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스트 팬데믹-175화 (175/323)

175화 경기도 남부 (2)

“철수! 철수합시다! 우측으로 돌아서 나갑시다!”

“아, 네!”

김태평의 말에 유현이 답했다.

가타부타 왜 그러냐는 말도 없었다.

저렇게 서두르는데 뭔 놈의 이유가 있겠나.

당연히 라드겠지.

어쩌면 강도일 수도 있고.

하여간에 떠야 했다.

“자자, 갑시다!”

해서 유현은 상황 파악할 생각도 없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살짝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는데, 그래 봤자였다.

기껏해야 먹을 거 한두 개 아닌가.

그거보다 중요한 게 목숨줄이었다.

라면 몇 봉다리 더 뒤지려다가 뒤지면 그게 뭔 일인가.

“아, 네.”

“네!”

허둥지둥하긴 했지만, 적어도 망설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지민이도 그랬다.

어린애가 어찌나 살뜰하게 챙겼는지 양손 가득 봉다리가 들려 있었다.

애가 그럴 정도니 나머지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 주무관이나 재원은 솔직히 말하면 좀 침착하지 못한 편임에도, 아이가 활약하고 있단 생각 때문인지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탁탁여기저기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재원은 아까 발견했던 차, 그러니까 차 키가 딱 보이는 데 있던 차가 못내 아까운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너 저 차 몰아 보고 싶어서 그러지?”

“아…… 네.”

사실 유현도 기회만 있다면 몰고 싶기는 했다.

벤틀리여서 그랬다.

그것도 컨티넨탈GT.

학회차 가던 코엑스 오크우드 호텔 앞에 뚜껑 열리는 모델이 늘 서 있었는데 그 자태가 어찌나 멋들어지는지, 차 욕심이 딱히 없는 유현도 나중에 돈이 생기면 저건 한 번쯤 몰아 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을 거야.”

“네? 뭔 기회가 있어요. 저희 이제 다 거진데…….”

“싹 다 거지잖아. 살아남으면 장땡이지. 하여간, 뒤로 빼!”

“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재원은 이미 차를 뒤로 돌려 나가고 있었다.

운전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오히려 이럴 때는 더 잘했다.

그냥 막 거칠게 몬달까?

정상적인 도로 주행이었다면 벌써 접촉 사고 한두 번쯤은 냈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이야 뭐.

부아앙

그냥 막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 눈이 마주쳤던 라드 중 몇이 정찰 목적으로 다가오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나마 도로의 높이가 훨씬 높아서 뛰어들지는 못하겠지만.

콱저렇게 던져 대는, 소위 눈먼 돌도 일단 맞으면 이쪽에서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차가 망가질 가능성이 컸고.

심지어 유현은 한번 그런 일을 겪어 보지 않았나.

다른 이들도 간접적으로나마 현경이나 유현 그리고 오예리 등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 봤기 때문에 뭔 말이 없어도 알아서 다들 달리고 있었다.

“확실히 인구 밀도가 있어서 그런가……. 무리들이 있네.”

“네, 그러니까요. 시골은 그런 건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행이 딱히 이 근방에 자리 잡을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냥 도망가면 그만이라는 얘기.

해서 유현은 재원과 함께 떠들어 대면서도 일단 달리도록 했다.

그가 그렇게 달리니, 다른 이들도 달렸다.

쭉쭉 위로.

“어차피 오늘 묵으려고 했던 곳은 여기서 꽤 멀어.”

“네, 근데 거기는 괜찮을까요?”

“김태평이 고른 곳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긴……. 그럴 거 같아요. 그분이 진짜 그런 건 잘하는 거 같아요.”

유현은 그렇게 달리는 차 안에서 김태평이 말했던 몇몇 후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들 괜찮은 곳이었다.

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인적은 드물고 뭔가 챙길 만한 물건이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오산……. 근처지?’

어차피 고속 도로 따라서 계속 올라갈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길을 틀어서 가야 한다는 얘긴데 그 전에 나름 한몫 챙겼으니 됐다 싶었다.

오예리 형사랑 요원 하나가 다른 차들에서 기름도 꽤 빼 놨으니, 적어도 서울까지 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터였다.

‘경기도 소방 재난 본부 아니면……. 축산 진흥원 혹은 그 근방에 보건소…….’

보건소는 경기도지만 공보의가 파견되었던 곳이니만큼 외진 곳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인적이 드물 거란 얘기가 되었고, 외진 곳이니 거기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일 터였다.

약도 좀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부근에 다시 자리를 잡는 것도 좋아 보였다.

‘소방 재난 본부는 헬기가 뜨던 곳이라고 했지. 근데 딱히 거기에 운용할 수 있는 헬기는 없다고 했어.’

아마 사태가 터지고 나서 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김태평도 징발 가능한 헬기는 다 썼다고 했고.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청와대의 욕심이 역시나 좀 그랬다.

‘개새끼들…….’

운용 가능한 헬기가 꽤 여러 대였다고 했는데, 그걸 죄다 주요 인원의 가족이나 지인을 청와대로 수송하는 데 썼다고 했다.

그것도 정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이유는 명확했다.

사태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급박하게, 또 심각하게 터지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서두르기는 해야 했을 터였다.

그래 봐야 그들을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었다.

본래 정비가 필수인 헬기 특성상, 심지어 예산 때문에 애초에 좋은 헬기도 아닌 중고를 쓰던 소방 재난 본부 소속 헬기들은 정비조차 제대로 되지 않자 죄다 땅으로 떨어져 버렸더랬다.

-그래도…… 남아 있는 물자가 꽤 있을 겁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거기 근무하던 인원들이 아무래도 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만약 버티지 못하고 감염이 되었다면 그야말로 막강한 라드들이 있을 겁니다. 생존자들이 남아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일 테지만요.

그럼에도 김태평은 그곳을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었다.

서울도 지나쳐 오면서 봤지만 개판이라는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남산을 확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뭔가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단 거기서 몇 가지 물품이라도 얻어 내고, 일행도 불릴 수 있으면 불려서 가자고 했다.

유현이 보기에도 거기가 제일 나을 것 같았다.

소방차라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나.

“점점 길이…….”

“확실히 해가 짧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거기서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지만 하여간 어마어마하게 달려오지 않았나.

사태가 터진 이래 100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건 처음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김태평이 내려오면서 뚫린 길을 미리 봤고 또 그걸 기록해 둔 덕이었다.

그런 김태평도 차마 겨울 해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는지, 생각보다 일찍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우 도착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유현은 실로 오랜만에 지도를 꺼내 든 채 말을 이었다.

그나마 보건소 근방 사람들이 나이가 많다 보니 집에 지도를 구비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평생 내비만 보아 온 이들이 이렇게 길 따라오는 건 정말이지 불가능했을 터였다.

김태평도 기가 차 하지 않았나.

그래도 요원이라는 놈들이 내비가 없으면 길도 볼 줄 모른다고 하면서.

물론 그렇게 말한 김태평도 정작 지도가 있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했더랬다.

‘의외로 허술한 면이 있긴 하다니까…….’

유현은 억지로라도 웃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다가 앞을 보았다.

앞을 보았다는 말이 딱히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앞차의 후미등을 보고 가고 있었다.

“야야. 차 선다. 선다고!”

“네? 아, 네!”

그러다 멈춰 서길래 따라 섰다.

주변은 깜깜했다.

“여, 여기가 어디죠?”

“원암리……? 몰라. 길 모양은 그렇게 생겼는데, 주변에 랜드마크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아……. 네. 하나도 보이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아마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이 근방은 어두웠을 것 같았다.

그저 논밭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 않을까?

스산한 겨울바람 소리만 사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불 비슷한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덜커덕

하여간 유현은 차에서 내려 앞으로 향했다.

김태평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따라 모여들었다.

이제 보니 앞차는 불을 끄고 있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이 없었을 텐데, 탓할 일은 아니었다.

여기 사람 있다고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이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불을 켜고 달리는 건 좀 위험해 보이긴 했다.

해서 유현은 일단 불을 다 끄게 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으려니, 김태평이 입을 열었다.

“해가 너무 빨리 지네요. 바로 저 앞이긴 할 텐데…….”

“너무 깜깜해서 도저히 갈 수가 없겠습니다.”

“네, 뭐……. 라이트 켜고 달리면 못 할 것도 없기는 한데…….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해도 라드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렇죠. 그럼 어쩌죠?”

“뭐…….”

김태평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빛에 의지해 살핀 주변 풍광은 그야말로 고요하기만 했다.

‘라드가 있다고 해도……. 자극만 안 하면 달려들 거 같진 않아.’

농사짓던 노인들이 라드가 되었을 텐데…….

지금까지 끊임없이 확인해 오지 않았나.

죄 늙어 죽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물론 바로 위가 오산이고 오산은 나름 개발이 된 지역인 만큼, 피난 온 젊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당장 아침에 본 그 산모도……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와 있던 거지……? 그래도 가능성은 적어.’

그렇다면 그냥 여기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고, 습격당할 시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괜히 도로 밑으로 내려가 민가에 있다가 도망가는 것보다는 차에 타 있는 게 나을 터였다.

“좀 춥고 좁더라도 차에 있죠.”

“차에……. 음.”

유현은 반사적으로 이순규가 타고 온, 그러니까 현경을 비롯한 이들이 타고 있는 트럭 뒤를 바라보았다.

시끄럽다거나 하진 않았다.

현경은 재갈을 물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기껏해야 끙끙대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가뜩이나 아픈 몸인데 찬 바람에 잔뜩 노출이 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러나 냄새는 어떨까.

“괜찮을 거야. 현경이는 몰라도…… 나머지 둘은 아직 뭔가 달라.”

그런 의문을 읽어 낸 이순규가 답했다.

코를 가리키면서였다.

원래도 친했지만 사태를 함께 헤쳐 오면서 더더욱 잘 통하는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경계도 나눠 서면 될 거야. 차에 있는 게 나을 거 같긴 해. 내가 봐도…….”

시골길은 길이 좁기도 좁은데, 논밭과 연한 곳에는 턱이 있지 않나.

이대로 불 끄고 가는 건 그냥 차를 버리겠단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차에서 내려가 있는 것도 위험했다.

깜깜한데 턱을 제대로 넘을 수 있겠나.

“그럼 그렇게 하죠. 어차피 이동하면서 몇 번 더 노숙해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

김태평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각자의 차로 흩어졌다.

물론 경계를 서야 하기에 인원을 뽑아 순서대로 깨어 있기로 했다.

보통 중간에 일어나야 했던 유현은 오랜만에 첫 시간에 경계를 맡았다.

무려 이순규와 함께였다.

어차피 높은 건물이 없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이 쉽다 보니, 둘은 그냥 트럭 위에 같이 서 있기로 했다.

“더럽게 춥네.”

“눈이라도 안 오는 게 어디냐. 눈 왔으면 여기 셋은 얼어 죽었어.”

“하긴.”

유현은 이순규의 말에 셋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쩌면 노인들처럼 제대로 예를 갖춰 보내 주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

그때 이순규가 입을 열었다.

목표 지점으로 삼고 있던 곳을 보면서였다.

“왜 그래?”

뭐라도 떴나 해서 봤는데 보이는 건 없었다.

“아니, 연기 같은 게……. 아닌가? 어두워서 잘 모르겠네.”

연기라는 말에 다시 봤는데도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니니만큼 숙지하기로 했다.

저 너머에 불을 피울 만한 지능을 지닌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