 사람이에요.”

“그……. 알겠습니다. 부하들을 뒤로 좀 물리겠습니다.”

“총은 그런다고 못 쏘는 건 아닐 텐데요?”

“아……. 지금 여기서 총 들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보통이 아닙니다.”

황 대령의 말에 유현은 다시 군인들을 둘러보았다.

아까 확인했듯이 절대다수는 작업에 동원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총을 들고 있는 이들의 면면이 어떠할까?

당연히 비범할 수밖에 없었고, 인상들부터가 그러했다.

“뒤로 물러서게. 내 명령이 없으면 발포하지 마.”

“필승!”

하여간에 삼엄한 분위기 속에 황 대령은 1층으로 향했다.

유현은 그런 황 대령을 뒤로하고 소방차로 가, 문을 열고 입을 열었다.

“순규야. 최대한 덜 위협적인 얼굴로 나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음.”

유현은 되묻는 순규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예전에 봤던 미드를 떠올랐다.

아직 세상이 망하긴 전, 유현은 운동 갔다가 집에 가서 논문 좀 읽다가 미드 한 편 보는 걸 낙으로 삼았더랬다.

고작 하루 한 편이지만 따지고 보면 매일 보는 거라 이것저것 많이도 봤는데, 그중에 잭리처라는 게 있었다.

그 주인공이 지금의 순규보다 좀 작았다.

그럼에도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반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외양으로 묘사가 되었으니…….

“그럼 그냥 나와. 인상만 쓰지 말고.”

“그래.”

아무튼, 둘은 소방차에서 빠져나왔다.

유현이 나올 때야 별로 이렇다 할 반응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순규가 나올 땐 달랐다.

“와아…….”

“저거…….”

이순규는 초거대 개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대 개체로는 충분히 분류될 법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

사실 근거리에서 순규 같은 놈이 달려든다면 제아무리 총을 가지고 있고 한두 발 맞힌다고 해도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맞은 놈도 멀쩡히 살아 가긴 어렵긴 하겠지만, 하여간 어마어마한 위협이 된다는 얘기였다.

“안녕하십니까, 정신과 교수였던 이순규입니다. 황 대령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순규도 그러한 점을 잘 알기에, 무작정 악수를 권하진 않았다.

모르는 놈이 보면 악수가 아니라 얼굴 부수러 주먹 내미는 줄 알 테니.

멀찍이 떨어져서 최대한 듣기 좋을 것 같은 목소리, 그러나 실제로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인해 거칠기 짝이 없게 변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다행히 톤 자체는 차분한 데다가 내용 또한 논리 정연해서 나름의 각오를 하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이순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네. 안녕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가까이 다가가는 이는 없었다.

옷도 제대로 입고 있고, 어떻게 봐도 일반적인 라드와는 많이 다르긴 한데…….

그래도 너무 컸다.

무섭게 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라드랑 닮았다.

라드였으니, 뭐 딱히 달리 말할 것은 없지만.

“제가 가까이 가면 쏠 건가요? 그럼 많이 아플 거 같습니다만.”

“……?”

그러나 농담까지 듣고 난 마당에 두려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해서 황 대령은 본인이 한두 걸음 내디뎌 다가갔다.

가까이 서 본 후에야 순규와 다른 라드의 차이점을 더 명확히 할 수 있었다.

‘표정이…… 부드럽네.’

그래도 무섭긴 하지만.

하여간 달랐다.

“저는 다른 라드들도 순규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모든 라드는 아니겠지만……. 그런 개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만한 개체를 확보한 참이기도 하고요.”

“네?”

그렇게 애써 놀란 마음을 달래고 있으려니, 유현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상한 얘기를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얘기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개소리라고 생각했을 얘기기도 했고.

“하하……. 네. 정신과였죠. 제가 진짜 착한데……. 이렇게 돼 가지고.”

하지만 다른 병사들과도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 좋아 보이는 라드 이순규를 보면서도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 사태를…… 끝낼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황 대령은 확연히 솔깃해 보이는 얼굴로, 유현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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