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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159화 (159/323)

159화 탈출 (3)

후두둑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던 비는 이내 장대비가 되었다.

정상적인 세상이었다면, 반가운 비였을 터였다.

최근 비가 많이 오진 않았으니까.

폭격 이후 반강제적으로 소낙비가 쭉 온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게 이유였던 듯싶었다.

“이런 망할.”

그러나 지금은 빈말로도 반갑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기온이 떨어지는 와중에 비라니.

심지어 차를 버리고 도망치느라, 짐도 버린 마당이었다.

그나마 유현은 지나칠 정도로 좋은 체력을 무기로 외투라도 걸치고 있었지만, 저쪽은…….

‘아니, 아냐. 저쪽 걱정할 때가 아니지.’

유현은 고개를 털어 내고는 현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으으.”

“일단 잡아.”

빗물에 미끄러지던 현경이 간신히 그 손을 잡고 위로 올라섰다.

작은 바위였는데, 작다곤 해도 올라가던 방향이다 보니 밑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라드 여럿이 보였다.

몇몇은 흩어지고 있었다.

저놈들에게도 이 비는 최악이지 않겠나.

그러나 여전히 따라붙는 놈들도 있었다.

좀 더 단단히 껴입은 놈들이었다.

“흐, 흐으.”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이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방향 신경 쓰지 말고 가자고.”

“어, 어.”

유현은 이내 고개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경도 그 뒤를 따랐다.

최선을 다해.

“하악, 하악.”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씩 뒤처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작정하고 뛰는 유현은 숫제 훈련받은 사람처럼 뛸 수 있어서 그랬다.

여유가 있었다면, 유현도 현경을 좀 더 챙겼을 테지만.

솔직히 겁이 났다.

다다다다

뒤따라붙는 라드들.

멀리서 봐도 덩치가 장난이 아니지 않았나?

가까이서 보니 과연 라드는 라드였다.

무리 짓는 놈들은 좀 작지 않을까 하는 편견을 시원하게 날려 주고 있었다.

그나마 지구력이 좀 달려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잡혔을 터였다.

“으, 으아아악!”

탕물론 그럼에도 가까이 따라붙는 놈들이 있었다.

방금도 그랬다.

탕탕

유현은 비명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주저 없이 총을 갈겼다.

하마터면 물릴 뻔했다.

유현은 아니고, 현경이.

“으, 으으으으.”

현경은 바로 뒤에 엎어진 라드를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트라우마가 도진 탓일 터였다.

‘업고 뛰었어야 했나……? 아냐, 업었으면…….’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살짝 밀려왔다.

사실 예상을 했어야 하긴 했다.

거의 같은 상황에서 병이 도진 것이지 않나?

그러나 달리 방법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변명이 아냐.’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일로 와!”

유현은 현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항감이 살짝 있었다.

이대로 오래 뛸 수 있을까?

어려울 터였다.

‘망할.’

박원상.

그 새끼 때문에 대체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나쁜 짓을 했으면 권력이라도 쥘 것이지.

죽고 못 살던 마누라 하나 챙기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시발.’

유현은 현경을 죽어라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무리가 나름 끈끈한 놈들이란 점이었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방금 쏜 라드 놈은 죽지 않았다.

단지 무력화되었을 뿐.

우연찮게 죄 다리를 맞혔는데, 그로 인해 다리를 저는 놈 때문에 따라붙던 놈 하나가 같이 뒤처졌다.

아마도 본거지로 데리고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시발!’

그러나 아직 하나가 남았다.

놈은 근거리에서의 총의 위력을 실감했는지 감히 가까이 다가오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숨어서 끈덕지게 따라붙고 있었다.

‘오예리 형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오 형사라면 지금 저렇게 따라붙는 놈도 맞힐 수 있었을 터였다.

따라 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 훈련을 받는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될 일이었다.

오히려 총알만 허비하고, 맨몸뚱이로 놈과 마주해야 할 텐데…….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쪽! 정신 좀 차려!”

분한 마음은 그대로 현경에게 투사되었다.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비척대는 사람을 끌고 산을 타고 있다니.

암만 유현이 비정상적으로 체력이 좋다 해도, 일단은 사람이지 않나.

“어, 어.”

현경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제대로 달리는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이런 망할.”

유현을 방해하는 건 비단 현경뿐만이 아니었다.

비도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는 그렇지 않아도 오르기 힘든 길을 진흙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다고?’

죽음을 떠올리지 않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시대가 시대지 않은가.

유현은 이내 고개를 털었다.

무슨 사명감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껏 어찌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따라붙는 건 하나…….’

나머지 놈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비 때문에 철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일행을 쫓고 있을 수도 있었다.

혹은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살아남기는 어려울 터였다.

여기까지 튀면서 쏜 총알이 거진 스무 발은 될 텐데…….

‘40발도 안 남았다, 이건데.’

탄창을 갈아도 남은 총알이 거의 없었다.

요행을 바란다면야 몇 마리는 해치울 수 있겠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탄창 하나 다 비워 봐야 하나 잡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일단 서두를 수도 없겠어.”

“어, 어? 뒤에…….”

“서두른다고 뛰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아…….”

유현은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현경을 애써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방금 말한 대로 뛰지는 않았다.

아니, 못한다고 보는 게 옳았다.

가을이 지나 져 버린 낙엽이 비에 젖으니, 숫제 미끄럼틀이나 다름없어져서 그랬다.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바로 넘어질 테고, 그랬다가는…….

‘저 새끼…….’

라드 하나가 여전히 따라붙고 있었다.

놈의 입에서는 연신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럴 만한 기온은 아닌데.

제아무리 기온이 떨어졌다고 해도 영하는 아니지 않나?

‘체온이……. 우리보다 훨씬 높나.’

유현은 간단한 추론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직업병이 있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어, 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그의 등 뒤에서 무게가 훅 하고 느껴졌다.

현경의 비명과 함께였다.

방금 딴생각을 하느라, 살짝 위태로운 곳을 디뎠다 싶었는데 거길 디디다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이런!”

유현은 급히 뒤로 돌아 손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급하게 현경은 밑으로 굴렀다.

“악!”

그나마 나무에 걸려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더 밑으로도 충분히 굴러 내려갔을 기세였다.

아니, 그나마란 말을 써도 될 상황은 아닌 듯했다.

워낙 세게 굴러떨어지다 나무에 부딪혀서 그런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축하고 늘어져 있는 모습이 어디라도 크게 다친 게 분명했다.

두두두

물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드.

녀석이 아까랑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딱 느껴졌다.

‘어디로 오냐…….’

그나마 조금 전까지는 등 뒤에 현경이 있어 얼마간 안전한 상황 아니었나?

적어도 등 뒤에서 급습을 당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방이 비어 있었다.

철커덕

유현은 잔뜩 긴장한 채 일단 전방 그리고 좌우를 주시했다.

‘생각이 있다면……. 나를 공격하는 게 유리할 거야.’

어차피 현경은 언제라도 잡아갈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발걸음을 잡아 둔 순간이 유현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두고 도망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박원상을 생각하면 벌써 튀었어야 했다.

그 개새끼.

하지만 어쩐 일인지, 유현은 여전히 붙박이장이라도 된 듯 현경의 곁에 있었다.

딱히 따로 친하게 지낼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

친구의 아내랑 친하다니?

“이 미친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라드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나무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지만 하여간 녀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녀석은 현경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딱히 죽이려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방금…… 웃은 거지?’

이빨을 드러내고, 유현과 눈을 마주친 채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보라는 듯.

‘설마…….’

설마?

이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라드가 현경에게로 달려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를 정상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는 그녀의 발목을 향해서였다.

탕탕유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미끄럽던 길인 데다가, 방금 현경이 미끄러지면서 더더욱 미끄러워진 터라 달려 내려갈 수는 없었다.

다만 총은 쐈다.

‘이런 젠장.’

별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오예리 형사에 비하면 잘 쏘는 편이 아닌 데다가, 녀석은 나무와 사람을 방패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경을 지키려고 쏜 건데 현경을 쏘아 죽이면 그건 좀 이상한 일 아닌가?

게다가 총탄을 낭비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 안 돼!”

이변을 눈치챈 현경이 몸을 뒤집어,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로 라드를 쳤다.

“흐흐.”

이 또한 별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이런 무기로 흠집이나 나겠나?

옷까지 끼어 입은 상태인데?

라드는 그저 포복 상태로 이동해, 현경의 발목을 가리고 있던 양말을 벗겨 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이제 현경이 보이고 있는 행동은 숫제 발작이었다.

어디에 저런 힘이 남아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반항.

그저 맨바닥이었다면 그래 봐야였을 텐데, 이곳은 비탈이었다.

그것도 비에 젖은 낙엽이 그득한.

“어!”

어째야 하는지 고민하던 유현의 외마디 비명을 뒤로하고, 라드와 현경이 한데 뒤섞여 아래로 쭉 휩쓸려 내려갔다.

콱그러고는 아까 둘이 딛고 올라왔던 작은 바위까지 떠밀렸다.

운 좋게 라드 쪽이 먼저 바위에 닿았다.

‘이게 시발 대체…….’

아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저 상태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정도로 격렬한 충격이었다.

라드는…….

라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탕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근거리에서 일단 라드의 머리를 노렸지만, 나무 때문에 맞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가까이 오진 못했단 점이었다.

허나, 아직 다행이라는 말을 쓰기엔 일렀다는 걸 유현은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아아…….”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의식이 멀쩡하게.

“괜찮아?”

그러나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않았다는 게 옳을 것 같기도 했다.

현경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대신 손가락으로 발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가 나고 있었다.

“아.”

물린 상처가 있었다.

“아…….”

유현으로서는 뭐라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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