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북상 (1)
“사태 초반에는 뭐…….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죠. 어차피 팬데믹 사태 때문에 이쪽으로는 공조가 강화되고 있었으니까요.”
정반대로 진정한 외교적 협력은 단절되어 가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인류는 공통된 적 앞에서만큼은 아니, 그 적에 대해서만큼은 협력을 이어 나갔더랬다.
관련 부서 또는 관련 학회에 국한된 얘기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아시다시피 이 바이러스. 라드는 좀 다르죠. 우리나라야…… 정부 측에서 방조한 탓이 좀 있다곤 하지만, 다른 나라도 다르진 않더군요. 오히려 사태 초기엔 중국이 제일 잘했습니다. 거긴 틀어막고, 시민이었던 존재를 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으니까요.”
“음, 그럴 수 있죠. 이것들에 대한 정의가…… 여전히 좀 애매하죠.”
유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봐야 보이는 건 그저 시골의 한적한 풍경이었다.
원래도 겨울엔 나다니는 것들이 별로 없었을 텐데, 라드들 탓인지 폭격 탓인지 뭔지 모를 이유로 더 줄어서 더더욱 조용했다.
그러나 다들 머릿속으론 라드를 떠올리고 있었다.
각자 조금씩 이미지는 다르겠지만, 하여간에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랬는데,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어디 편한 곳에 있는 많이 배운 이들은 그들도 인간이고 인권을 지켜 줘야 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나.
불행한 것은 실제로도 그랬단 얘기였다.
“미국, 유럽 등지가 오히려 먼저 무너졌습니다. 물론 무너졌다고 해도, 미국은 주 단위로 연방에서 탈퇴를 하거나 파괴된 곳들이 있을 뿐 정부 자체는 살아 있습니다. 재건에 얼마나 걸릴지는 의문인데……. 하여간 중국도 뭐 결국은 무너지더군요.”
“통제를 했다면 그렇게 어려울 거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다른 바이러스에 비해 라드는 감염자 식별이 쉽지 않습니까?”
“공산당 간부 중에 감염자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주석이나 상무 위원의 가족 정도가 감염이 되었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 베이징부터 무너졌던 것을 보면…….”
“아.”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거대한 위기 앞에서 다양한 의견 탓에 무너지기 쉽다면, 일당 독재 체제의 국가는 그 독재자의 부패로 인해 무너지기 쉽다는 걸 실전에서 보여 줄 줄이야.
유현은 할 말을 잊은 채 잠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단 생각에 그나마 여유롭던 노인들조차 그랬다.
세상이 망했다, 망했다 해도 어딘가엔 제대로 기능하는 문명이 있을 거란 기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은 연락이 닿는 곳이…… 있기는 하겠지만, 뭐……. 공조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겁니다.”
“북한은요? 거기는 애초에 폐쇄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북한이요? 아, 발표를 안 했구나. 거기는 이미 ARS 돌 때 맛탱이 갔죠. 폐쇄는 무슨 놈의 폐쇄입니까. 오히려 중국 쪽에서 막았었죠. 북한은 국가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되었어요.”
“아. 하긴, 그렇겠군.”
제대로 기능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망한 나라가 북한 아닌가.
체급이 어느 정도 되는 국가들조차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이했었는데, 북한이야 오죽했겠나.
“그건 그렇고……. 라디오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뭐. 지금 당장 송출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위험하죠.”
“추적이 가능하단 겁니까?”
“네. 얼마든지 가능하죠.”
“흠. 그럼 위험하겠네요.”
“네. 별 관심이 없는 상태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대체 왜 저를 원하는 거죠?”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냥 전달만 받은 거라. 하지만 김조은 박사의 요청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좋은 뜻은 아니겠죠.”
“그렇군요……. 흐음…….”
유현이 김조은을 직접 아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전해 들은 말은 있지 않나.
김태평의 말대로 좋은 뜻으로 보자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김태평이 도망 왔다는 건 좋은 일이라 볼 수 있었다.
유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입에 올리기로 했다.
“그래, 뭐. 그래요. 그럼 올라가는 거나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네, 제 생각엔……. 김선태만 바로 안 내려온다면 겨울은 지나고 올라가는 게 좋을 거 같긴 합니다.”
“라드의 수가 줄 거라고 판단하십니까?”
“사람도 죽겠지만, 라드 놈들도 죽기는 하겠죠.”
“어쩌면 더 죽을 수도 있죠.”
유현의 말에 모두가 라드를 떠올렸다.
우락부락한 몸집.
꽉 찬 근육량.
단기 생존에는 그보다 유리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남자보다 여자가 추운 환경에서 더 유리하지 않던가?
그냥 생각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입증된, 그러니까 과학적인 사실이란 얘기였다.
라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남성 호르몬의 영향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받은 놈들이니 겨울에 확실히 불리할 터였다.
“물론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 그걸 먹으면서 버틸 놈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이유에서만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김태평은 대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그날, 그러니까 마트가 무너지던 날, 그는 죽지 않았을 터였다.
김선태가 1호를 잡아간 덕이겠지.
구심점을 잃은 라드들은 미친 듯 흩어졌더랬다.
수십에 달하는 병력이 지키고 있던 대위가 과연 죽어 줬을까?
그 근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었다.
‘수가 많다는 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지.’
당장 그 무리를 마주하게 되면 그냥 다 죽게 될 터였다.
예전처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니.
권력보다는 생존 자체를 탐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도 그 무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 있을까?
‘상황이 열악해지면, 충성심도 마모되는 법…….’
하물며 도적 떼로 전락한 군대가 무슨 힘이 있을까.
물론 또 기가 막힌 재주를 부려서 다른 집단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여유를 되찾은 대위는 여전히 권력을 탐할 테니.
“주변에 있는 생존자 무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김태평은 굳이 대위 얘기를 하진 않았다.
그저 뭉뚱그려 말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다들 알아들었다.
은신처에 있을 때, 길 건너에 있는 이들을 보지 않았나.
약한 이들부터 희생시키던 이들.
집단 단위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생존이 모든 가치 위에 선 시대에 문명의 상식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겠군요.”
“무엇보다, 이곳은 겨울을 나기에 너무 유리합니다. 비축된 식량도 많고……. 난방에 필요한 기름도 있고요. 다만 위험이 있다면 역시 김선태인데…….”
“정찰을 나가야 할까요?”
“뭐로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감청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대비하는 것이 정석일진대……. 지금은 그런 게 안 되죠.”
“아, 그런가요?”
“네. 중세 시대도 아니고, 나가서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데 가는 걸 착각해서 무전 쳤다가 감청당해서 바로 공격당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육성으로 닿을 거리에 나가 있는 것도 의미가 없겠죠.”
“아.”
그것들에 비하면 김선태는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아니, 최악의 위협이랄까.
그가 온다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종시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아예 몰라요. 그러니 이 길로 안 올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그렇다 해도 바깥 활동은 최소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복장도 피해야 할 거고요.”
“숨어 지내자는 말이죠?”
“네. 어차피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면, 식량 확보를 위해서 나갈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라드도 활동이 줄 것이고요.”
“그럴 테죠.”
그래야 할 텐데.
유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 그랬다.
올라가는 건 확실히 위험할 터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서 숨어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수동적인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런데, 지루하네요.”
오예리 형사가 창밖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타박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진짜로 좀 그래서 그랬다.
“저도 그래요. 이렇게 할 일이 없다는 게……. 참 음.”
유현 또한 한숨을 쉬었다.
‘돌이켜 보면 진짜 바쁜 삶이었는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언제 봐도 저녁녘의 이 시골 풍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고즈넉한 이 느낌.
사실상 은퇴 후에 꿈꾸던 삶이 아니던가?
그걸 망한 세상에서 보게 되다니.
만끽한다고 하기도 그렇고, 좀 그랬다.
“음.”
그때 이순규가 방에서 나왔다.
심현경, 그러니까 박원상의 아내와의 면담 아닌 면담이 끝난 모양이었다.
“뭐래. 아직도 입을 안 여나?”
“어지간히 충격이 컸나 봐. 김태평 요원한테 대강 들었는데, 뭐 그럴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
“넌 정신과 의산데……. 몇 주가 지나도록 진척이 없네.”
“야, 인마. 약도 거의 없고 어? 일상이라곤 없는데 무슨 수로. 내가 신이냐.”
“그래, 뭐.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아는 것도 없을걸.”
“그런 게 아니라, 난 진짜 치료를 하려고 하는 거야. 저래서 되겠어? 가뜩이나 나중에 들어온 사람인데 말을 안 하니까, 섞이질 못하잖아. 그에 비하면…….”
김태평은 연기를 잘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넉살이 좋은 건지 몰라도 무리에 섞여든 지 이미 오래였다.
김현철은 오히려 요즈음 더 얼굴이 좋을 지경이었고.
우식의 아들 지민도 김태평을 좋아했다.
맨날 어지간해서는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해 주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요즈음은 정말로 평온했으니까.
“잠시, 얘기 괜찮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김태평이 다가왔다.
일행 중엔 그나마 얼굴이 덜 알려진 이진호, 김현철 그리고 김 주무관 정도만 나가고 있었고, 정찰은 김태평과 그 팀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얼굴이야 이쪽도 알려져 있기는 할 테지만 아무래도 요령이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쪽에서 뭐가 올라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남쪽이요?”
“네. 세종시 근처 같은데…….”
“아.”
평온하단 생각을 했던 게 잘못일까.
무언가 위험이 다가오는 듯했다.
“이거 보십쇼.”
김태평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전히 발전기를 일부 돌릴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간 그 사진엔 라드가 찍혀 있었다.
엎어진 채 죽어 있었는데, 얼어 죽었겠지만 그 전에 등을 크게 당한 듯했다.
“짐승은 아니군요.”
이빨이나 발톱 자국은 아니었다.
무언가 삐죽한 무기에 당했다.
“네. 그것도 하나가 아닙니다.”
“그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상처가 좀 달라요. 적어도 세 개 이상의 무기에 당한 듯한데, 이놈 하나만 있던 게 아닙니다.”
“그럼…….”
“여기.”
“두 개체가 더 죽었군요.”
상처의 형태는 다르지만 등에 상처가 나 있었다.
발견된 위치는 중구난방이지만, 하여간에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했다.
“혹,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까?”
그걸 보면서 유현은 신음을 흘렸다.
그 탓에 김태평 또한 덩달아 더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유현은 늑대처럼 움직이던 무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놈들 때문에 도망쳐 놓고…… 잊고 있었네…….’