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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165화 (165/323)

165화 한겨울 (4)

눈이 와서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식수 공급이 원활해졌다는 점이었다.

식수를 챙겨 오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그 식수를 쓰기는커녕 비축해 둬도 가능한 마당이었다.

“이런 망할.”

그 외에는 다 별로였다.

일단 나갈 수가 없었다.

어찌나 눈이 미친 듯이 내리는지, 어제까지만 해도 무릎까지 오던 눈이 어느새 허리까지 올 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거…… 사람들이 나아도 문제군요.”

잠깐 주변 동태를 살피겠다는 명목하에 밖으로 나갔던 김태평은 고개를 흔들어 눈을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새 눈이 머리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옷이 허리춤까지 죄다 젖어 있었는데, 걸어가기 힘든 건 차치하고서라도 저 젖는 것 때문에라도 못 나갈 것 같았다.

“이게 녹아 줄까……. 염화 칼슘이라도 챙겨 올 걸 그랬군요.”

유현은 그런 꼴이 된 김태평을 보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본래 쓸모없는 말은 잘 하지 않는 그인데, 지금은 예외였다.

시간이 남지 않나.

분명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날씨와 질환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나름의 자포자기를 극복하는 방식이라고 보면 되었다.

“어……? 잠깐, 그거 여기 있을 것도 같은데요?”

“아……?”

그런 유현의 말에 김태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은 농공 단지이지 않나.

그것도 꽤 규모가 컸다.

시골 산기슭에 위치한 공장에 염화 칼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네?”

이순규도 동의했다.

이만한 곳이라면 있을 법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염화 칼슘은 상당한 전술적 우위를 가져다줄 터였다.

도망갈 길에만 뿌려 놓고 차로 달리면 되잖아?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아픈 환자가 있다고 해서 24시간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시간도 남겠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셋은 곧 공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라드가 없는 건 다행인데…….”

“여기 있던 사람들 다 어디 갔을까?”

“뭐…… 집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정부 측에서 그걸 유도하기도 했으니까요.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기도 했고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나친 오만이었지만…….”

따로 다니는 일은 없었다.

폐공장이고, 벌써 사흘이나 지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위협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픈 게 평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나?

재수 없게 숨어든 들개라도 만나게 되면 큰일이었다.

“여기 있네요.”

“꽤 많네. 근데 이거…… 차에 튀면 안 된다고 뭐 그러지 않았나?”

유현과 순규의 말을 듣고 있던 김태평이 피식하고 웃었다.

확실히 이럴 때 샌님 티가 났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김태평은 이제 와 정보 통제랍시고 뭘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

“부식이 일어나기도 해서 그런데…… 어차피 우리가 차 타고 출퇴근할 것도 아니니 신경 쓸 건 없습니다. 그보다는…… 병이 문제죠.”

“그렇긴 하죠.”

“으음.”

그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고 사무실 쪽을 돌아보았다.

태어나서 이런 형태의 공장은 처음 와 봤는데, 공장하고 사무실들이 그냥 붙어 있었다.

나름 관리자 방이나 높아 보이는 사람들의 방은 갈라져 있어서 개수가 꽤 되었다.

그 안에 환자들이 주르륵 들어 있었는데, 이제 위중한 환자가 6명으로 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민이 호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인데…….

“계속 약을 주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기는 한데.”

“솔직히 어려워 보이는 환자가 모두 몇이고, 누굽니까.”

유현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자, 김태평이 재차 물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김 주무관……. 그리고 이 새끼 이거.’

요원 주제에 독감에 걸려 쓰러질 줄이야?

지금 손 하나하나가 아쉬워 죽겠는데 이걸 쓰러져?

안 될 일이었다.

“우선…… 노인 두 분은 당장 내일도 장담하기가 어려워요.”

“아……. 그런가요.”

김태평은 관심 없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들만 대할 때는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라도 그래야 하는데, 여기선 나름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했다.

‘정작 이 사람은 나랑 같은 부륜데…….’

유현은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놈들이 문제였다.

“안 되는데……. 그분들 덕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난 건데.”

이를테면 이순규가 그랬다.

본인은 원치 않게 물려서 감염까지 되었던 주제에 인간성이 제일 진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거참…….

“그리고 김 주무관님하고 요원님. 이름이 뭐죠?”

“박재한입니다.”

“박재한. 네, 그분. 그분은…… 위독해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김 주무관은요?”

“그분은…… 다행히 스테로이드 반응이 굉장히 좋아서 호흡이 대강 돌아오고 있어요.”

“다행이군요.”

쥐.

그게 얼마간 효과가 있다는 건 확인하지 않았나.

지능이 정도 이상 발달한 무리에게도 잠시 통할 정도니, 서울에 널려 있는 라드에게는 잘 통할 터였다.

때문에 사실상 김태평에게는 유현을 제외하면 이순규 그리고 김 주무관이 제일 중요한 인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재원이도 좋지는 않고. 그나마 타미플루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버티긴 할 거 같은데. 김현철 소위도 증세가 나빠지고 있습니다.”

“오예리, 이진호 형사는요?”

“오예리 형사는 괜찮아요. 이진호 형사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겁니다.”

“제일 상태가 좋은 건 저 사람이군요.”

김태평은 현경이 있는 사무실을 가리켰다.

말이 사무실이지 앞에 이런저런 바리케이드까지 설치를 해 둔, 일종의 감옥이었다.

“네.”

유현 또한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밥을 늘리자마자 현경의 상태는 확실히 더 개선되어 가고 있었다.

“읍, 으읍!”

물론 그만큼 더 거칠어지고 있기도 했다.

순규에게는 나름 인도적 처치를 했고 따라서 재갈까지 물려 두지는 않았지만, 현경에게는 재갈을 물려 두었는데 결론적으로 보면 잘한 일이었다.

물려 놨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여 보면 지금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나.

탈출을 꿈꾸는 것인지 아니면 공격을 원하는 것인지 혹은 단순히 밥을 더 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저런 소리가 건물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건강하다 못해 혈기가 넘치네, 아주.”

김태평은 현경이 있는 방과 자기 부하 박재한이 있는 방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털었다.

“저 바이러스의 힘이겠죠.”

“ARS-24 말입니까?”

“이제 와서 그렇게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렇죠.”

“으음…….”

김태평은 발걸음을 옮겨 박재한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원래 다른 요원들과 같이 있었는데, 너무 상태가 안 좋아지는 바람에 따로 옮긴 마당이었다.

이 방은 창이 있어서 방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끄으으…….”

방 안에 몸을 세운 채 누워 있는 재한은 정말이지 힘겨워 보였다.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게 비단 김태평과 같은 의료 문외한에게만 해당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순규가 보기에도 그랬고, 유현이 보기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아니, 유현은 당장 내일까지 버티기도 어렵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들이야 원래 노쇠한 데다가 이동하면서 심력까지 많이 소모한 탓에 더더욱 힘들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이 환자는…… 좀 사정이 달랐다.

‘ARDS-adult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성인 호흡 곤란 증후군)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 같은데…….’

심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폐에 물이 차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환자의 경우엔 아마도 패혈증이 원인이 되었을 터였다.

젊은 만큼 면역 반응이 더 강했을 테고 그 때문에 이리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당연히 스테로이드를 썼지만, 아쉽게도 별 효과는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없었다.

반응을 보일 때까지 버텨야 할 텐데…….

아쉽게도 이곳 농공 단지는 병원이 아니다 보니 그럴 만한 설비가 없었다.

다시 말해, 박재한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ARDS……? 내가 잘은 모르겠는데…… 그거 죽는 거 아냐?”

“그렇지.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아니, 그럼…….”

“적어도 셋은…… 죽을 거 같아.”

“이런 망할.”

그 얘기를 들은 이순규는 푸욱 하고 한숨을 쉬었다.

유현도 그랬다.

노인들은…….

미안하지만 그렇게까지 정이 쌓일 만큼 오래 같이 지낸 것도 아닌 데다가, 감염내과 의사라는 특성 탓에 감염이 확인되었을 때 이미 반쯤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요원은…….

저 사람은 너무 젊었다.

무엇보다 저 사람 덕에 오예리 등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는다……. 이 말입니까?”

둘은 그 얘기를 현 상황에서 나름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김태평에게 전했다.

김태평은 박재한을 돌아보면서 물었고,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현경을 바라보았다.

“물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네?”

그러면서 내놓은 의견이 자못 황당해서 유현은 재차 되물었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귀를 의심한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라는 걸 실시간으로 알아 가는 기분이랄까.

“물리게 하는 겁니다. 죽는 거보다는 그게 더 희망이 있을 거 같은데요. 이이제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현경을 보면…… 이미 무리 중 하나가 됐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입니다. 물리적으로 죽지 않았다고는 해도 우리가 알고 있던 현경은 아니에요. 라드가 된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 아닙니까. 당장 이순규 교수님도 라드였습니다.”

“으음…….”

“저도 제 부하가 죽는 게 아니라면 이런 제안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아예 없다면서요? 그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물리게 한다…….

감염을 시킨다는 뜻인데.

대개의 상황에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멘탈의 소유자인 유현조차도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이렇게 되면 나나 박원상이나……. 별다를 게 없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말은 곧 그만큼 솔깃한 제안이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이론적으로 물리게 되면 뭐가 되었건 간에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드레날린만 폭주하는 건 아냐. 스테로이드 계열의 호르몬도 폭주해. 그렇게 되면 단순히 그 기전만으로도 호전을 보일 거야. 거기에 만약 카니발리즘을 보인다면…….’

유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서도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전개했다.

‘현경과는 상황이 또 달라. 박재한은 이미 독감 바이러스가 패혈증을 일으키고 있을 정도로 창궐한 상황이야. 바이러스가 카니발리즘을 보인다 해도 쉽지 않을 거야. 그럼 정말로…….’

이이제이를 꿈꿔 볼 수도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본인에게 의사를 묻죠. 아직 의식이 있을 때…….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동의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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